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44화
PAYLUA ORIGINAL · 제44화

44화. 사라진 색인 카드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331자

오프라인 책장
메이는 동의서 맨 끝 문장을 고쳐 달라고 했다. “제 치료 기록은 보지 않아도 되는 거죠?” “네. 이번에 필요한 건 R-0 분류 색인에 관한 것뿐이에요.” “그럼 그렇게 써 주세요. '의료 상세 기록 제외'라고요.” 수현은 주저 없이 문장을 덧붙였다. 세드나는 두 개의 사본을 준비했다. 하나는 색인 카드 열람 신청용, 다른 하나는 메이 본인이 갖고 있을 보관용이었다. “거절할 수 있는 부분을 모르고 서명하면 동의라고 부르기 어렵죠.” 메이가 말했다. 수현은 깜짝 놀라 그녀를 봤다. “제가 그 말을 했던가요?” “비슷한 말, 스무 번쯤 하셨어요.” 메이는 서류를 접으며 웃었다. 수현도 웃었다. 누군가에게 배운 말을 다른 이의 언어로 돌려주는 장면을 볼 때마다 이 세계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과 여기에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묘하게 겹쳤다. *** 왕도 기록원 분관은 제7원정대 야영지에서 하루 반 거리의 작은 학술 도시 에스텔라에 있었다. 수현과 세드나, 메이는 그곳으로 향했다. 데런은 운송 책임자로 동행했고 오르카는 회복 중인 팔 상태를 확인받으며 원정대에 남았다. 일행이 많을수록 안전하다는 말도 있지만, 불필요한 이동을 줄이는 것도 안전이었다. 마차가 도시에 들어서자 종이 냄새가 먼저 났다. 수현이 서울에서 좋아하던 오래된 서점 골목과 닮았다. 물론 골목 끝에는 마법 문자가 떠다니는 간판이 있었고, 비둘기 대신 작은 통신 정령들이 창을 들락거렸다. “여기서 책을 사도 됩니까?” 메이가 물었다. “우리 일 끝나고요.” “그 말, 카이렌이 들으면 좋아하겠네요.” “왜요?” “수현 씨도 휴식을 뒤로 미룰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수현은 대답을 못 했다. 근무 시간표를 남에게 만들어 주는 사람은 자신의 휴식표를 만들기 쉽지 않다는 오래된 직업병을 들킨 기분이었다. *** 분관 사서 이베른은 안내문부터 읽게 했다. 열람 신청인은 읽은 서류를 외부에 옮길 수 없으며, 인적 정보는 별도 허가가 있어야 복사할 수 있었다. 세드나는 절차를 수현에게 설명한 뒤 자신의 직책을 내세워 예외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 사람 이름이 모두 적힌 신청서를 냈다. 수현은 소환 민원의 이해관계자, 메이는 비용 분쟁 관련 자료의 이해관계자, 세드나는 문서 절차의 입회인이었다. 사서는 봉인된 색인 카드 대신 복제 표를 먼저 보여 주었다. 원본은 훼손돼 복원 중이라고 했다. [분류 R-0: 응급 보호 원계정] [분류 R-0: 외부 현장 확인인 배정] [교차 참조 사유: 전달 경로 검증] 수현이 눈썹을 올렸다. “두 문서가 서로 같은 사건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달 경로를 함께 검증했다는 뜻인가요?” “현재 보존된 표기만 보면 그렇습니다.” 이베른은 덧붙였다. “다만 검증 결과란은 비어 있습니다. 공란이 승인이나 실패를 뜻하는 건 아니죠.” 메이는 원계정 옆의 오래된 메모를 가리켰다. [수신 확인 누락 시 원계정으로 되돌리지 말 것.] “이건 무슨 뜻이죠?” 사서는 정확한 해석을 보류했다. 원본에 포함된 절차서가 빠져 있어서 문구의 적용 범위가 불명확하다고 했다. 수현은 그 신중함이 마음에 들었다. *** 점심시간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분관 관리인이 열람실 문을 잠그며 안에 누군가 남았는지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서가 끝에서 책을 찾던 고령 연구자 한 명이 갇혔다. 그는 문을 두드렸지만 종이와 마석 흡음벽 때문에 밖에서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메이가 먼저 이상함을 알아챘다. “열람석에 지팡이가 남아 있잖아요.” 세드나는 관리인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사서가 곧바로 문을 열었고 연구자는 다친 곳 없이 나왔다. 관리인은 창피해하며 '늘 하던 방식인데'라고 변명했다. “그 말이 정확히 위험한 이유예요.” 수현이 말했다가 곧 말을 고쳤다. “죄송해요. 제가 여기 규정을 아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용자가 모두 나갔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있으면 좋겠어요.” 이베른은 자진해서 출입 수를 확인하는 작은 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일에는 문을 닫기 전에 두 사람이 열람석을 확인했다. 거창한 제도 개정은 아니었지만, 연구자는 다시 같은 방에 갇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당신들은 기록을 찾으러 왔다가 문을 고치고 가는군요.” 이베른이 말했다. “사실 문 하나 여는 방법이 필요해서 왔어요.” 수현은 그렇게 대답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 분관의 아침 열람 규칙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장갑을 끼되 젖은 손으로 만지지 말 것, 금속 펜을 사용하지 말 것, 필기할 수 있는 종이는 지정된 것만 사용할 것. 수현은 안내문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본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규칙이라면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이는 안내문을 읽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문서를 손상시키면 신청인에게 복구 비용을 청구한다'고 돼 있어요.” “어디까지요?” “'필요 비용 전액'이라고만 써 있어요.” 수현은 이베른에게 설명을 요청했다. 이베른은 불의의 사고와 고의 손상을 구분하는 내규가 따로 있으며, 열람 신청인이 모든 책임을 무조건 지는 구조는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오래된 안내문에 그 구분이 반영되지 않았다. “그럼 처음 온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겁부터 먹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동의합니다. 안내문을 다시 쓰자고 몇 번 건의했어요.” 이베른은 오래된 문구가 바뀌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각 분관이 같은 안내문을 쓰고 있는데 한 곳만 수정하면 상급 기록원의 결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럼 오늘은 구두 설명을 기록에 남겨 주세요.” 수현이 요청했다. 메이는 자신이 설명을 들었다는 표시를 하고 서명했다. 절차가 느리더라도 질문할 수 있었고, 설명은 남았다. 수현은 그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 점심 전 분관의 보존 담당자는 색인 원본이 왜 훼손됐는지 설명했다. 몇 해 전 창고 침수 때 여러 장의 기록이 서로 달라붙었고, 조심스럽게 떼어 낸 뒤에도 잉크가 남아 있는 부분과 사라진 부분이 생겼다. 사건 자체는 사고로 보고됐다. 누군가 일부러 지웠다는 증거는 없었다. “기록이 없어질 때마다 누군가 지웠다고 생각하면 조사는 간단해질 것 같은데요.” 메이가 말했다. “그 대신 틀린 결론도 쉽게 나겠죠.” 수현은 복원실 문 앞에 붙은 검사표를 봤다. 침수 발생 일자, 회수한 책의 수, 복원을 시작한 시점, 결과 확인자. 자료가 모두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시도한 사람이 무엇을 확인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베른은 복원된 문서를 펼치며 밝혔다. “이 사본은 원본이 아니라 일부 구절을 살린 기록입니다. 잘못 읽은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수현은 그 말을 기록 맨 위에 적었다. 이름 하나, 문장 하나에 사건의 향방을 걸어 놓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출처와 불확실성을 함께 보관해야 했다. 그때 데런이 잉크가 옮겨 묻은 종이의 뒷면을 보자고 제안했다. 마차 운송장에서 한 장의 글씨가 다른 장에 거꾸로 찍혀 남는 일을 봤다는 것이었다. “책을 닫아 놓으면 위아래 종이가 붙어서요. 뒤집어 보면 원래 글씨가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베른은 흥미를 보였지만, 원본을 즉시 뒤집어 만지지 않았다. 먼저 복원 담당자에게 가능한지 물었다. 담당자는 빛을 비스듬하게 비추는 방식의 검사를 제안했다. 수현은 그 작은 협업에서 의미를 느꼈다. 기록 전문가도 모든 분야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었다. *** 데런의 제안으로 보존실의 반사 조명을 바꾸자 색인 뒷면에 있던 작은 표가 일부 읽혔다. 네모난 칸 셋이 이어져 있었는데, 중간 칸에는 붉은 빛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이게 마력 흔적인가요?” 메이가 물었다. “그럴 수는 있지만 아직은 색재가 남아 있는 것만 확인됐습니다.” 복원 담당자의 답이 신중했다. 수현은 세 칸을 하나씩 노트에 그렸다. 첫 칸에는 '민원 발신', 둘째에는 '현장 확인', 셋째에는 '회신 전달'. 각 칸 옆의 작은 인장 표식은 모양이 달랐다. 중간 칸에는 손 모양이 있고, 마지막에는 두 봉투가 포개진 그림이 있었다. “로벨이 보여 준 판에는 '종료 확인'이 네 번째 칸이었어요.” 세드나가 말했다. “그럼 시대가 다른 안내문일 수도 있겠네요.” 수현은 섣불리 기계가 개조됐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후대에 추가된 기능인지, 다른 문서의 일부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여관으로 돌아갈 때 이베른은 마을 서기 로벨에게 기록 복원에 관한 질문을 보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수현은 중간 전달자가 될 수 있다고 답했지만,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내용을 대신 진술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당신은 꽤 재미없는 상담인이네요.” 이베른이 말했다. “그 소리 종종 들어요.” 수현이 웃었다. *** 오후 늦게 이베른은 서고의 오래된 안내판을 보여 주었다. 여러 도시에 있던 민원 중계 장치의 주소가 점으로 찍혀 있었다. 대부분 폐쇄됐고 일부는 이름이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단 한 곳의 문이 아니었다. 정보를 보낸 곳과 받아야 할 곳을 이어 주는 여러 경로가 있었다. “그럼 이 장치들을 모두 연결하면 원래 주소를 찾을 수 있을까요?” 수현이 물었다. “어느 주소를 말씀하시는지부터 알아야겠죠.” 이베른이 답했다. “이곳 왕도의 외곽인지, 제국의 다른 마을인지, 아니면 우리가 이름조차 모르는 지역인지.” 수현은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떠올렸다. 노선도가 있다고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역에서 출발했는지, 환승이 가능한지, 지금도 운행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환 당시 남은 자료를 목록으로 만들었다. 서울 사무실에 나타난 봉투, 메이가 보낸 진정서, 이세계 야전 진료소에 도착한 사실, 종료 확인 기록의 공백. 확정된 사실은 그 정도였다. “생각보다 적네요.” 메이가 말했다. “적어도 이 부분은 틀리지 않아요.” 수현은 노트를 덮었다. 창밖에서는 기록원 직원들이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옛 중계 장치의 정확한 기능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자기 일과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이 조금 부러웠다. 한 번은 마법 문자가 창문에 반사돼 수현의 노트에 생소한 글자가 떠오르기도 했다. 수현은 반사된 글자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가 곧 지웠다. 원본 자료와 자신의 눈에 비친 그림을 구분하지 못하면, 다음 번에는 그 잘못된 글씨를 진짜 기록처럼 믿게 될 것이다. “일단 관찰한 것과 해석한 것을 색깔로 구분해 볼까요?” 메이가 제안했다. “좋아요. 확정된 문장은 검은 잉크로, 의문은 파란 잉크로 적죠.” 세드나는 그 방법을 보고 웃었다. “이제 네 노트가 실제 기록실 같아졌군.” 수현은 파란 잉크로 적었다. [두 봉투의 그림이 같다? 관찰 근거 부족. 후대 복제품과 비교 필요.] 서류를 덮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확인해 본 사실보다 확인하고 싶은 추측이 많아지는 날일수록, 색을 다르게 적어 두는 습관이 도움이 될 것이다. *** 오후에 이베른이 복원 가능한 색인 뒷면을 보여 주었다. 짧은 필기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수신 확인자: 현장 신청인과 다른 장소의 사람] [회신 경로: 이관 봉투 회수 전까지 잠정 유지] 필체는 일정하지 않았고, 마지막 줄은 마모돼 읽을 수 없었다. 세드나는 불확실한 부분을 그대로 표시해 필사했다. “이건 최초 봉투를 보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일까요?” 메이가 물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장소가 다르다고 사람도 다른 건 아니고, 수신 확인자라는 역할이 신청인과 같지 않을 수도 있어요.” 수현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오래전부터 두 지역의 기록이 한 경로로 묶였다면, 누군가 실종자와 보호 비용을 확인하는 민원에 외부 사람을 연결하려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아직 가설이었다. 그때 이베른이 또 하나의 기록을 꺼냈다. 송신소 운영 일지의 제목만 남은 보존 목록이었다. [뒤집힌 종의 마을. 임시 민원 중계소. 원격 수신 기록 1건.] 수현은 그 마을의 종을 떠올렸다. “저희가 그곳에 다녀왔어요.” “그렇다면 잘됐군요. 거기에 있던 종은 원본 설비가 아닙니다. 원래 종은 다른 곳으로 옮겼어요.” “어디로요?” 이베른은 기록지 가장 아래에 적힌 글씨를 가리켰다. [왕도 서쪽 폐전신탑 부속 시설. 반환 확인 미완료.] 마차 한 번만 더 타면 될 거리였지만, 수현은 당장 움직이지 않았다. 폐시설이라는 말은 안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자문 연장 계약도 끝나 가고 있었다. “먼저 접근 허가와 관리 주체부터 찾죠.” 세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는 종이 위의 작은 봉투 문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에는 사라지기 전에 복사해 둘까요?” 수현은 웃었다. “허락받고요.” 그날 밤 수현은 노트에 적었다. [두 R-0는 하나의 원계약이라는 증거가 없음. 교차 색인과 원격 수신 기록 존재. 고대 중계실의 현재 위치는 아직 미확정.] 그 아래에는 또 한 줄을 덧붙였다. [집으로 가는 문을 찾더라도, 남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지는 말 것.]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44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44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