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소를 떠나는 아침, 이수현은 마차에 실린 짐보다 서류 뭉치의 무게가 더 신경 쓰였다.
라비엔이 직접 적은 접견 동의서, 세드나가 발급한 제한 열람 확인서, 메이의 비용 징수 보류 통지. 서로 다른 기관의 종이가 세 겹으로 포개져 있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에도 수현이 가장 알고 싶은 문장은 없었다.
'이수현은 여기로 돌아갈 수 있다.'
고향이 아니라 여기로? 문장을 고치다가 수현은 피식 웃었다. 이미 이곳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낸 탓인지, 머릿속 문장부터 이상하게 엉켰다.
“어디 아프십니까?”
마차를 점검하던 데런이 물었다.
“아뇨. 귀향 신청서를 쓰는 중인데 목적지를 잘못 적을 뻔했어요.”
“고향이 어느 쪽입니까?”
“아주 먼 쪽이요. 이 마차로는 못 가요.”
데런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에게 먹일 귀리를 한 줌 더 챙겼다.
“그래도 먹여 두겠습니다. 먼 길은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그러셨거든요.”
수현은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거리를 잴 수 없는 곳에 가려는 사람에게 귀리 한 줌이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귀환을 '떠날 준비가 필요한 일'이라고 받아들여 주는 건 묘하게 든든했다.
오르카는 회복소 계단 아래에서 라비엔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포옹은 짧았다. 오래 헤어졌던 사람들은 다시 만났다고 갑자기 모든 말을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편지 번호를 꼭 적어.”
“그래. 네가 답장이 늦으면 내가 먼저 확인할 테니까.”
라비엔이 말했다.
오르카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대신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라비엔은 당장 제7원정대로 복귀하지 않는다. 회복소의 기록 협력 업무를 계속할지, 계약을 어떻게 끝낼지 본인이 따로 검토한다. 그 분명한 사실을 수현은 출발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마차가 움직이자 라비엔은 눈 속에 오래 서 있었다. 수현은 그가 창문 너머로 작아질 때까지 지켜봤다. 라비엔을 찾았다는 것과 라비엔이 돌아왔다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전자의 기쁨으로 후자를 강요하지 않은 것이 이번 원정에서 가장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
반나절 뒤, 일행은 북쪽 고개 초입의 세금 검문소에 멈췄다. 경비병은 통행 증명서를 살피다 수현의 이름 옆에 붙은 '외부 자문'이라는 직책에 시선을 멈췄다.
“이 직함은 무슨 일을 합니까?”
“서류에 적힌 말을 실제 사람에게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럼 지금 이 서류도 확인해 주시오.”
경비병이 웃으며 통행증을 내밀었다. 그의 옆에는 짐을 가득 실은 마차 두 대가 줄을 서 있었다. 마차꾼들은 통행료가 올라갔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수현은 본능적으로 사안을 분류하려다가 멈췄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의무가 있는 것도,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통행료를 결정할 수는 없어요. 다만 어떤 근거로 달라졌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겠죠.”
“그런 종이는 없습니다.”
“그럼 오늘 받은 돈을 어디에 기록하나요?”
경비병은 대답 대신 책상 아래 장부를 가리켰다. 거기엔 눈길 보수비라는 항목이 새로 생겨 있었다.
데런이 장부를 읽고 경비병을 향해 말했다.
“저쪽 고개는 어제까지 눈사태 위험으로 막혀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돌아온 길이니 압니다. 보수 중이라면 운행 허가부터 알려야지요.”
경비병은 굳어졌다. 그의 뒤에서 노인이 나왔다. 검문소 책임자는 보수비를 받도록 지시받았지만 통행 제한 공문이 늦게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세드나는 관련 공문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고, 일행은 위험 도로 대신 옆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오늘도 돈을 아끼진 못했네요.”
메이가 장부에 우회 숙박비를 적으며 말했다.
“대신 마차 바퀴와 사람 다리를 아꼈죠.”
데런의 대답에 오르카가 크게 웃었다. 수현은 그 웃음에 마음이 놓였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고 겁쟁이가 되는 곳에서, 누군가 안전한 선택을 농담으로라도 칭찬하는 일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
옆 마을은 '뒤집힌 종'이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불렸다. 광장에는 실제로 작은 종 하나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래의 우편함에 편지를 넣기 전 종을 한 번씩 쳤다.
“옛날에는 저 종이 다른 지역의 소리를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여관 주인이 말했다.
수현의 펜이 멈췄다.
“소리를 받아 적었다고요?”
“전설이에요. 소리가 너무 많아졌을 때 종이 거꾸로 뒤집혔다나.”
세드나가 여관 장부에 숙박 인원을 적다 고개를 들었다.
“혹시 오래된 민원 전달 시설 이야기입니까?”
주인은 수현 일행이 이상한 관광객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는 벽에 걸린 빛바랜 목판을 가리켰다. 목판에는 둥근 테두리와 두 개의 얽힌 봉투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수현은 메이가 제7원정대 게시판에서 발견했던 봉투의 문양을 떠올렸다. 그 문양과 닮아 있었다. 같다고 단정하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있었다.
“누가 그렸나요?”
“모릅니다. 우리 증조부 때부터 있었다고 하니까요.”
“종에 관련된 문서가 남아 있나요?”
“마을 회관에 보관하는 땅 문서 정도는 있겠네요.”
수현은 내일 아침 마을 서기를 만나기로 했다. 그날 밤, 그녀는 방에 돌아와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는 오래전에 마지막 한 칸을 남겨 둔 상태였다. 화면을 켰다가 끄는 행동조차 사치였다.
그녀는 대신 검은 화면에 비친 얼굴을 바라봤다. 신호가 닿지 않아도 자기 얼굴만큼은 여전히 한국에서 보던 얼굴이었다.
“당신이 사람을 부른 거라면, 적어도 돌아가는 방법은 알려 줘야지.”
대꾸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만 복도에서 메이가 누군가와 약재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
그날 여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로벨의 어린 조카가 다가왔다. 일행이 뒤집힌 종에 대해 묻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아이는 광장에서 오래된 우편함을 관리하는 할머니를 소개해 줄 수 있다며 은화 한 닢을 요구했다.
“소개비가 은화 한 닢이나 해?”
데런이 놀랐다.
“할머니가 무서워서 아무도 안 찾아가거든요.”
아이의 말이 끝나자 여관 주인이 주방에서 나왔다.
“얘야. 또 손님을 놀릴 셈이니?”
주인이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수현이 멈춰 세웠다. 수현은 아이에게 무슨 정보가 있는지 먼저 물었다. 아이는 할머니가 오래된 종의 열쇠를 보관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할머니에게 실제로 열쇠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할머니 이야기를 해 주는 데 돈을 받으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야.”
수현이 말했다.
“다만 네가 확실히 아는 정보와 들어 본 이야기를 구분해 줘. 우리가 소개받으러 가도 되는지 그분께 먼저 여쭤 봐 주고.”
아이는 뭔가 생각하더니 은화 대신 구운 감자 하나를 받아 갔다. 데런은 그 과정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제는 아이와도 계약 협상을 하시는군요.”
“아뇨. 감자값은 협상하지 않았어요. 여관 주인분이 그냥 주신 거예요.”
수현은 손을 내저었다.
한 시간 뒤 아이가 돌아와 말했다. 할머니는 내일 해가 밝으면 광장에서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종의 열쇠는 없으며, 종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한 오래된 노래를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수현은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적었다. 이 세계의 전설은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웠지만, 전설이 만들어진 시기의 공적 기록을 찾는 단서가 될 수는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종 아래에서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이름은 마르다였다. 손가락은 마르고 눈은 밝았다. 수현이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설명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온 사람들은 다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
“어떤 사람들이요?”
“옛날 길이 끊겨 소식을 못 받은 사람들 말이야. 아들 소식을 기다리는 어머니, 고향의 전쟁이 끝났는지 알고 싶은 상인,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편지를 기다리던 아내.”
마르다는 종의 옛 노래를 천천히 불렀다. 수현은 내용 중 반복되는 세 단어를 적었다. 보냈는가, 받았는가, 답했는가. 그것은 서류상 접수·수신·회신의 순서와 닮아 있었다.
“그러면 종이 직접 사람을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는 없나요?”
마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종이 사람을 옮겼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어떤 집에선 편지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사람이 돌아온 듯 기뻐했고, 어떤 집에선 편지가 돌아오지 않아 마음을 접었지.”
수현은 노랫말을 적되, 마르다에게 일부를 마을 기록원에 전달해도 되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마지막 구절만은 자신이 부르는 방식 그대로 남겨 달라고 했다. 오래전 돌아오지 못한 동생을 생각하며 바꾼 가사라고 했다.
수현은 마르다가 자기 이야기를 남길지 결정하도록 기다렸다. 과거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슬픔을 마음대로 사료로 만들어 버리는 건 편치 않았다.
마르다는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내 이름도 적어라. 그래야 나중에 틀린 이야기가 퍼졌을 때 누가 부른 노래인지 알지.”
오르카는 말없이 종을 올려다봤다. 라비엔이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전달되지 않았던 시간이 떠올랐을 것이다. 수현은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말하고 싶으면 말할 사람이라는 걸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
***
마을 서기 로벨은 할머니의 노래를 듣고 오래된 세금 장부 속 색인 항목을 기억해 냈다. 종 관리 비용을 기록한 항목이었다. 마을이 종을 수리하는 비용을 낸 적은 있어도, 종의 소유권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옮겨 간 원본 장치와 남은 종을 혼동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이전 기록에 서명한 관리인이 같은 사람인지 대조해 볼까요?”
세드나가 물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인이라는 명칭이 세 번 나왔지만 이름은 각각 달랐다. 수현은 관리인이 한 사람이 아니라 시대마다 바뀌는 직책이라는 점을 적었다. '중계실의 관리자'를 찾는 일이 고대인 한 명을 찾는 것과 같지는 않았다.
기록을 살피던 중 데런은 통행료와 물자 운송 장부를 나란히 놓았다. 먼 과거의 장치 수리 예산이 마을 북쪽 성역을 거쳐 왕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사실이 보였다.
“장치를 왕도로 보냈다면 운송비가 나왔을 수도 있겠네요.”
그가 말했다.
수현은 눈이 빛났다.
“맞아요. 장치의 작동 원리를 몰라도 물건을 옮기는 데 사람과 마차는 필요하니까요.”
그러나 장부는 중간이 찢겨 있었다. 운송 목적지까지 한 번에 적혀 있지 않았고, 나중에 추가된 글씨는 필체가 달랐다. 수현은 무리해서 그 빈칸을 추측하지 않았다.
로벨은 사본 발급 수수료를 안내했다. 수현이 여행 경비와 개인 조사 비용을 나눠 적는 모습을 보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같은 지갑에서 나갈 텐데 왜 굳이 나눕니까?”
“같은 지갑에 있어도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는 다를 수 있어서요.”
수현이 말했다.
“모두 섞어 놓으면 나중에 아무도 자기 몫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거든요.”
로벨은 한참 수현을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음 번에 공용 기록과 개인 청구 비용을 나누는 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수현은 왕국 기록 전문가가 아니니 함께 공부해 보겠다고 답했다.
중계실을 찾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종 아래에서 사람들의 질문은 벌써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
다음 날 마을 서기 로벨은 오래된 장부 한 권을 꺼냈다. 표지에는 '중계소 이전에 관한 토지 반환 기록'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보여 주는 자료가 아닙니다.”
“저희가 원본을 가져가려는 건 아닙니다. 공개 가능한 부분만 확인할게요.”
세드나가 길드 신분증을 내밀었지만 로벨은 고개를 저었다. 마을 자치 기록은 길드의 명령으로 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현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관청을 하나의 인장으로 통과할 수 있다면 권력은 편하고 사람들은 불편해진다.
“어떤 신청서를 작성하면 되나요?”
로벨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대체 왜 다들 서류를 보여 달라는 소리만 합니까?”
“제가 여기 온 이유를 알고 싶어서요. 어쩌면 돌아가는 길도요.”
그녀는 자신이 이곳 사람이 아니며 출처를 알 수 없는 민원 봉투로 넘어왔다고 설명했다. 로벨은 마법이라는 단어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민원 봉투 하나에 사람이 실려 왔다는 대목에서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럴 리가. 옛 중계소는 말을 옮기는 곳이었지 사람을 옮기는 곳이 아니었어요.”
“그건 확인해 볼 가치가 있겠네요.”
로벨은 선대 서기가 남긴 해설서를 꺼냈다. 옛 중계소에는 접수·배정·회신이라는 세 칸의 표시가 있었다. 그런데 수현이 가져온 통지서에는 네 번째 칸, '종료 확인'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이 칸은 후대에 생긴 겁니다.”
로벨이 낮게 말했다.
“누가 추가했는지 아십니까?”
“아뇨. 다만 이 마을로 시설이 이전하기 전의 명칭은 알고 있지요. 고대 민원 중계실. 현재는 공식 지도에서 빠진 이름입니다.”
수현은 잊지 않으려고 천천히 적었다. 길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길이 실제로 있었다는 기록을 찾았다. 그때 로벨이 해설서 밑에서 낡은 청색 쪽지를 꺼냈다.
[현장 확인인은 신청인이 아니다. 업무가 배정된 사람은 종료 확인을 요청할 수 있으나, 종료의 사유와 귀환의 방법은 서로 다른 절차로 다룬다.]
수현은 마지막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귀환 방법이 별도라고요?”
로벨은 시선을 피했다.
“더 이상은 저도 모릅니다. 원본을 보고 싶다면 왕도 기록원의 공개 목록을 찾아보셔야 합니다.”
수현은 쪽지의 사본을 허락받았다. 종이 귀퉁이에는 작은 인장 하나가 찍혀 있었다.
두 봉투 사이에 선을 긋는 손.
그녀는 종이를 접으며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은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길처럼 보이는 것을 출구라고 믿고 뛰어들었다가, 그곳이 아직 시작 지점이라는 걸 알게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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