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쪽지가 남긴 밤이 지나고, 수현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서울 사무실 복사기에서 왕립길드의 급여 명세서가 끝없이 나오는 꿈이었다. 복사기는 경고등을 깜빡이며 말했다.
'용지가 부족합니다. 당신의 귀환은 다음 결재권자의 승인을 기다립니다.'
깨어난 수현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퇴근을 못 하니까 꿈에서도 야근하네.”
여관 아래층에서는 데런이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세드나는 여관 주인에게 전날 밤 복도를 오간 사람을 물었다. 숙박객의 이름 전체를 요구하지 않고, 방문객 출입 여부와 종이 전달을 본 직원이 있는지만 확인했다.
야간 담당자는 새벽에 어린 전달원이 왔다가 그냥 나갔다고 증언했다. 전달원은 어느 가게에서 보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찾아야 합니까?”
데런이 물었다.
“위협이 있었던 건 아니고 정보가 필요한 거니까, 먼저 여관에 전달 경위만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죠.”
수현이 답했다.
그들은 쪽지의 원본을 봉투에 넣었다. 얇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비비다가 마법 잉크가 지워질까 봐서였다.
***
같은 날 메이의 손목 고리가 다시 붉어졌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른 문구가 떠 있었다.
[분쟁 채무 내역 정정 신청 C-47: 담당 부서 이관. 강제 징수 집행 유예 유지.]
메이는 두 번 읽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없어졌다는 소리는 아니군요.”
“네. 담당 부서가 바뀌었고 징수 유예는 계속된다는 뜻이에요.”
수현은 설명하면서 메이의 표정을 살폈다. 전 같았으면 붉은 빛만 보고 겁에 질렸겠지만, 메이는 이제 어떤 문장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관 사유가 없어요.”
메이가 말했다.
세드나는 통지서의 작은 번호를 확인했다.
“C-47 계정 처리의 새 담당은 회복 관리국 동부 정산실입니다. 이유를 물어 볼 수는 있겠어요.”
수현은 머리를 짚었다. 자신에게 내려온 민원과 메이의 채무가 하나의 큰 음모로 엮여 있을 가능성을 자꾸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그 생각이 모든 서류를 같은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면 중요한 차이가 지워진다.
“이건 별도로 문의해요. 귀환 문제와 섞으면 메이 씨 돈 문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수 있어요.”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동부 정산실과의 화상 통신 비슷한 마석 연결은 끊어지는 일이 잦았다. 세드나는 공식 질의의 핵심을 세 가지로 줄였다. 이관 사유, 현재 강제 징수 유예의 효력, 메이가 열람할 수 있는 계산 내역의 범위.
정산실 직원 카릴은 거듭 양해를 구했다.
“결정권이 아직 넘어오지 않아 확답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수기 계산표는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수기 계산표에는 마석 원가, 회복 보존비, 장치 관리비가 줄지어 있었다. 수현이 이상하게 여긴 건 금액이 아니라 기준이었다.
“이 줄은 실제 치료에 쓴 비용인가요?”
“응급 보존 준비비입니다.”
“사용하지 않아도 적립한다는 뜻인가요?”
“부서 기준상 그렇습니다.”
“그 준비비를 메이 씨 개인에게 청구하도록 동의받은 문서는요?”
카릴이 잠시 화면 너머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이전 정산실에서 이관돼야 합니다.”
수현은 질문을 멈췄다. 서류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직원에게는 없다는 뜻이었다. 명확히 구분해야 했다.
“받을 수 있는 문서를 먼저 보내 주세요. 개인 청구 근거는 별도 확인 요청으로 남길게요.”
카릴은 상담 번호를 불러 주었다.
***
마차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치료소 앞에서 사람들이 다투고 있었다. 다친 일꾼 하나가 비용을 못 낸다는 이유로 약을 못 받고 있었다. 메이는 본능적으로 달려가려다가 수현을 돌아봤다.
“저 사람은 지금 치료가 필요해요.”
“그럼 제가 서류를 볼 테니 메이 씨는 의료적인 판단부터 하세요. 단, 본인 몸 상태도 생각하고요.”
치료소장은 돈 없이 약을 내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메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응급 처치를 했지만, 계속 치료하려면 의약품과 쉼터가 필요하다고 했다. 수현은 치료소와 환자 모두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일꾼의 고용주는 왕도 외곽 다리 보수 현장이었다.
“업무 중 다쳤다고요?”
“네. 돌이 떨어졌어요.”
“고용주에게 치료비 지원을 요청해 보셨나요?”
“감독이 계약에 그런 말 없다고 했습니다.”
수현은 바로 위법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제도와 계약을 확인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대신 다리 보수 발주처의 응급 지원 창구를 찾았다. 그곳에는 현장 사고 시 우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증서를 발급하는 절차가 있었다. 수현은 환자 본인의 동의를 받아 작업장명과 사고 시간만 적었고, 감독자가 보고를 접수했는지 확인 요청을 냈다.
두 시간 뒤 치료소는 보증서 접수 번호를 받고 필요한 약을 지급했다. 최종 비용 부담자는 나중에 심사하기로 했다. 일꾼은 다친 팔을 받치고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나중에 제대로 계산될지는 아직 몰라요.”
수현이 말했다.
“그래도 지금 치료부터 받게 됐잖아요.”
메이가 대답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누구에게 청구할지 다투는 동안 사람이 치료받지 못하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
***
카릴이 보낸 계산표는 숫자보다 주석이 많았다. '평균 소모율', '기대 사용량', '위험 등급 보정' 같은 문구가 줄마다 붙어 있었다. 수현은 한참을 읽다가 메이에게 물었다.
“메이 씨가 이 물품을 전부 직접 사용했다고 인정하나요?”
“아니요. 몇 개는 저희 원정대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사용 확인 내역이 있는지부터 요청해야겠네요.”
메이는 보급창고의 첫 번째 지급 조작 사건을 떠올렸다. 그때도 자기 이름으로 이미 물건을 받아 간 것처럼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받은 계산표가 같은 사건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수현은 서둘러 연결시키지 않았다.
“서로 다른 창구일 수도 있어요. 다만 본인이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면 그 기록을 열람하자고 해야겠죠.”
세드나는 연락서에 명확한 문구를 적었다.
[청구액을 구성하는 품목의 실제 지급 일시, 인수 확인자 및 업무 사용 근거 확인 요청.]
메이는 직접 서명한 뒤 자료를 봉투에 넣었다. 자기 손목에 걸린 고리를 바라보며 말하길, 예전에는 고리가 붉어지면 무조건 돈을 갚을 방법부터 고민했다고 했다.
“지금은 누가 왜 계산했는지를 먼저 묻게 돼요.”
수현은 미소 지었다. 질문 하나가 빚을 없애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빚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던 마음을 조금 바꿔 놓을 수는 있었다.
***
그날 치료소에서 만난 다리 보수 현장 일꾼은 이름이 마틴이었다. 그는 진료를 받은 뒤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다음 날 일을 쉬면 일당이 없을까 봐 두려워했다.
“의사 말씀은 뭐라고 하셨나요?”
수현이 물었다.
“며칠 쉬라고 했습니다. 팔을 들지 말래요.”
“그럼 우선 그 권고를 따르세요. 임금 문제는 작업장 계약과 지원 제도를 확인할 수 있어요.”
마틴은 고개를 내저었다.
“감독이 싫어할 겁니다. 제가 빠지면 일이 밀리니까.”
수현은 모르는 나라의 규정을 들먹이며 자신 있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마틴에게 자신이 서류를 함께 보도록 허락할지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동의했다.
작업장 계약서에는 일용 인부의 임금을 일한 날 기준으로 정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그러나 발주처 지침에는 현장 사고에 따른 치료와 작업 중단 상황을 별도로 심사한다는 항목도 있었다. 같은 문서가 아니라 적용 범위를 확인해야 했다.
“제 돈은 언제 나오나요?”
“아직 확인이 필요해요. 바로 지급된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요.”
수현이 답했다.
“대신 어떤 창구에 어떤 서류를 내야 하는지는 같이 확인할게요.”
마틴은 안도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현은 그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산재를 당한 사람은 치료보다 다음 달 생활비부터 계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마음이 낯선 세계라고 달라질 리 없었다.
***
발주처 창구에서 수현 일행은 현장 사고 보고서가 아직 작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감독자는 부상자가 스스로 실수한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며 제출을 미루고 있었다.
“책임 여부를 조사하는 것과 사고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남기는 것은 구분할 수 없나요?”
수현이 물었다.
담당자는 규정을 찾아본 뒤 사고 사실의 임시 접수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종 책임 판단은 별도로 진행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마틴은 그 자리에서 부상한 시간과 장소를 설명하고, 동료 일꾼 한 명의 연락처를 증인으로 적었다.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겁니까?”
담당자가 대답했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접수를 해야 확인을 하죠.”
수현은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지금 필요한 건 늘 그런 기본적인 순서였다. 사건을 지워 버리면 책임을 가릴 기회도 사라진다.
서류 접수 뒤 마틴은 천천히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메이는 치료 경과를 기록하며 다음 진료 날짜를 알려 주었다. 수현은 누가 비용을 부담할지 아직 미결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설명했다.
“그래도 제가 다쳤다는 기록은 생겼네요.”
마틴이 말했다.
“네. 앞으로 그 기록을 바탕으로 따져 볼 수 있겠죠.”
그는 한 손으로 모자를 눌러 쓰고 돌아갔다. 뒷모습이 작아 보였지만 걸음은 조금 가벼웠다.
***
여관으로 돌아와 수현은 손목이 뻐근하다는 걸 느꼈다. 하루 종일 기록을 적느라 손가락에 잉크가 묻어 있었다. 메이가 그녀의 손을 보고 치료를 제안했다.
“심한 건 아니에요. 쉬면 나아요.”
수현이 말했다.
“그럼 쉬세요.”
메이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수현은 웃었다. 자신의 말을 가장 무섭게 잘 배운 사람이 메이였다. 그녀는 한 시간 동안 아무 서류도 펴지 않기로 했다. 말린 과일을 먹고 창밖을 보았다. 데런은 말에게 새로 먹이를 주고 있었다. 세드나는 마지막 공문을 정리한 뒤 책을 덮었다.
“오늘은 다들 일찍 끝내는 날인가요?”
수현이 물었다.
“네가 하도 퇴근을 이야기하니까 그런가 봐.”
세드나가 대답했다.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수현은 자신이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농담처럼 '퇴근부터 하자'고 외쳤던 걸 떠올렸다. 그 농담은 이제 누군가의 실제 선택이 되고 있었다.
쉬는 시간을 기록하는 건 낯선 일이었다. 그러나 수현은 정말로 쉰 시간과 쉬려고 누워 있다가 호출된 시간을 구분해서 적어 봤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방식을 직접 따라 해 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것도 업무인가요?”
메이가 물었다.
“내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죠.”
수현은 대답했다.
“나중에 돌아가서도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잠깐 고향의 책상을 떠올렸다. 커피를 내리고 컴퓨터를 켜고 사람들의 사정을 읽던 평범한 하루.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곳에서 자신까지 쉼 없이 달리지 않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
그날 저녁 카이렌에게서 답장이 왔다. 가족이 아픈 대원에게 단기 외출을 허용했고, 젠과 다른 대원들이 경계 근무를 다시 나눴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제가 허락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 배치를 다시 계산했습니다. 처음에는 저 없이 전력이 줄어드는 것이 두려웠으나, 쉴 사람을 쉬게 하면 나머지 사람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수현은 문장에 동그라미를 쳤다. 카이렌이 '나의 허락'과 '팀의 조정'을 구분한 것이 반가웠다.
아래에는 추가 소식이 있었다. 왕립길드가 K형 안정 고리의 구형 목록과 현재 공급처를 대조하겠다고 회신했다는 내용이었다. 카이렌 손등 흉터의 원인과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수현은 그날 확인한 내용을 별도 파일처럼 나눠 적었다.
[메이: C-47 담당 이관. 집행 유예 유지. 개인 청구 근거는 미확인.]
[카이렌: 외출 배치 조정, K형 장치 목록 대조 요청.]
[이수현: 익명 쪽지의 출처 확인 중. 중계실 이동형 함 소재 미확정.]
서로 다른 문제를 다른 줄에 적는 행위가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한 줄의 결론을 급하게 얻고 싶은 순간일수록, 알아야 할 것은 여러 줄이었다.
수현은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어두운 거리에서 마차꾼이 마지막 짐을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일을 마쳤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수현 씨 앞으로 기록원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문 앞에 선 소년은 익명의 쪽지에 쓰인 것과 같은 남색 잉크가 묻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이동형 함을 가진 사람에게서 답장이 왔어요. 그런데 직접 전달할 수 있는 건 주소가 아니라 질문 하나뿐이래요.”
“무슨 질문이죠?”
소년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읽었다.
“‘현장 확인인께서는 돌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이곳의 민원을 끝내기를 원하십니까?’”
수현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 둘은 하나가 아니었다.
“둘 다 원해요.”
수현이 말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제 뜻을 묻지 않고 강요하면 안 됩니다. 그 답을 그대로 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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