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원정대 야영지의 깃발은 떠날 때보다 조금 낮게 걸려 있었다.
“왜 내려놨지?”
오르카가 말했다.
데런이 마차를 세우고 밧줄을 살폈다.
“바람 때문에 낮춘 것 같습니다. 지난번 폭풍 때 깃대가 부러질 뻔했거든요.”
수현은 그 말에 안도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영웅의 깃발이 낮아진 것을 불길한 징조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바람과 안전 문제를 먼저 생각했다. 전문 분야가 달라져도 사람은 금세 익숙해진다.
카이렌은 천막 앞에서 일행을 맞았다. 얼굴의 피로가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출정 직후에도 혼자 서 있는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 달랐다. 젠은 옆에서 보고서를 들고 있었고, 브레그 감독관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수현 씨.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보고서부터 내밀지 않으셔도 돼요. 밥은 먹었어요?”
카이렌이 잠깐 망설였다.
“먹었습니다.”
“뭐 드셨는데요?”
“수프와 빵을 먹었습니다. 젠이 옆에서 봤어요.”
젠이 손을 들었다.
“증인입니다.”
수현은 웃었다. 밥 먹은 사실에도 증인이 필요해진 원정대라니. 그래도 그만큼 모두가 예전의 카이렌을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평가회의 전날, 수현은 물품창고를 다시 확인했다. 새 장부에는 수령인 본인 확인란과 대리 수령 사유가 나뉘어 있었다. 창고지기는 바쁘다고 투덜거렸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예전보다 부드러웠다.
“이름을 한 번 더 쓰니까 줄은 길어져. 그런데 이상한 분실 신고는 줄었어.”
“그래요?”
“아직 결론은 이르지. 열흘, 스무 날로 뭘 알아. 그래도 물약 다섯 병이 어디 갔는지 일주일 내내 싸우진 않아도 되더군.”
수현은 기간을 기록했다. 효과를 주장하려면 비교할 기준도 필요했다. 물약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인상보다, 수령 확인 누락 건수가 몇 건인지 확인하는 편이 좋았다.
치유실에서는 메이가 동료들에게 북방 회복소의 근무 교대 시범을 설명했다. 그곳에서 경험한 방식이 제7원정대에 그대로 맞지는 않았다. 인원이 적고 마물 출몰에 따라 응급 출동이 잦았다. 그래서 그녀는 격일 순환 대신 최소 대기 인원과 회복 시간을 함께 정하자는 안을 냈다.
“저는 치유사니까 아픈 사람을 보면 무조건 뛰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메이가 말했다.
“지금도 응급 환자를 외면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쓰러지면 다음 사람을 누가 치료하죠?”
카이렌이 대답했다.
“그럼 저희가 대기 인원을 지키겠습니다.”
그는 용사의 이름으로 약속하는 대신 실제 배치표에 서명했다. 수현은 그 작은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
회의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브레그 감독관, 계약관리실의 세드나, 보급 담당자, 제7원정대 대표들과 왕립길드 평가관. 평가관은 메이가 제출한 C-47 분쟁을 출석자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별도 절차라는 이유였다.
“그건 이해합니다.”
수현이 말했다.
“다만 부당한 비용 부담이 근무 안전에 영향을 줬는지라는 운영 문제는 이 회의에서 볼 수 있나요?”
평가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별 청구액의 적법성 판단은 불가능하지만, 업무 비용이 현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들을 수 있습니다.”
메이는 증언대를 향했다. 수현은 옆으로 물러났다. 이건 그녀의 진술이 아니었다.
메이는 물약이 없어서 진료를 미룬 날과 개인 비용을 걱정해 작은 상처를 방치한 날을 차례로 이야기했다. 일부 비용은 아직 논쟁 중이며 강제 징수는 일시 중단됐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빚이 전부 사라진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제가 원하는 건 돈을 안 내는 특혜가 아닙니다. 업무 때문에 쓴 물품은 누가 사용을 지시했고 누가 책임지는지 정확하게 알려 달라는 겁니다.”
회의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수현은 메이가 자신의 말투를 흉내 낸 것 같아서 웃을 뻔했다. 하지만 메이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조금 떨렸다. 자기 일로 이만큼 사람들 앞에서 말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
세드나는 준비한 서류 두 장을 꺼냈다. 하나는 R-0 회복 원계약의 비식별 초록이고, 다른 하나는 수현의 소환 민원에 붙은 R-0 분류 회신이었다.
“양쪽 문서에 같은 표기가 존재합니다.”
평가관이 말했다.
“관련 사건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세드나가 즉시 답했다.
“하나는 보호 계약 분류이고 하나는 민원 중계 분류입니다. 공통된 글자가 있다고 같은 계약은 아닙니다. 그 연관성을 확인하기 위한 정보 요청이 별도로 진행 중입니다.”
수현은 눈을 감았다 떴다. 자기 귀환과 연결될지도 모르는 단서가 잘못된 소문으로 번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카이렌은 자신에게 남은 일이 무엇인지 말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저는 여전히 싸워야 할 때 싸우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다쳤는데 제가 혼자 전진하면 그건 저만 용사가 되는 일입니다. 제7원정대는 함께 살아 돌아와야 합니다.”
평가관이 메모했다. 브레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수현은 카이렌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두 시간 쉬라는 말을 듣고도 죄책감에 어쩔 줄 몰랐다. 지금은 다른 이들에게 쉴 시간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
평가회의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보급 담당자가 새 장부 때문에 지급이 늦어졌다고 항의했기 때문이다. 그는 긴급 상황에서 수령인의 서명을 받으라는 요구가 마치 치료를 막는 일처럼 들린다고 말했다.
“환자가 피를 흘리고 있는데 서명부터 하라는 겁니까?”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되죠. 응급 출고와 사후 확인을 구분하자는 겁니다.”
“장부가 두 개가 되면 일이 늘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정말 필요한 항목만 남겨야 합니다. 지금 서식에 중복된 칸이 있다면 같이 줄이죠.”
그는 예상하지 못한 답을 들은 듯했다. 누군가 자기 업무를 더 까다롭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실제 부담을 확인하려 하자 조금 누그러졌다.
세드나는 긴급 물품 출고 내역에서 중복된 확인 칸을 찾아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사실을 세 번 서명하도록 돼 있었다. 한 번은 창고 장부, 한 번은 원정대 장부, 또 한 번은 감독관 보고서였다. 서로 다른 부서가 같은 자료를 독립적으로 요구한 탓이었다.
“세 번을 전부 없앨 수는 없지만, 하나의 원본 번호를 각 장부에서 참조하게 할 수 있을까요?”
수현이 물었다.
보급 담당자는 생각에 잠겼다. 이미 운영 중인 번호 체계를 바꾸려면 상급 기관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시범 범위 안에서 발급 번호를 공유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세드나는 담당자와 수정안을 작성했다.
수현은 수정 전후의 처리 시간이 실제로 얼마나 달라지는지 측정하자고 덧붙였다. 직원의 기분으로 개선을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다음으로 발언한 건 밤 경계 근무를 맡는 젠이었다. 그는 근무표에서는 휴식으로 표시돼 있어도, 급한 호출이 오면 쉬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카이렌은 자신이 호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때는 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실제로 급했을 수도 있죠.”
수현은 대답했다.
“하지만 긴급 호출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는 남겨야 합니다. 이름만 휴식인 시간이 있으면 실제 피로를 놓치게 되니까요.”
평가관은 사전 공지와 긴급 호출을 구분할 별도 표시를 제안했다. 젠은 그 방법으로 과거 한 달의 기록을 다시 계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늘 당장 과거 전체를 완벽하게 복구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수현이 말했다.
“우선 앞으로의 기록부터 정확히 남기는 것과, 과거에 확인 가능한 자료를 어떻게 다룰지 나눠 보죠.”
회의장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숫자만 늘어나겠네.”
수현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숫자만 늘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봤다. 그래서 대원들에게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물었다. 밤에 갑자기 깨면 다음 날 활시위를 당기는 손이 떨리는지, 쉬는 시간에 늘 출동 준비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지, 부상과 상관없이 빠지는 사람에게 불이익이 있는지.
대원들의 답은 달랐다. 누구는 기록을 늘리는 게 귀찮다고 했고, 누구는 기록이 있어서 비로소 쉬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수현은 그 두 가지를 다 적었다.
***
회의가 잠시 쉬는 시간, 브레그 감독관이 수현을 불렀다.
“처음 당신을 봤을 때는 감사관을 사칭하는 줄 알았소.”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뭐요?”
“어디 가든 낯선 사람이 갑자기 장부 보여 달라고 하면 싫어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브레그는 피식 웃었다. 그가 웃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내가 악당이라고 생각했겠군.”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어요. 카이렌 씨가 쓰러져 있었거든요.”
브레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임무가 중단되면 민간인이 위험해진다고 믿었소. 그 믿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소.”
“그럴 수 있죠. 위험에 대응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쉬지 못하는 부대가 더 오래 사람을 지킬 수 있는지는 다시 생각하게 됐소.”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그가 갑자기 다정해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빠른 결정을 선호하고 기록을 성가셔했다. 다만 자기 방식의 한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었다.
그는 수현에게 회의 이후 북쪽 순찰의 대체 인력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수현은 대체 인력을 어디서 어떻게 확보할지 계획서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말로는 다 할 수 있으니까요.”
브레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나한테도 서류를 요구하는군.”
“당연하죠. 저한테도 요구해 주세요.”
브레그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데런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수현도 속으로 웃었다.
***
오후의 평가 항목에는 부상자의 복귀 여부가 있었다. 오르카는 자신의 왼팔을 만지며 말을 골랐다.
“전투에 돌아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질문은 언제 어떤 업무부터 할 수 있느냐는 것 같습니다.”
평가관은 오르카의 의견을 들었다. 오르카는 현재 후방 지원 업무는 가능하지만 전방 방패 역할은 아직 무리라고 했다. 메이는 치료사의 관찰과 당사자 의견을 함께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현은 둘이 서로의 말을 확인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누군가 더 빨리 복귀시키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몸을 덜 회복한 사람을 밀어 넣으면 안 됐다. 동시에 본인이 해 보고 싶은 업무가 있다면 의학적 상태와 위험을 평가한 뒤 고려할 수 있어야 했다.
마지막 발언은 카이렌이 했다. 그는 휴식표를 처음 만들 때 대원들이 자신을 약한 지도자라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대원들이 위험을 더 빨리 보고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전엔 다친 걸 숨겼습니다. 그러다 결국 한꺼번에 쓰러졌죠.”
그가 말했다.
“지금은 누가 쉬어야 하는지 미리 말합니다. 그 덕분에 누구를 어느 전장에 보내야 할지도 더 잘 알게 됐습니다.”
수현은 그제야 연필을 놓았다. 기록은 전투를 대신할 수 없지만, 사람이 자기 몸을 속이는 일을 조금 줄여 줄 수는 있었다.
***
회의 결과는 조건부 계속이었다. 30일 시험 운영 종료일에 최종 심사를 하고, 그때까지 보급 수령 확인·휴게 관리·위험 업무 사전 설명을 유지하기로 했다. 아직 왕국 법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제7원정대조차 완전히 안전해진 것도 아니었다.
수현은 실무 결과를 적은 뒤 카이렌의 손등을 힐끗 봤다. 흰 고리처럼 남은 흉터는 여전했다.
“혹시 그때의 진료 기록을 다시 받아 보실래요?”
카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K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장비 종류였어요. 그 이상은 아직 몰라요.”
“괜찮습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현은 그의 말이 반가웠다.
그날 늦게 세드나가 봉인된 통지서를 가져왔다. 왕도 기록원에서 보내온 목록 대조 결과였다. 두 개의 R-0 표기는 고대 중계실의 단일 원계약 번호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보관 체계에서 독립적으로 생성된 분류일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다만 특정 시기에는 두 체계를 교차 참조한 별도의 색인 카드가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같은 번호라고 같은 문서는 아니다.”
수현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서를 이어 주는 색인은 있다.”
세드나가 답했다.
색인 카드의 위치는 왕도 기록원 분관. 그것을 열람하기 위한 조건은 '양쪽 문서의 정당한 이해관계자 또는 그 동의서를 가진 사람'이었다.
수현은 가만히 자신의 귀환 신청 번호를 바라봤다. 메이는 자기 계약의 이해관계자였고, 수현은 자기 소환 절차의 이해관계자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동의가 없다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메이 씨, 또 서류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내용부터 보여 주세요.”
메이가 활짝 웃었다.
수현도 웃었다. 바로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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