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실에는 창문이 없었다.
이수현은 그런 회의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창문이 없어도 결론이 잘 나오는 회의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사람의 이름과 빚을 함께 다룰 때는 밖이 보이는 편이 좋았다. 적어도 바깥세상에는 서류보다 많은 삶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
탁자 위에는 봉인된 R-0 원계약 사본이 놓여 있었다. 아스텔, 세드나, 메이, 수현, 성역 심사관 두 명이 참석했다. 리온 법무관은 공작가 관련 인장 범위에 대한 의견서를 보냈고, 직접 심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늘 심사 범위는 신청인의 비용 부담과 관련된 계약 유형, 승인 권한, 이전 절차입니다.”
심사관이 말했다.
“원계약의 개인 정보는 필요한 부분만 공개합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린 시간이 길었지만, 그 기다림이 다른 사람의 비밀을 멋대로 볼 권리를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첫 번째 봉인이 풀렸다.
***
원계약의 제목은 예상과 달랐다.
[응급 회복 대상 임시 보호 및 기록 보존 계약]
“근로 계약이 아닌데요.”
메이가 먼저 말했다.
“맞습니다.”
심사관이 대답했다.
“적어도 이 원계약의 목적은 응급 상황에 처한 대상자의 보호와 기록 보존입니다. 이후 어떤 계약으로 전환됐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수현은 펜을 들어 날짜부터 적었다. 원계약은 제7원정대 편성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류의 첫 줄에는 ‘신원 확인 대기’라는 표시가 있었다.
“그래서 원정대 명부보다 날짜가 빨랐군요.”
세드나가 말했다.
“네. 다만 그 뒤 원정대 비용 계정과 연결된 과정은 별도 심사 대상입니다.”
심사관은 다음 장을 펼쳤다. 보호 요청 담당자란에는 에린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단, 그 옆에 작은 글씨가 더 있었다.
[대상자를 대신하여 최초 구조 신고를 접수한 임시 기록 담당.]
메이가 숨을 들이켰다.
“그럼 에린은 다섯 번째 원정대원이 아니었던 거예요?”
“적어도 이 문서에서 에린은 계약 대상자가 아니라 신고 담당자로 기재돼 있어요.”
수현이 답했다.
“하지만 다른 편성 명부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는 따로 봐야 해요.”
그녀는 이름 옆의 글씨를 다시 읽었다. 지금까지 숫자 아래에 감춰져 있던 에린은 적어도 하나의 역할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름이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색인부의 공란은 조금 덜 차갑게 느껴졌다.
***
다음 장이 중요했다. 원계약 비용은 왕립길드의 긴급 회복 예산에서 선지급하고, 신원 확인 후 적법한 절차에 따라 부담 주체를 확정하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메이 씨 청구서에는 부담 주체가 이미 메이 씨로 표시돼 있어요.”
수현이 말했다.
“그 사이에 별도 동의 또는 법령상 근거가 있어야겠네요.”
심사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원계약에는 없습니다.”
“그럼 메이의 비용 청구는 무효인가요?”
세드나가 물었다.
“여기서 바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개인 정산 전환 문서의 효력 심사를 별도로 해야 합니다. 다만 원계약 그 자체만으로 메이에게 채무가 발생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메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수현은 성급하게 축하하지 않았다. 최종 채무가 취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당연한 것처럼 붙어 있던 비용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물음표가 찍혔다.
“그 판단을 서면으로 받을 수 있나요?”
수현이 물었다.
“예. 오늘 심사 결과에 포함하겠습니다.”
메이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원계약 마지막 장에는 이수현도 처음 보는 기호가 있었다.
[현장 확인 민원 연계 기록. 분류 R-0.]
“이게 소환 서고의 민원과 연결되나요?”
수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당 부분은 이곳 심사 권한 밖입니다.”
심사관이 답했다.
“다만 연계 번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문장에 수현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메이의 도움 요청과 오래된 응급 보호 계약이 연결돼 있었다. 누가 왜 그런 번호를 붙였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이상했다.
아스텔은 서류를 덮으면서 말했다.
“소환 서고에 추가 질의를 보내겠습니다. 이곳의 심사 결과를 첨부해도 되는지 먼저 확인받고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귀환 문제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의료 기록을 함부로 넘길 수는 없었다.
***
심사가 끝난 뒤 세드나는 원정대에 소식을 전했다. 카이렌의 얼굴이 통신판에 떠올랐다. 그는 메이의 비용 청구가 임시 징수 중단 상태를 유지하며, 원계약만으로 부담을 확정할 수 없다는 판단을 듣고 숨을 내쉬었다.
“메이가 조금은 편해지겠네요.”
“조금은요.”
메이가 웃으며 손목을 들어 보였다.
“고리는 아직 있는데, 예전만큼 무섭지 않아요.”
“정산 전환 문서는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수현이 말했다.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없는 동안 원정대 기록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젠이 근무표를 빠짐없이 작성했고, 브레그 감독관도 보급 수령 확인을 직접 봅니다.”
“좋네요. 제가 있을 때보다 잘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요. 수현 씨가 계속 시켰던 걸 저희가 이제야 하는 겁니다.”
수현은 웃었다.
“시켰다기보단 같이 정한 거죠.”
그 작은 수정이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
오후에 프레드의 증언과 북방 전초소의 과거 명칭을 대조한 회신이 도착했다. 현재 그곳은 ‘북방 격리 회복소’로 불렸다. 성역이 운영하는 치료 시설이었고 왕립길드와 보안 협약을 맺고 있었다.
“사람을 찾으러 가려면 또 허가서가 필요하겠네요.”
데런이 씁쓸하게 웃었다.
“네. 그리고 환자가 아직 있는지도 확인해야 해요.”
수현은 답했다.
오르카는 조용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막연하게 북쪽을 헤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렇죠. 다만 라비엔이 거기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오르카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저 확인하러 가고 싶습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누군가의 희망이 또 다른 누군가를 위험하게 만들지 않도록 필요한 정보를 먼저 모으고 싶었다.
***
저녁 무렵 성역 앞뜰에 작은 종이 게시판이 놓였다. 아스텔이 메이에게 건넨 임시 심사 결과 요약문이었다. 공개해도 되는 부분만 추려 신청인의 동의를 받은 뒤 붙였다.
[임시 보호 계약은 그 자체로 제삼자의 개인 채무를 확정하지 않는다. 비용 전환은 별도 근거 확인이 필요하다.]
누군가 문장을 읽고 물었다.
“그럼 저도 제 돈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수현은 익숙한 질문에 웃었다.
“본인 계약과 청구 기록을 확인할 절차부터 알아보세요. 서로 다른 사건을 같은 결론으로 볼 순 없어요.”
사람들은 조금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냥 돌아가지는 않았다. 성역의 접수관이 질문 방법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수현은 그 광경을 보며 마음이 놓였다. 변화는 수현이 모든 질문에 답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답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에서 시작됐다.
그때 아스텔이 찾아왔다.
“추가 문서가 하나 왔습니다.”
그것은 원계약 색인 정정을 알리는 확인서였다. ‘에린’이라는 이름이 숫자 아래 잘못 분류돼 있던 항목을 ‘최초 신고 기록 담당’으로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신원 미확정 보호 대상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은 채 유지됐다.
“이름을 되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메이가 물었다.
수현은 종이를 잠시 바라봤다.
“에린이라는 사람이 이 기록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바로잡았죠.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였고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몰라요.”
“그래도 처음보다 낫네요.”
“네. 이름이 쓰인 자리가 틀렸다는 걸 알고 고칠 수 있게 됐으니까요.”
***
원계약의 색인이 정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리온 법무관이 짧은 의견서를 보냈다. 공작가 위임 인장 B-13의 효력이 원계약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다시 검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범인이 나오는 겁니까?”
젠이 통신판 너머에서 물었다.
“아니요. 아직 범인이라는 말을 쓸 단계가 아니에요.”
수현은 답했다.
“공작가 인장이 운영비에 사용됐다는 것과 메이 씨에게 비용을 부과한 것은 다른 절차예요. 중간에 어떤 문서가 있었는지 확인해야 하죠.”
“공작이 잘못한 게 아니면 누가 잘못한 거예요?”
“그건 조사 결과를 보고 정해야겠죠. 특정 사람이 잘못했을 수도 있고, 관리 체계가 오래 방치됐을 수도 있어요.”
카이렌이 옆에서 덧붙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게 있잖아. 이름만 보고 탓하지 않는 거.”
젠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네요. 제 출정표에 제 이름이 있는데 제가 쉬던 날도 있었으니까요.”
그 대답에 수현은 웃었다. 조사 결과가 당장 대단한 승리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은 바뀌고 있었다.
***
성역 관리관은 정정 결과를 확인한 뒤 한 가지 절차를 제안했다. 현재 R-0과 연결된 비용에 대해 당사자가 별도 이의를 제기한다면 보존 자료를 다음 심사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한 달 동안 자료의 임의 폐기를 금지하는 보존 조치를 검토하겠습니다.”
“확정인가요?”
수현이 물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신청만 접수할 수 있어요.”
“그럼 접수증부터 받겠습니다.”
메이는 직접 이름을 쓰고 고리의 인증 표식을 남겼다. 수현은 접수증의 제목과 날짜, 신청한 내용이 실제로 일치하는지 읽었다. 보존 조치를 요청한 대상은 메이의 비용 정산에 필요한 R-0 원계약과 이관 장부의 관련 부분이었다. 라비엔 개인 기록 전체를 무단으로 동결해 달라는 요청은 아니었다.
“그렇게 구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리관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기록도 누군가에겐 중요한 삶이니까요.”
메이가 웃었다.
“저도 제 기록이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않았으면 해요.”
수현은 메이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지키는 규칙과 부당한 빚을 바로잡는 규칙은 서로 적이 아니었다.
***
점심 무렵 오르카는 북방 격리 회복소로 가는 길을 물어 왔다. 마차로 이틀이 걸리며 마지막 산길은 의무 호송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제 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오르카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있었다.
“우선 그곳에 면담 신청서를 보내죠. 라비엔이 거기에 있는지 알려 줄 수 없다고 해도, 기록 확인 절차는 있을 거예요.”
“시간이 계속 가고 있습니다.”
“알아요.”
수현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런데 오르카 씨. 만약 우리가 도착했는데 라비엔이 없다면 어떡할 거예요?”
그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길을 찾겠죠.”
“그렇죠. 그래서 이동에 돈과 시간이 얼마나 드는지, 어떤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가자는 거예요. 마음이 급하다고 위험 정보를 건너뛸 순 없어요.”
오르카는 방패를 내려놓았다.
“라비엔이라면 저보고 생각부터 하라고 했을 겁니다.”
“그럼 이번에는 그분 말씀을 들어 보세요.”
오르카가 웃었다. 수현은 그의 표정에서 슬픔과 조금의 안도를 함께 보았다.
***
해가 기울 무렵 아스텔은 수현을 작은 서고로 불렀다. 이번에는 새로운 비밀 문서가 아니라 간단한 인계표였다.
“내일 봉인 점검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읽은 자료 중 정식으로 사본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을 정리했어요.”
그 안에는 승인 범위와 담당자 이름, 복사한 날짜가 명시돼 있었다. 수현은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허가 하나 받는 데도 종일이 걸렸지만, 이제는 무엇을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정리돼 있었다.
“우리가 떠나면 이 기록은 어떻게 되나요?”
“원본은 여기 남습니다. 정당한 회수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진요. 그 뒤에는 인수 기관이 책임져야 하겠지요.”
“그 책임이 기록에도 남겠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현은 수녀에게 인사했다. 서로의 일을 존중하면 어려운 조사도 조금은 덜 불안해질 수 있었다. 서고 입구에서 나오며 그녀는 처음 보았던 좌우가 뒤집힌 봉투 문양을 떠올렸다. 그 문양과 귀환의 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류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 삶을 영원히 멈춰 둘 수는 없었다. 새로운 세계에 와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어쩌면 그것이었다.
밤에 수현은 숙소의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21화에서 시작한 새 자문 계약의 절반가량이 지나 있었다. 30일 시험 조정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돌아갈 방법은 발견되지 않았고 라비엔의 행방도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에게는 비용 청구의 근거를 따질 공식 문서가 생겼고, 카이렌에게는 자신의 치료 기록을 확인할 신청권이 남았다.
수현은 일지를 펼쳤다.
[확인: R-0 원계약은 응급 보호·기록 보존 목적.]
[확인: 에린은 해당 원계약의 최초 신고 기록 담당.]
[확인: 원계약 자체만으로 메이의 채무를 확정할 근거는 부족.]
[미확인: 원래 보호 대상의 신원, 라비엔 소재, 카이렌의 치료 내역, 소환 봉투의 귀환 기능.]
마지막 줄은 비워 두었다가 새로 적었다.
[다음 확인 장소: 북방 격리 회복소.]
그때 문밖에서 메이가 불렀다.
“수현 씨, 저녁은요?”
“먹으러 갈게요.”
수현은 펜을 내려놓았다. 해결되지 않은 일은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의 밥까지 미룰 이유는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오르카와 데런이 따뜻한 빵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세드나는 이미 작은 식탁에 수저를 놓아 두었다.
“다음엔 북쪽이라면서요?”
데런이 물었다.
“갈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야죠.”
“그럼 오늘은?”
수현이 웃었다.
“오늘은 퇴근입니다.”
그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멀리 북쪽에서는 또 다른 보존 기록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그 기록을 읽으러 갈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스스로 적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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