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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54화
PAYLUA ORIGINAL · 제54화

54화. 주소를 다 적지 않아도 되는 이유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079자

오프라인 책장
이수현은 자신의 서울 사무실 주소를 한 글자씩 떠올렸다. 건물 번호, 층수, 문 옆에 붙었던 작은 우편함. 그중 무엇이 귀환을 위해 꼭 필요한 정보일까. 르네의 면담실에는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마법진 대신 평범한 책상 두 개가 있었다. 수현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 가장 위험한 선택은 대단한 장치 앞이 아니라 평범한 책상에서 이루어졌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확인서에 이름을 쓰는 일처럼. “신청인은 원래 세계의 위치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르네가 물었다.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걸 모두 제출해야 하는지는 먼저 알고 싶습니다.” “정확한 주소가 있으면 대조가 쉬워질 수 있지요.” “대조가 쉬워진다는 건 어떤 근거로 말씀하시는 거죠? 과거 실제 사례가 있습니까?” 르네는 잠깐 말을 멈췄다. “다른 계열의 수신 주소를 비교한 사례는 있습니다. 사람을 돌려보낸 기록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주소만 쓰면 귀환이 가능하다는 설명은 할 수 없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수현은 그제야 공책을 펼쳤다. 르네가 돌려 보여 준 신청서는 세 부분이었다. 귀환 의사, 출발했던 장소의 특징, 자료 저장 기간. 두 번째 칸이 가장 넓었다. “왜 이렇게 넓죠?” “예전엔 지도를 그려 넣기도 했답니다.” “개인 거주지 지도까지요?” 르네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세드나가 질문을 바꾸었다. “현재 이 신청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부서는 어디까지인가?” “제3연락기록반의 후속 관리자인 보관소와 기술 검증반입니다. 단, 보존 자료 신청에 따라 다른 실무자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그럼 접근하는 사람을 목록으로 받을 수 있나요?” 수현이 물었다. “신청 가능합니다.” “저는 제가 제공할 주소를 최소화하고 싶어요. 먼저 일반적인 도시 정보와 제 개인만 알 수 있는 질문으로 검증할 방법이 있는지 살펴주세요.” 르네는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현도 이해했다. 오래 걸린다고 해서 권리를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 같은 날 오후 기술자 루세가 합류했다. 그는 사람 키보다 큰 유리판 앞에서 마석 접속부 도면을 펼쳐 보였다. 지난번 시동이 중단된 뒤 균열 부품은 격리해 두었다고 했다. “새 부품으로 바꾸면 작동합니까?” 메이가 물었다. “전원을 넣는 단계까지는 가능할 수 있지. 하지만 이게 어떤 결과를 내는지는 또 다른 문제야.” “그럼 무엇부터 시험하죠?” 수현이 물었다. “접속부를 바꾸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부터. 모형 회로에 전기 비슷한 힘을 흘려 보는 거야. 사람도, 편지도 이동시키지 않아.”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의 목적, 예상 위험, 중단 기준을 적은 종이가 이미 마련돼 있었다. 지난번 무리한 작동을 막았던 게 누군가에게는 번거로운 지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덕분에 시험 내용을 설명받을 수 있었다. “마석이 폭발할 수도 있습니까?” “아주 낮은 수준의 균열도 확대될 수 있어.” “실험실에 누가 있습니까?” “기술자 둘, 감시 담당 하나.” “대피 경로는요?” “저 문.” 수현은 문 옆에 쌓인 빈 상자를 가리켰다. 루세는 멋쩍게 웃더니 즉시 치웠다. 대피로를 가리는 물건은 대단한 마법이 없어도 제거할 수 있었다. 실험은 조용히 끝났다. 모형 회로의 작은 구슬이 밝아졌다 꺼졌다. 외부 계열 주소를 읽는 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실패인가요?” “아직 신호를 넣지도 않았어.” 루세는 수현에게 말했다. “오늘 알아낸 건 구슬이 예상 범위 안에서만 반응했다는 사실이야.” “충분한데요.” “그게?” “적어도 사람이 다치지 않고 다음 검증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루세는 대답 대신 시험표에 ‘동작 안정’이라는 한 줄을 적었다. *** 주소 제출 면담이 끝난 뒤 수현은 숙소로 돌아와 머릿속에서 서울의 지도를 그렸다. 기억 속의 골목은 놀랄 만큼 선명했다. 사무실에서 나오면 오른쪽에 작은 편의점이 있었고, 길모퉁이의 가로등은 비 오는 날 유난히 밝아 보였다. 그런데 막상 종이에 그리자 두 길의 각도가 어긋났다. “자기가 살던 곳을 이렇게 못 그리다니.” 그녀가 중얼거렸다. 메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제가 우리 동네를 그려도 아마 비슷할걸요.” “메이 씨는 길을 잘 찾는 편이잖아요.” “그건 익숙한 길을 걸어서예요. 위에서 본 적은 없으니까.” 수현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맞는 말이었다. 장소를 기억하는 것과 정확한 좌표를 아는 건 달랐다. 잘못된 기억을 자신 있게 제출하면 오히려 돌아갈 곳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제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적어야겠어요.” “자기 집인데도요?” “특히 자기 집이라서요. 익숙하니까 묻지도 않고 넘길 수 있잖아요.” 두 사람은 지도를 접었다. 수현은 단정적인 그림 대신 '현재 기억에 따른 설명이며 지리적 정확도 미검증'이라고 적었다. 메이는 한참 그 문구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수현 씨의 머릿속엔 언제나 작은 사무실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아요.” “그 안에서 제가 저 자신한테 계속 질문하죠.” “매우 피곤하겠네요.” “네, 꽤요.” 그날 오후 세드나가 비공개 자료 처리 수칙에 대한 오래된 사례를 들려주었다. 왕국의 한 도시가 전염병 대응 명부를 만들었는데, 치료에 필요한 환자 명단까지 광장에 붙였다가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감염 여부를 확인하려는 목적은 있었지만 누구나 이름과 집을 알게 되면서 환자들이 집 밖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수현이 물었다. “공개할 건 위험 지역과 진료 시간만 남기고, 이름은 진료 담당자에게만 주도록 바꿨어.” “목적은 유지하고 정보 범위를 좁혔군요.” “그래. 적어도 그 도시에서는.” 수현은 자신이 쓰려던 주소 제출서도 다시 펼쳤다. 돌아가려는 목적을 유지하면서 누구에게나 정확한 주소를 알릴 이유는 없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메이가 말했다. “그럼 제가 나중에 수현 씨를 찾고 싶으면 어디로 편지를 보내야 하죠?” 수현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돌아가는 데 성공한다면, 두 세계 사이에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 생각은 예상보다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연락 방법이 생기면 같이 정할게요. 그전에는 없는 우편 주소를 있다고 말하지 않을래요.” 메이는 잠시 수현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은 이렇게 하죠. 방법을 알게 되면 먼저 서로에게 묻는 거예요. 편지를 받고 싶은지.” “좋아요.” 수현은 웃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을 찾는 동시에 이곳에 남은 사람들과 헤어질 준비도 조금씩 하고 있었다. *** 저녁 무렵 수현은 자신의 주소를 세 가지로 나눴다. 공개해도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정보, 검증 단계에서만 제한적으로 제공할 정보, 끝까지 비공개로 남길 정보였다. 첫 칸엔 국가와 도시, 둘째엔 동네와 출입구의 일반적 특징, 셋째엔 정확한 호수와 가족 또는 동료의 개인 정보를 적었다. 마지막 칸은 접어서 봉투에 넣지 않고 자신의 공책에만 보관했다. “원래 세계에는 도시가 얼마나 많아요?” 메이가 물었다. “아주 많아요. 제가 사는 서울은 큰 도시고요.” “그럼 서울이라는 말만으로는 찾기 어렵겠네요.” “그렇죠. 그래도 제가 어디까지 알려 줄지 직접 정할 수 있어야 해요.” 메이는 종이 위에 아주 조그만 점을 찍었다. “여기가 지금 우리 숙소라면요. 누가 이 점을 모르더라도 여기 사는 사람이 동의하면 방문할 수 있겠죠.” 수현이 웃었다. “그것도 맞아요. 주소는 사람을 대신하지 않으니까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돌아갈 곳을 알아내는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돌아가겠다는 사람의 의사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세드나는 왕도 기록원이 제공한 옛 사고 사례를 가져왔다. 자세한 인명 정보는 지워져 있었지만 절차상의 문제는 확인할 수 있었다. 두 곳의 지명이 비슷해 서로 다른 지역의 문서를 잘못 연결했던 사건, 익명의 요청을 본인 신청으로 오해했던 사건, 서류를 보존하다 주소가 낡아 버렸던 사건이 적혀 있었다. “사람이 실제로 이동한 사례는 없나요?” 수현이 물었다. “자료상 확인되지 않아.” “그럼 주소가 일치해도 안전한 귀환을 증명하는 건 아니네요.” “맞아.” 그 대답을 듣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아무리 자세히 조사해도 돌아갈 수 없을지 몰랐다. 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열쇠라고 받은 건 지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 자료를 정리하던 수현은 서울에서 쓰던 휴대전화가 생각나 가방 깊은 곳을 뒤졌다. 까만 화면의 유리에는 자신의 얼굴만 비쳤다. 배터리가 완전히 나간 뒤로 그녀는 켜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게 고향의 지도인가요?” 메이가 물었다. “한때는요. 지도도 나오고 편지도 보내고,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죠.” “지금은요?” “전원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해요.” 메이는 손바닥을 펴며 마력을 불어넣으려다가 멈췄다. “안 되는 거죠?” “네. 어떤 에너지가 필요한지도 모르니까 무리하면 망가질 수 있어요.” 수현은 다시 기계를 넣었다. 저 안에는 연락처와 사진, 지나간 일정이 있었다. 돌아가면 가장 먼저 충전할 물건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그 안의 자료를 이곳 사람들에게 전부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간직할 권리는 장소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세드나가 뒤에서 말했다. “옛 원격 수신 장치도 전원을 넣는다고 내용을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맞아요.” 수현이 답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읽어도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별도 문제고요.” 그때 수현은 자신의 신청서에 세 번째 조건을 추가했다. 시험 목적과 보존 기간뿐 아니라, 정보가 실제로 다른 곳에 전달되었을 때 누구에게 통지되는지도 명시할 것. 조금 느려지더라도 자신의 주소가 어느 책상에서 멈추는지 알고 싶었다. *** 그날 밤 수현은 서울의 비 오는 거리를 떠올리며 자신의 이름을 한번 소리 내어 불렀다. 낯선 세계의 사람들도 이제 그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하지만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서 이곳이 고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세계에서 보낸 시간을 모두 소중히 여기면서도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 그날 밤 르네는 세 가지 정보 제공 방식을 제시했다. 첫째, 전체 주소를 서류로 제출한다. 둘째, 도시까지만 제출하고 나머지는 기술 검증 때 본인이 별도 확인한다. 셋째, 위치 정보 제출을 당분간 유보하고 귀환 의사 접수만 유지한다. 수현은 두 번째를 선택했다. 단, 기술 검증을 시작하기 전에 시험 목적과 보존 기한을 새로 설명받는 조건을 달았다. “귀환을 포기한 게 아닙니다.” 그녀가 말했다. “제 고향을 찾기 위한 정보라고 해서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다는 거예요.” 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기록하겠습니다.” 수현은 문서 마지막 칸에 서명했다.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익숙하게 적던 이름을 낯선 세계의 잉크로 쓴 지 벌써 오래되었다. 이름은 같았지만 그녀가 선택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늦은 밤, 메이에게서 다급한 전갈이 왔다. 고향의 주소 때문이 아니었다. 동부 정산실이 메이의 C-47 비용 분쟁에 대한 추가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는 통지였다. 보존 기록을 공개하지 않으면 일부 금액을 다시 개인에게 청구할 수 있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었다. “벌써 징수를 재개한다는 뜻인가요?” 메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현은 통지를 끝까지 읽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자료 요청이 왔고, 정해진 기간 안에 답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어떤 자료를 요구하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요.” “수현 씨 계약은 끝났는데…….” “그건 맞아요. 제가 당사자도 아니고요.” 메이는 고개를 숙였다. 수현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내일 세드나 씨와 동부 정산실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을 같이 생각해 봐요. 제 일을 다시 계약하지 않고도 메이 씨가 받을 수 있는 지원이 있을 거예요.” 메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수현은 갑자기 해결사가 된 척하지 않았다. 메이의 손을 잡고 서류를 옆에 놓았다. 주소와 이름이 사람을 대신할 수 없듯, 누군가를 돕는다는 말만으로 그 사람의 결정권을 대신할 수도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아 창가로 갔을 때, 그녀의 공책엔 서울이라는 두 글자만 남아 있었다. 이렇게 짧게 적은 고향의 이름이 더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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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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