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렌의 답신은 아침 식사 도중 도착했다.
성역과 북방 회복소를 연결하는 통신판은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지만 문서 원본을 순식간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기록 열람 의사를 다시 한 번 말하고, 왕립길드의 인증 담당자가 확인한 위임장을 별도 전령으로 보냈다고 했다.
“제 진료 기록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면 제게 먼저 알려 주세요.”
카이렌의 목소리는 맑았지만 조금 긴장돼 있었다.
“그럴게요. 다만 아직 해당 기록이 카이렌 씨 것인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수현이 말했다.
“압니다. 확인되지 않은 걸 미리 겁내지 않으려 해요.”
메이가 옆에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잘하고 있어요, 카이렌.”
“메이, 어제는 쉬었어?”
“네. 여기 와선 오히려 수현 씨가 쉬라고 잔소리를 해요.”
“그건 원정대에서도 마찬가지였지.”
수현은 억울했다.
“저는 합리적으로 제안했을 뿐인데요.”
통신판 너머에서 젠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카이렌의 서명 확인이 끝나기 전에는 개인 기록을 열어 보지 않겠다고 다시 약속했다.
***
행정실에서는 그날 근무 담당자 대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베라는 낡은 장부의 공개 가능한 부분을 복사해 가져왔다. 이름 대신 직책과 배치 번호, 입직 시각만 남긴 표였다.
문제의 두 번째 인수 확인에는 ‘임시 보관 책임자 L-4’가 찍혀 있었다. L은 회복소 직원에게 부여하는 문자가 아니었다. 외부 동행 기록관을 위한 별도 표기였다.
“그럼 북쪽으로 온 기록관이 잠깐 자료를 맡았다는 거군요.”
수현이 말했다.
“맞아요. 다만 그 사람이 라비엔인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베라는 L-4의 신원 대조표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인적 정보가 담긴 문서라 공개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오르카는 이번에는 먼저 신청서를 요구했다.
“제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이 라비엔이냐는 사실입니다. 만나 달라고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수현은 놀라 그를 보았다. 오르카는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웃었다.
“배웠습니다. 급할수록 남의 문부터 부수지 말라고요.”
“제가 그런 과격한 말까지 했나요?”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비슷했어요.”
세드나가 둘을 번갈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둘 다 조용히 해. 서류에 소란을 기록할 순 없으니까.”
***
오후에 카이렌의 위임장 사본이 도착했다. 인증 담당자의 확인 표식이 있었지만 북방 회복소는 다시 원본 도착 여부와 본인의 의사를 통신으로 확인했다. 수현은 왜 같은 말을 여러 번 묻는지 잠깐 답답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누군가 강제로 쓴 위임장이라면, 그 사람이 안전한 자리에서 자기 의사를 다시 말할 기회가 필요할 수 있었다.
베라는 카이렌과 통신을 연결하고 다른 사람이 답을 대신하지 않도록 했다. 수현은 방 밖에서 기다렸다. 본인의 기록을 누가 확인할지 결정하는 자리에는 당사자의 말이 제일 먼저 있어야 했다.
잠시 뒤 베라가 나왔다.
“카이렌 씨는 이수현 자문인과 세드나 계약관리실 직원이 자신과 관련된 이송 기록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진료 내용 전부를 열람하는 데 동의한 건 아닙니다.”
“그 범위를 지키겠습니다.”
수현이 대답했다.
허가된 대조 결과가 나오기까지 또 시간이 걸렸다. 수현은 일부러 방문객 식당으로 내려가 차를 마셨다. 오르카는 그녀가 너무 느긋하다며 혀를 찼다.
“지금 제일 중요한 일이 뭔지 모르십니까?”
“알죠. 그런데 제가 복도에 서 있다고 심사가 빨라지진 않잖아요.”
“정말 특이합니다.”
“회사에서 회의 시작 전에 복사기 앞에 서 본 적이 있으면 이해할 거예요.”
오르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수현은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해가 기울 무렵 대조 결과가 나왔다. 베라는 먼저 두 종류의 기록을 분리해 놓았다.
“서부 성역의 응급 이송장과 이곳 환자 명부를 대조했습니다. 당시 두 입소자의 현재 신원을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청인 카이렌 씨의 현재 등록 정보와 일치하는 기록이 있는지 확인할 수는 있어요.”
“결과가 어떻게 나왔나요?”
“이송자의 임시 표식 K는 카이렌 씨의 본명 첫 글자로 만든 약자가 아닙니다.”
수현은 멈칫했다.
“그럼 뭔가요?”
“당시 사용한 보호 장치 종류를 나타내는 분류 기호입니다. K형 안정 고리를 장착했다는 뜻이에요.”
오르카는 눈을 크게 떴다.
“카이렌의 손등에 고리 자국이 있습니다.”
“고리 자국만으로 특정인을 식별할 수는 없습니다.”
베라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 시기에 여러 환자가 같은 장치를 사용했습니다.”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달부터 줄곧 K라는 글자를 카이렌의 이름에 연결해 생각했다. 그럴듯해서 더 위험한 추론이었다.
“그럼 카이렌 씨가 당시 여기 입소했다는 증거는 없군요.”
“현재 허가된 자료로는 동일인임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회복소가 아닌 중간 경유 시설의 기록에 이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드나가 물었다.
“이송자 기록에 장비를 부여한 곳은 어디인가요?”
“서부 성역의 응급처치소입니다. 장비가 사용된 뒤에는 회수했는지, 어느 대상에게 인계했는지 별도 기록을 남깁니다.”
수현은 노트에 적었다.
[장치 종류 K. 사람 이름이 아님.]
그 한 줄을 적으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틀린 가설을 버리는 것도 앞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
저녁 통신에서 카이렌은 그 결과를 오래 듣고 있었다.
“그럼 제 흉터가 다른 사람의 것과 같은 모양일 수도 있겠네요.”
“네. 그리고 그 표식이 카이렌 씨의 이송 기록이라는 증거도 아직 없어요.”
“그렇습니까.”
잠시 조용해졌다.
“실망하셨나요?”
수현이 물었다.
“조금요. 무섭지만 이유를 알고 싶었거든요.”
“이유를 찾는 길이 하나 사라진 건 아니에요. 잘못된 길 하나를 지운 거죠.”
카이렌은 웃었다.
“수현 씨 말은 늘 위로가 되는지, 숙제만 늘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둘 다일 수 있죠.”
젠이 통신판 근처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용사님, 오늘 휴식 기록은 제가 대신할까요?”
“아니. 내가 쓸게.”
수현은 그 대답을 들으며 마음이 놓였다. 카이렌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흘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현재의 하루를 자기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
카이렌과의 통신이 끝난 뒤 메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현이 먼저 묻지 않으려 하자 메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카이렌을 가장 가까이에서 치료했는데도 그 사흘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당시 메이 씨도 현장에 없었던 시간이 있잖아요.”
“그래도 제가 치유사니까…….”
“모든 사람의 모든 시간을 책임질 수는 없어요.”
수현은 탁자 위의 장비표를 가리켰다.
“지금은 장치 종류 하나를 알아냈죠. 이것만으로 원인을 추정하면 오히려 카이렌 씨에게 없는 기억을 심어 줄 수도 있어요.”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끝을 깍지 끼고 오래 생각했다.
“제가 아는 건 카이렌이 돌아온 뒤 너무 피곤해했다는 거예요. 손등에는 흰 자국이 있었고요. 그런데 그걸 소생 흔적이라고 생각한 건 나중 일이에요.”
수현은 그 말을 노트에 그대로 적었다. 목격 사실과 그 뒤에 붙은 해석을 구분했다. 메이는 문장을 보고 작게 웃었다.
“이렇게 나눠 놓으니까 제가 모르는 게 더 많네요.”
“모른다는 게 무능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확인할 순서가 생긴 거죠.”
저녁에는 세드나가 K형 안정 고리의 규정을 찾아왔다. 손목이 아니라 팔과 손등에 고정하는 장비였고, 마력 폭주나 급성 혼란 상태를 완화하는 용도라고 했다. 치료 자체를 대신하는 장치는 아니었다.
“그럼 소생 장비는 아닌 거군요.”
수현이 물었다.
“이 규정상으로는 아니야. 다른 의료 행위와 함께 사용될 수는 있지만, K형 고리 사용만으로 소생을 뜻하지 않아.”
세드나는 장비 매뉴얼에 적힌 부작용을 읽어 주었다. 오래 사용하면 피부에 흔적이 남을 수 있었다. 특히 고정 마력이 과한 경우에는 흰 자국이 몇 달 지속되기도 했다.
“카이렌의 흉터와 비슷하네요.”
메이가 말했다.
“비슷하다는 것까지요.”
수현은 잠깐 웃었다.
세드나는 서부 성역 장비실에 보낼 질의서를 만들었다. 수현은 질문 범위를 좁혀 달라고 부탁했다. 특정인의 치료 기록을 무턱대고 공개해 달라는 대신, 해당 기간에 지급된 K형 장비의 수량과 회수 기준, 누락된 한 건의 관리 상태를 확인하자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사람 이름은 안 묻는 거야?”
세드나가 물었다.
“본인 동의가 확인된 범위에서만요. 우선 장비가 어떻게 관리됐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그녀는 자기 말이 조금 답답하게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이송장 표식 하나를 카이렌의 이름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느리게 가는 편이 나았다.
한편 오르카는 기록실 앞에서 데런과 조용히 대화하고 있었다. 수현이 다가가자 오르카가 물었다.
“라비엔이 여기 있으면, 제가 제 몸을 잘 돌봐야 한다고 혼내겠죠?”
“어쩌면요.”
“그래서 오늘은 팔을 제대로 치료받았습니다.”
그가 붕대를 조금 들어 보였다. 수현은 반가웠다.
“그걸 라비엔 씨를 만나기 위한 준비라고 생각하세요?”
“반은 그렇습니다. 나머지 반은 이제 제가 아프고 싶지 않아서요.”
수현은 그 말을 들으며 대답 대신 엄지를 들어 보였다.
또 한 명이 자기 몸을 돌볼 이유를 남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 시작했다. 라비엔을 아직 만나지도 못했지만, 그를 찾는 과정에서 이미 누군가는 달라지고 있었다.
수현은 밤에 통신판의 접수 시간을 기록하고 침대에 누웠다. 카이렌의 사흘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빈칸을 서둘러 채워 넣지 않는 것이 지금은 가장 정확한 일일지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수현은 카이렌에게 보낼 중간 보고서를 새로 썼다. 추측을 숨겨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추측을 했고 무엇이 틀렸는지 알리는 편이 더 정직할 것이다. 그녀는 K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장비 분류였다는 사실을 첫 줄에 적었다. 그리고 장비의 일반적인 용도와 미회수 기록이 있지만 해당 장비의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썼다.
메이는 보고서에 덧붙일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렌에게 너무 무리해서 기억을 되살리려 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본인이 원한다면 진료를 받는 게 먼저예요.”
수현은 그 문장을 권고 사항으로 따로 적었다. 누군가 자신의 사흘을 찾는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현재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필요는 없었다. 그날 보고서 맨 마지막에는 이렇게 썼다.
[확인되지 않은 일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립니다. 그 또한 현재 확보한 중요한 결과입니다.]
***
밤이 깊을 무렵 테르논이 작은 종이를 들고 숙소를 찾았다. 그것은 K형 안정 고리의 보급 목록에서 분리된 오래된 접수지였다.
“개인 기록은 아닙니다. 당시 어느 시설이 장비를 받아 갔는지 나타내는 목록이죠.”
“왜 이제 보여 주시는 거예요?”
수현이 물었다.
“환자 신원과 연결되지 않는 보급 자료인지 검토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종이에는 K형 고리가 여러 개 적혀 있었고, 그중 세 개가 서부 성역 응급처치소로 공급돼 있었다. 또 하나는 회수 예정으로 표시됐으나 실제 회수 일자는 비어 있었다.
“미회수 장치가 한 개 있었다는 건가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분실인지, 파손인지, 기록 누락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수현은 손등의 흉터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 장부와 실제 회수 기록을 비교할 방법이 있습니까?”
“서부 성역 장비실에 문의해야겠죠.”
테르논이 말했다.
수현은 웃음을 참았다.
멀리까지 사람을 찾으러 왔는데 다시 서부 성역에 질문을 보내야 했다. 사건은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마치 끝없이 서로 다른 부서를 돌아다니는 민원서 같았다.
그런데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K의 뜻조차 모른 채 카이렌의 운명을 마음대로 판단했을 것이다.
수현은 새 요청서 제목을 적었다.
[K형 안정 고리 미회수 1건의 처리 결과 확인.]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르카가 밖을 내다봤다. 바람에 작은 눈덩이가 굴러와 부딪힌 것뿐이었다.
“별일 아니군.”
그가 말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필요한 건 모든 소리에 놀라는 일이 아니라, 놀란 다음에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일, 그들은 L-4의 이름에 관한 심사 결과를 받게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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