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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51화
PAYLUA ORIGINAL · 제51화

51화. 이름보다 오래 남은 잉크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246자

오프라인 책장
왕도 기록원은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대신 종이를 의심했다. 이수현은 출입구의 표어를 두 번 읽었다. 종이를 의심할 줄 아는 기관이라면 적어도 서명 하나로 모든 일을 끝내지는 않겠다는 뜻일까. 서울에서 숱하게 보았던 ‘확인했습니다’라는 체크 표시가 떠올랐다. 확인할 기회도 없이 체크부터 하라고 내미는 화면들. 세상은 달라도 불편한 관행에는 묘하게 공통점이 있었다. “오늘은 두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수현은 세드나와 메이에게 미리 말했다. “서로 다른 기록에 적힌 에린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관리됐는지, 그중 어느 정보까지 열람할 수 있는지 확인하러 가는 거예요.” “그게 다른 겁니까?” 메이가 물었다. “아주 달라요. 이름이 같다고 동일인으로 보고 뒤를 캐면 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 있어요. 반대로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으로 관리됐다면 책임 소재가 흐려지고요.” 세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원 확인은 정당한 목적과 최소한의 자료가 필요하지. 여기가 그걸 가장 심하게 따지는 곳이야.” “다행이네요. 저도 심한 편이거든요.” 이베른 사서는 세 사람을 창가 열람석으로 안내했다. 지난번보다 책상이 하나 늘어나 있었다. 일반 기록 열람용 탁자와 제한 기록을 놓는 탁자가 나뉘어 있었고, 그 사이에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금속선이 박혀 있었다. 허가되지 않은 서류를 넘기면 종이 가장자리가 회색으로 변한다는 설명을 듣고 수현은 손을 뒤로 뺐다. “수정펜처럼 보이지만 취소는 안 되겠죠?” “잘못 넘겼다고 사람이 감전되지는 않습니다.” 이베른의 대답은 전혀 농담 같지 않았다. 수현은 먼저 전날 받은 공문을 꺼냈다. 원격 수신 경로 기록에 적힌 ‘에린’. 그리고 서부 성역 응급 보호 계약 R-0에 남은 최초 신고 기록 담당 ‘에린’. 이름 옆의 부서, 날짜, 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눠 적었다. “같은 명칭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직 일치하는 항목이 없습니다.” “맞아요.” 이베른이 돋보기를 내려놓았다. “특히 이쪽 수신대장은 초본이 아닙니다. 원본의 첫 두 장이 습기에 손상돼 다시 옮겨 쓴 사본이지요.” “그럼 필체 비교가 안 되는군요.” “필사자의 필체만 비교하게 됩니다. 누가 원문에 서명했는지는 봉인된 원본 가장자리를 확인해야 알 수 있어요. 그 열람은 오늘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수현은 아쉬웠지만 공책의 ‘필체 대조’ 옆에 줄을 그었다. 대신 ‘필사 시점 확인’이라고 적었다. 할 수 없는 검사를 억지로 한다고 진실이 빨리 오지는 않았다. 세드나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초기 원격 수신 업무에는 담당자를 직책명으로 적는 관행이 있었습니까?” 이베른이 낡은 업무 편람을 펼쳤다. 수현에게 익숙하지 않은 작은 약자가 몇 개 나왔다. “이건 사람 이름이 아니라 접수 창구를 뜻합니다. 이 기록의 에린과는 형태가 다르군요.” “그럼 실제 사람의 이름일 확률이 높겠네요?” 메이가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확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료가 아직 없습니다.” 수현이 답했다. “우선 개인명으로 분류됐다는 뜻만 적죠.” 그때 이베른이 손가락을 멈췄다. 서로 다른 두 대장에 공통으로 쓰인 작은 표기가 있었다. 에린이라는 이름 오른쪽, 비슷한 마름모 표시였다. 수현이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같네요.” “서명 기호는 아닙니다. 이관 확인 표시예요.” 이베른이 설명했다. “문서가 원래 작성된 부서가 아니라 다른 관리 부서로 옮겨졌다는 뜻이지요.” “누가 이관했는지는요?” “그 기록은 따로 찾아야 합니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세상 어디든 서류를 한 번 열면 더 많은 서류가 필요했다. *** 점심 무렵, 메이는 허기가 진다고 말했다. 수현은 기록원을 나와 길가 수프 가게에 들어갔다. 메이는 접시에 빵을 잘게 찢어 넣었다. 수현은 그 모습을 보다가 손목의 금속 고리를 살폈다. 붉은 빛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지만 고리는 여전히 메이의 피부에 붙어 있었다. “오늘은 저 때문에 시간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에린 확인은 제 귀환 절차이기도 해요.” “그래도 저분 이름은 처음 제 치료비 장부에서도 나왔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각자 관련된 자료를 따로 받아야 해요. 메이 씨의 치료비 열람 동의를 제가 마음대로 귀환 조사에 쓰면 안 되니까.” 메이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같은 일처럼 보여도 따로라고 계속 말씀하시는군요.” “예전엔 일 하나가 여러 사람의 일로 얽히면 가장 목소리 큰 사람의 목적만 남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수현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제가 돌아가고 싶다는 사정 때문에 메이 씨의 분쟁을 수단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메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빵의 큰 조각을 수현의 그릇에 옮겨 주었다. “그럼 이건 따로예요. 그냥 제가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빵.” 수현은 피식 웃었다. “증여 의사가 명확하네요.” “또 어려운 말.” “고맙다는 뜻이에요.” 가게 밖에는 마차가 줄지어 지났다. 길가 광고판엔 ‘용사의 헌신이 왕국을 지킵니다’라는 문구가 칠해져 있었다. 수현은 오래전 카이렌이 한 말을 떠올렸다. 다들 서명하길래 자신도 했다던 청년. 이제는 근무표를 보고 전투에 나서기 전에 대원에게 몸 상태를 묻는 사람이 되었다. 수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 건 아니었다. 당사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돌아오니 세드나 앞에 봉투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이수현의 이의 신청 처리 현황, 하나는 메이의 C-47 이관 통지, 마지막은 제7원정대 자문 비용 정산 명세였다. “왜 제 비용 정산이 여기로 왔죠?” “계약이 끝났는데 연장 기간 이후의 교통비가 함께 청구됐더군.” 세드나가 말했다. 수현은 즉시 명세를 읽었다. 데런의 왕도 이동비, 중계실 방문 경비, 기록원 열람 수수료가 섞여 있었다. 별도 근거 없는 방문 경비 두 줄에는 자신이 직접 표시를 했다. “이건 원정대 업무가 아니라 제 개인 귀환 조사예요. 길드에 청구하면 안 됩니다.” “귀환 조사도 원정대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메이가 물었다. “도움이 됐다는 것과 누가 돈을 내기로 합의했느냐는 다른 문제예요.” 수현은 잉크가 마르기 전에 새 신청서를 작성했다. ‘개인 조사비 분리, 해당 항목 길드 청구 취소 요청’. 귀환할 수 없게 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이베른이 말했다. “서류를 열람하러 왔으면서, 서류를 하나 더 만들고 가시네요.” “대개 서류가 문제를 만들면 서류가 해결할 증거도 남기니까요.” “귀찮은 직업이군요.” “네. 저도 압니다.” *** 기록원에서 나온 수현은 곧장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베른이 말한 '같은 관리 계통'이 어떤 의미인지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녀는 마당의 오래된 공고판 앞에 섰다. 거기에는 기록 반입 시간과 보존 신청 기한이 붙어 있었다. 한쪽 구석의 작은 종이에는 열람 권한이 없는 사람이 서류를 열었다가 벌금을 낸 사례가 적혀 있었다. “벌금은 누가 결정하나요?” 수현이 경비원에게 물었다. “규정 담당이죠.” “그런데 이 종이는 사유가 없네요.” 경비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세부 사정은 공개하지 않으니까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하지 않는 게 반드시 불공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결정의 근거를 당사자에게 설명해 주는 절차는 있어야 했다. 그녀는 그 말을 공책에 적었다. '비공개와 무설명은 다르다.' 잠깐 뒤 세드나가 뒤따라 나왔다. “왜 여기 있어?” “제가 너무 기록에만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 중이에요.” “무슨 뜻이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서요. 가끔은 어떤 종이에든 서울이라는 글자만 보이면 믿고 싶어져요.” 세드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나가던 마부가 말에게 먹이를 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마음은 이상하지 않아.” “그래도 그 마음 때문에 남의 자료를 함부로 읽으면 안 되겠죠.” “그래. 그리고 네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이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책임이 네게 남는 것도 아니야.” 수현은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세드나가 그렇게 말해 주자 갑자기 어깨가 가벼워졌다. “어쩌면 제가 자꾸 자문 일을 놓지 못하는 건요. 돌아가는 문제를 혼자 생각하기 무서워서일지도 몰라요.” 세드나는 대답 대신 기록원 건너편 작은 벤치를 가리켰다. “그럼 오늘은 잠깐 무서워해도 돼. 내일 해야 할 일은 어차피 내일 하면 되니까.” 두 사람은 잠시 앉아 있었다. 수현은 어디론가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출근과 퇴근, 두려움과 기쁨이 있었다. 자신이 그 모든 것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제가 돌아가도 이런 일을 계속하실 건가요?” 수현이 물었다.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제 사건도요?” “네가 원하는 범위까지는 돕겠지. 네가 원하지 않는 부분은 나도 들여다보지 않을 거야.” 수현은 조용히 웃었다. “그 말이 제일 믿음직하네요.” *** 그날 기록원 담당자는 수현에게 정정 요청 양식을 하나 더 건넸다. 서명란을 보기 전, 그녀는 밑에 달린 '취소 후 재접수 가능'이라는 문구를 확인했다. “마음을 바꾸면 다시 신청할 수 있나요?” “네. 다만 이미 열람한 자료까지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는 한 번 적었다고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주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공개된 개인 정보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범위를 좁혀 둬야 했다. 그녀는 작은 글씨로 '현재 신청은 에린 표기의 업무상 이동 경로에 한함'이라고 적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사실만 남기고, 남의 삶은 여전히 남의 것으로 두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 오후가 깊어질 무렵 허가된 색인 정보가 도착했다. 두 기록의 이관 표시는 같은 날 찍힌 것이 아니었다. 하나는 오래된 성역 보존 정비 때, 다른 하나는 원격 설비 이전 때였다. 다만 둘 다 최종 보존 책임이 ‘제3연락기록반’이라는 폐지된 조직으로 연결돼 있었다. “같은 사람은 아닐 수도 있지만, 같은 관리 계통을 거쳤군요.” 세드나가 말했다. “그것만으론 제가 어떻게 서울 사무실로 불려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수현은 손톱 끝으로 제목 줄을 짚었다. “그렇지만 조사할 순서는 생겼네요. 누가 에린이라는 이름을 남겼는지 보기 전에, 그 이름이 왜 여기로 모였는지부터.” 이베른은 기록원 지하의 오래된 분류도를 보여 주었다. 여러 창구에서 들어온 편지가 가운데 도장을 거쳐 보존되는 그림이었다. 가운데 칸에는 낯선 표기가 있었다. [제3연락기록반. 사후 조회 주소: 서편 실험 서고 제이분실.] “실험 서고는 지금도 있습니까?” “건물은요. 현재 사용 여부는 확인해야 합니다.” 메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곳에 누군가 있을까요?” “먼저 그곳에 들어갈 권한이 있는 사람부터 확인해야죠.” 수현은 웃지 못했다. 문 하나를 발견할 때마다 그 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가 실망했던 시간이 있었다. 이젠 문 앞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을 알았다. 문을 열어도 되는가. 열면 무엇이 있는가. 돌아올 수 있는가. 퇴근 무렵 이베른은 잠정 기록 대조 결과를 봉인했다. [에린: 동일 인물 여부 판단 보류. 별도 관리체계의 이관 경로 공통점 확인.] 수현은 봉투를 받았다. 누군가에겐 시시한 결론이었다. 이름 하나를 알았는데도 사람을 찾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의 신원을 상상으로 만들어 넣지 않았다. 그녀가 문을 나설 때 세드나가 물었다. “이제 다음은 실험 서고인가?” “내일은 아니에요.” “왜?” “제 계약이 끝난 걸 먼저 정리해야 해서요. 남의 계약서를 읽으면서 제 계약은 대충 넘길 순 없잖아요.” 메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또 쉬실 건가요?” “가능하면요.” 수현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세계에서도 퇴사 절차가 이렇게 어렵다는 건 정말 예상 못 했네요.” 그날 저녁, 수현의 숙소 문 아래로 얇은 접수증이 밀려 들어왔다. 르네가 보낸 공식 회신이었다. 신청은 정상 접수되었고, 외부 계열 주소의 검증에 앞서 당사자에게 필요한 정보 범위를 설명하는 면담이 열릴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항목에 별표가 있었다. [주소의 정확성보다, 그 주소가 귀환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제출되었는지가 우선 확인 대상임.] 수현은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그 문장이 당연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이제 그녀는 누가 자신을 데려왔는지 묻는 동시에, 누가 자신을 어디로 보내도 되는지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는지도 묻고 있었다. 귀환의 길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는 조금 더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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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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