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현의 계약 종료 확인서에는 두 개의 날짜가 있었다. 업무를 마지막으로 수행한 날과 비용을 마지막으로 정산할 날이었다.
“둘이 같을 필요는 없는 건 알겠는데요.”
수현이 말했다.
“그렇다고 정산하는 날까지 계속 일하라는 뜻은 아니죠?”
세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적어도 이번 서식에서는 그래.”
“그걸 처음부터 적어 두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도 종종 그렇게 생각하지.”
왕립용사길드 제7원정대의 천막은 몇 주 전과 비교하면 제법 달라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벽에 붙은 근무표였다. 누가 쉬는지, 누가 교대할 수 있는지, 누가 아직 상처가 나아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지가 표시돼 있었다. 여전히 지저분하고 군데군데 잉크가 번졌지만, 수현의 눈에는 그 어떤 장식보다 근사했다.
카이렌은 막 교대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그는 수현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잠깐 휘청거렸다. 메이가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가려 했으나 수현이 눈짓으로 멈췄다. 카이렌은 책상 끝을 짚고 스스로 균형을 잡았다.
“괜찮습니까?”
“아침에 훈련을 조금 했습니다.”
“얼마나 조금요?”
“그건……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서.”
“시간으로 말씀하세요.”
“한 시간.”
메이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훈련 전후로 휴식을 기록했고, 두 차례 어지럼증이 있어 오후 전투 임무에서는 빠질 예정이라는 대답이 이어졌다. 수현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잘하셨네요.”
카이렌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훈련을 적게 해서요?”
“아뇨. 안 좋은 상태를 숨기지 않아서요.”
그는 잠시 자신이 세운 근무표를 바라봤다. 예전의 카이렌이라면 몸 상태를 누가 묻기 전에 괜찮다고 답했을 것이다. 지금은 부하들이 쉬어도 되는 이유를 자신이 설명하는 입장이었다.
브레그 감독관은 평가표 세 장을 들고 왔다. 서류 끝에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서른 날 시험 운영의 중간 결과다. 아직 최종 평가가 아니야.”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그런데 치료비 분담과 보급 실수 항목은 확실히 줄었습니다.”
“기록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지.”
“기록이 늘었다고 문제가 늘어난 건 아닙니다.”
수현의 말에 감독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문 계약도 끝난 분이 오늘까지 잔소리인가?”
“아뇨. 마지막 인수인계입니다. 계약대로 오늘까지만요.”
브레그는 그 말에 뜻밖에도 웃었다.
“당신이 스스로 퇴근한다니 믿기지 않는군.”
수현도 어깨를 으쓱했다.
“전문가의 가치는 스스로 퇴근할 줄 아는 데서 나오거든요.”
젠이 뒤에서 작게 웃었다.
***
오전 회의의 쟁점은 의외로 소박했다. 지급받은 붕대 열 꾸러미 중 한 꾸러미를 야전 구호소에 긴급 전달했는데, 원정대 장부에는 물품이 빠졌다는 이유로 ‘분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구호소가 확인서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데런이 말했다.
“어젯밤 비가 와서 전령이 못 건넜다고 합니다.”
“그럼 분실로 확정할 수 없죠.”
수현은 서류의 ‘미확인’ 칸을 가리켰다.
“확인서를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를 도둑으로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물품이 돌아오지 않는 건 사실이오.”
브레그가 반박했다.
“용도에 맞게 이동했다는 증거가 현재 없다는 게 사실이죠.”
세드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췄다. 수현은 세드나를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자신 혼자 했을 설명을 이제 다른 사람이 해 주고 있었다.
카이렌이 최종 결정을 말했다.
“이틀간 보류로 기록하겠습니다. 그동안 구호소에 확인서를 요청하고, 보급창고에는 새 물품이 도착할 때까지 재고 변동을 알리겠습니다.”
“그럼 당신이 책임지는 거요?”
브레그가 물었다.
“검토를 담당하는 책임은 지겠습니다. 분실의 책임을 미리 인정하는 건 아닙니다.”
수현은 그의 말에 종이 한 귀퉁이를 접었다. 박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책임 소재를 확인하는 회의에서 갑자기 박수를 치면 카이렌이 더 민망할 것 같았다.
회의 뒤 젠이 조용히 다가왔다.
“수현 씨, 저는 아직 실수로 이름을 적는 게 두렵습니다.”
“어떤 실수요?”
“서명해서 제가 모두 책임져야 할 것 같은 실수요.”
수현은 젠을 데리고 근무표 앞으로 갔다.
“서명은 내가 무엇을 확인했는지 남기는 거예요. 확인하지 않은 것까지 영원히 책임진다는 주문은 아니에요.”
“그럼 확인이 안 된 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적어 두죠. 확인 못 했다고.”
젠은 오래 생각하더니 웃었다.
“그건 제가 할 수 있겠네요.”
“원정대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일 수도 있어요.”
***
저녁 식사 전, 수현은 원정대의 작은 창고를 한 바퀴 돌았다. 선반에는 붕대 상자와 마석 상자가 따로 놓여 있었다. 날짜가 오래된 물품엔 붉은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데런은 아직 모든 칸을 정리하지 못했다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제가 있었던 첫날보다 훨씬 낫네요.”
“그땐 물건이 몇 개 남아 있는지도 몰랐으니까요.”
데런은 수현에게 낡은 장부를 보여 주었다. 첫 페이지에는 마차의 바퀴가 두 번 부러졌고 한 번은 길가에서 고쳤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종이 아래에는 데런의 원래 직업이 '운송 보조'로 표시돼 있었다.
“창병인데 왜 운송 보조인가요?”
“처음 들어올 땐 마부로 일했거든요. 이후 전투 훈련을 받아 창도 들게 됐죠. 그런데 보수 항목은 안 바뀌었습니다.”
수현은 눈썹을 올렸다.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네요.”
“오늘은 수현 씨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직접 신청서를 써 봤습니다.”
데런이 새 종이를 꺼냈다. 현재 맡는 업무와 기존 보수 항목이 다르다는 내용이었다. 수현은 문장을 고쳐 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무슨 자료를 같이 내실 건가요?”
“훈련 확인서와 출정 기록이요.”
“좋습니다. 실제로 지급받은 보수 내역도 확인해 보세요.”
“이미 뽑아 놨습니다.”
데런은 희미하게 웃었다. 수현은 그의 표정이 뿌듯했다. 어쩌면 노무사란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가장 기뻐해야 하는 순간은, 자신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순간인지도 몰랐다.
장부 옆에는 어린 견습병이 남긴 메모가 있었다. '붕대 부족을 보고할 때 혼나지 않도록 할 것.' 데런은 그 메모를 가리켰다.
“예전엔 없는 걸 없다고 말하면 누가 훔쳤냐고 의심했어요. 지금은 물품이 몇 개 모자라는지 먼저 적습니다.”
“그걸 시작한 사람이 누구죠?”
“젠입니다. 메이가 처음에 가르쳐 줬대요.”
수현은 한참 메모를 바라봤다. 자신이 가르친 내용이 사람을 거쳐 더 좋은 방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거창한 규정이 없어도 가능한 변화였다.
창고에서 나오자 카이렌이 마당에서 신병의 자세를 봐 주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직접 검을 들지는 않았지만, 무릎을 과하게 굽힌 신병에게 허리 통증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용사님이 운동량을 줄였군요.”
수현이 말했다.
“대신 말이 늘었습니다.”
카이렌이 씩 웃었다.
“대원들이 제가 말이 많은 편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이제 알았으니 앞으로는 적절히 줄이시면 되겠네요.”
그 말을 듣고 데런이 크게 웃었다. 수현은 해가 지는 마당을 바라봤다. 떠나더라도 남을 풍경이었다.
***
오후에는 인수인계 목록을 확인했다. 메이의 비용 분쟁과 라비엔의 계약 정리, 카이렌의 기록 열람 신청은 모두 끝난 사건이 아니었다. 수현은 각 사건마다 다음 담당자와 당사자의 동의 범위를 적었다.
“메이 씨 건은 메이 씨가 최종 결정을 받아야 해요. 저는 자료 읽는 걸 도울 수는 있지만 당사자가 아니니까요.”
“네.”
“카이렌 씨 기록은 카이렌 씨가 열람 범위를 정하고요.”
카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라비엔 씨 건은 연락한다고 해서 원정대로 복귀시키면 안 됩니다.”
오르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예전부터 라비엔을 그리워했지만, 북방 회복소에서 본 동료의 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다친 다리로 계단을 내려오던 라비엔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 결정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수현은 메모장 마지막에 한 줄을 덧붙였다.
[도움이 필요할 때 선택할 사람과 거절할 방법을 함께 적을 것.]
“여기에 계속 있으면 좋겠는데요.”
메이가 말했다.
수현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자기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메이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도 여러분과 있는 시간이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더더욱 일을 끝없이 떠안을 순 없어요. 제가 떠난 뒤에도 돌아갈 수 있는 체계가 있어야죠.”
“그건 우리끼리 할 수 있을까요?”
“벌써 하고 있잖아요.”
수현은 벽의 근무표를 가리켰다. 젠의 글씨, 데런의 점검 표시, 메이가 적은 치료 우선순위가 함께 있었다. 모두 수현의 글씨가 아니었다.
카이렌은 한참 종이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처음엔 수현 씨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러 온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요?”
“지금은 우리가 우리 문제를 말할 수 있게 만든 사람 같아요.”
수현은 민망해서 책상 위 잉크병 뚜껑을 닫았다.
“그런 말은 평가서에 적어 주세요. 제 나중 이력서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력서가 뭡니까?”
“돌아가면 설명해 드릴게요.”
말을 끝낸 뒤 수현은 속으로 웃었다. 돌아가면 설명해 준다니, 돌아가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텐데. 두 세계 사이에서 미래형은 자꾸 엉뚱한 약속이 되었다.
***
잠자리에 들기 전 수현은 인수인계서의 사본 하나를 찢으려다가 멈췄다. 개인정보가 든 종이는 그냥 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보존해야 할 것과 폐기할 것을 나누어 봉투에 담았다. 세드나가 공개 열람에 필요한 부분을 받고, 당사자 기록은 각 당사자에게 돌아가게 했다.
“서류 정리만 해도 하루가 가네요.”
메이가 웃었다.
“그래도 이것까지 해야 진짜로 일이 끝나는 것 같아요.”
“내일은 정말 쉬는 거죠?”
“네. 제가 달력에 적었잖아요.”
메이는 만족한 듯 손뼉을 쳤다. 수현은 그 작은 소리를 들으며 처음 이곳에 온 날을 기억했다. 그날도 누군가 쉬라고 말해 주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제는 그 말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
저녁 무렵, 데런이 마지막 마차 경비 장부를 가져왔다. 그의 계산은 단정했다. 수현이 개인적으로 방문한 기록원 경비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표시하자 데런이 반대했다.
“제가 몰아서 다녀왔으니 같은 길이었습니다. 추가 비용이 아니에요.”
“연료와 이동 시간이 늘었잖아요.”
“대신 그날 제 물건도 싣고 왔습니다.”
“그러면 서로 이용한 만큼 나눕시다.”
둘은 꼬박 사십 분을 계산하다 결국 은화 한 닢을 다시 나누어 적었다. 데런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산표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수현 씨가 숫자에 약한 줄 알았습니다.”
“왜요?”
“은화 두 닢을 벌면서 은화 세 닢 드는 일을 하셔서.”
“저도 그 점은 인정해요.”
수현은 웃었다. 고향에 돌아갈 방법을 찾는 비용을 돈으로만 계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돈이 자기 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카이렌은 원정대가 자체적으로 운영할 다음 교대표를 수현에게 보여 주었다. 수현은 서명란을 찾았다가 빈 칸을 발견했다.
“왜 제 서명란이 없죠?”
“이제 저희가 할 일이니까요.”
카이렌이 대답했다.
수현은 펜을 내려놓았다.
“좋은 답이네요.”
그녀는 대신 하단에 아주 작게 썼다.
[참고용으로 확인함. 결정권자는 제7원정대.]
카이렌이 종이를 접었다. 수현의 첫날은 그에게 쉬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그녀가 더 이상 대신 결정하지 않는 것으로 끝났다.
숙소로 돌아오자 왕도 보관소에서 보낸 새 통지서가 와 있었다.
[제3연락기록반 구 사무실 관할 확인. 열람을 원하는 사람은 보존 기록 조사 목적과 정보 처리 범위를 제출할 것.]
수현은 그 종이를 창가에 놓았다. 계약이 끝났는데도 새로운 서류는 쉼 없이 찾아왔다. 이번만큼은 즉시 달려가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달력에 내일 하루를 비워 두었다.
[휴식. 단, 화재나 사람의 생명에 급박한 위험이 발생하면 예외.]
메이가 옆에서 그것을 보더니 말했다.
“이건 제가 서명해도 되나요?”
“왜요?”
“수현 씨가 또 안 지킬까 봐요.”
수현은 잠깐 망설이다 달력을 메이에게 내밀었다. 메이는 신중하게 이름을 적었다.
결국 누군가의 근무를 관리하던 노무사는, 이세계에서 자신의 휴일 승인까지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게 못내 우스워 둘은 밤늦게까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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