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 권한을 증명해라.”
수현은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안심했다.
적어도 상대가 칼부터 꺼내 들지는 않았다. 서류를 요구한다는 건, 서류로 싸워 볼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서류를 요구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서울에 있을 때도 제일 난감한 사람은 ‘규정대로’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정작 규정을 보여 달라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회색 망토의 여자, 세드나는 이번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먼저 제 소개부터 할게요. 이수현입니다. 제7원정대가 보낸 민원으로 현장에 왔습니다.”
“민원?”
“네. 부상자 치료 문제와 계약 관련 분쟁이요.”
“우리 길드에는 외부 상담인을 파견하는 제도가 없다.”
“저도 알고 온 건 아니에요.”
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실제로 왔으니 할 말이 없네요.”
세드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메이를 돌아봤다.
“제7원정대 치유사. 이 여자를 초대한 적이 있나?”
메이는 짧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누구에게?”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모르는 사람을 소환했다고?”
“정확히는 민원을 넣었는데요. 그랬더니 저분이 나타났어요.”
세드나는 수현을 다시 쳐다봤다.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미심쩍은 낯선 여자를 보는 시선에서, 설명되지 않는 행정 사고를 보는 시선으로.
수현도 그 기분을 이해했다.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신청자가 계약관리실 앞에 나타나면 담당자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현장 확인을 허용한 명령서가 있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부를 볼 수 없다.”
“그건 이해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정식으로 요청할게요.”
수현이 메이 옆으로 한 걸음 옮겼다.
“첫째, 제7원정대 계약 당사자에게 계약서 전체를 열람하게 해 주세요. 둘째, 메이 씨 명의로 지급됐다는 물품의 수령 기록을 확인하게 해 주세요. 셋째, 치료 비용이 어떻게 계산되는지 설명해 주세요.”
세드나가 턱을 들어 올렸다.
“누구의 명의로?”
“메이 씨와 카이렌 씨의 명의로요. 저분들이 계약 당사자잖아요.”
“그들의 대리 권한을 갖고 있나?”
아.
그건 정확한 지적이었다.
수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그럼 돌아가라.”
“지금 받으면 되죠.”
“뭐?”
“서식 있어요?”
세드나의 눈썹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
메이가 글을 적는 동안 수현은 옆에서 문구를 불러 줬다.
[본인은 이수현에게 제7원정대 보급 및 치료비 관련 서류를 함께 확인하고, 사실관계에 관하여 질문할 권한을 위임한다.]
여기까지 적었을 때 메이가 펜을 멈췄다.
“그런데 이걸 쓰면 수현 씨가 저 때문에 곤란해지는 건 아닐까요?”
“저는 이미 많이 곤란해졌어요.”
“…….”
“서울에 두고 온 냉장고 반찬도 못 먹고 있거든요.”
메이가 무슨 말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수현은 다시 웃었다.
“농담이에요. 근데 이건 메이 씨가 결정할 일이에요.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메이는 잠깐 생각한 뒤 천천히 이름을 썼다.
계약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일은 중요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사람의 일을 대신 결정해 주겠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을 또 다른 방식으로 무시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세드나가 종이를 훑었다.
“서명이 진짜인지 확인해야 한다.”
“확인하세요.”
“마력 각인을 찍을 수 있나?”
메이가 팔찌를 내밀었다. 붉은 금속 고리가 작게 빛나더니 종이 한구석에 푸른 문양을 남겼다.
수현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마법으로 본인 확인이라. 주민등록증보다 편리한데, 분실하면 정말 곤란하겠네.
세드나가 종이를 접었다.
“치유사가 자신의 개인 정산 내역을 확인하는 것까지는 허용한다. 다른 원정대원의 기록은 안 된다.”
“좋습니다.”
수현은 곧장 대답했다. 한꺼번에 모든 걸 요구했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보다 지금 가능한 범위를 확실히 하는 편이 나았다.
카이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는 깨어난 뒤 따로 동의를 받으면 된다.
***
계약관리실은 보급창고보다 훨씬 깨끗했다.
서가에 파일이 빽빽하게 정리돼 있었고 서기들은 자리마다 작은 수정구를 놓고 일했다. 수현은 순간 서울의 공공기관 민원실을 떠올렸다.
차이가 있다면 민원 번호표 대신 저주처럼 보이는 마법진이 있고, 복사기 대신 하늘을 나는 깃펜이 있다는 정도였다.
세드나는 가장 안쪽 책상에서 메이의 정산표를 꺼냈다.
[메이 / 제7원정대 치유사]
[현재 치료비 미정산: 은화 47닢]
[대기 중인 지원물품: 지급 보류]
메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마흔일곱 닢이요? 저는 그만한 돈을 쓴 적 없어요.”
“치료에 쓴 마석과 회복술의 사용료다.”
“회복술은 제 마력으로 썼는데요?”
세드나는 눈을 깜빡였다.
“시설 운영비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시설이요?”
메이가 천막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가 부상자 재우는 천막이요? 비만 오면 새는 그 천막?”
수현은 정산표를 받아 봤다.
비용 항목이 세 개였다.
마석 보충비.
정화진 유지비.
소생 대비 적립비.
마지막 항목에서 펜이 멈췄다.
“소생 대비 적립비가 뭔가요?”
세드나가 서류를 넘겼다.
“원정대원이 사망했을 때를 대비해 사제가 준비해야 하는 비용이다.”
“그 비용을 치유사 개인에게 청구합니까?”
“소생은 원정대 전체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공동 비용으로 정산한다.”
“그럼 원정대 운영비로 처리하는 게 정상 아닐까요?”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권이 없다는 답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다. 담당자는 종종 자신이 승인한 규정에 묶여 있다. 이상한 건 그렇게 묶인 규정이 누구를 위해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 경우였다.
“메이 씨가 비용에 동의했다는 기록이 있나요?”
“최초 계약서에 있다.”
“항목과 계산 기준도요?”
“공동 비용이라고 적혀 있다.”
“공동 비용이면 산정표가 있어야 하잖아요.”
세드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수현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걸 요청할게요. 금액이 맞는지 보고 싶습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나요?”
“모르겠다.”
“그렇다면 접수일과 담당자부터 적어 주세요.”
세드나는 수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종이를 꺼냈다.
“너는 정말 이상한 여자군.”
“많이 들었습니다.”
“다들 계약을 보면 무서워하거나 그냥 도망가는데.”
“저는 계약서가 무서워서 도망가면 나중에 더 큰 돈이 나간다는 걸 알아서요.”
메이가 옆에서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세드나의 굳은 입가도 아주 조금 움직였다.
***
돌아가는 길에 수현은 벽에 붙은 오래된 공고를 발견했다.
[전사자 소생 지원 신청 안내]
그 아래에는 길드에서 수여한 영웅 훈장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광고였다. 살아 돌아오면 새로운 삶을 준다니. 글씨만 읽으면 기적을 선물하는 기관 같았다.
그런데 맨 아래에 작은 문장이 있었다.
[소생 뒤 의무 복무 기간은 신규 적용됨.]
수현은 공고를 손끝으로 눌렀다.
“메이 씨, 아까 세 사람이 원정대에서 줄었다고 했죠?”
“네.”
“모두 죽은 거예요?”
메이가 머뭇거렸다.
“한 명은 전사했어요. 한 명은 부상 때문에 이송됐고요. 마지막 한 명은…….”
“마지막은요?”
“길드가 데려갔어요.”
“왜요?”
“모르겠어요. 그냥 서류에 서명하고 떠났어요.”
수현은 더 묻고 싶었지만 메이의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고 그만뒀다. 메이도 알고 있는 것과 두려워서 말하지 못한 것을 구분하기 힘들어 보였다.
“혹시 그 사람 이름을 기억하세요?”
“라비엔이요. 방패를 쓰던 기사였어요.”
“라비엔.”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했어요. '계약서는 꼭 끝까지 읽어.'”
수현은 그 이름을 휴대폰 메모장에 입력했다. 배터리가 아까워 화면을 곧바로 껐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기록한 실종자의 이름이었다.
계약관리실로 다시 들어가기 전 수현은 메이에게 작은 부탁을 했다.
“라비엔 씨 말인데요. 어떤 사람이었어요?”
“왜요?”
“기록만 보니까 사람이 잘 안 그려져서요.”
메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말수가 적었어요. 겁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죠. 전투가 끝나면 꼭 한참 동안 방패를 닦았거든요.”
“그건 왜요?”
“처음엔 저도 몰랐는데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방패에 흠집이 나 있으면 다음엔 어느 쪽을 막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고.”
수현은 그 대답이 마음에 남았다. 말수가 적다고 겁이 많은 것도 아니고, 겁이 많다고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전장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랐다.
“라비엔 씨도 처음엔 기록을 잘 남겼나 봐요.”
“네. 우리가 뭘 먹고 뭘 썼는지 적는 걸 좋아했어요. 다들 귀찮아했지만요.”
“그러다 특별 전출됐다고요?”
“그날 새벽에 길드에서 사람이 왔어요. 라비엔이 먼저 따라나갔고, 나중에 방패만 돌아왔죠.”
“방패만?”
“네. 계약이 종료됐다고 했어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어디로 갔는지 안 알려 줬어요.”
수현은 잠시 발을 멈췄다.
“라비엔 씨 가족은요?”
메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야기는 안 했어요. 길드에 오기 전부터 혼자 살았다고만.”
수현은 수첩에 적었다.
[라비엔: 기록 담당. 방패만 반환. 본인 소재 확인되지 않음.]
그녀는 더 이상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웠다. 그 이유를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덧붙여 소문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
계약관리실 입구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수현은 그들을 지나치려다가 어린 병사 하나가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는 걸 봤다.
“이거 반려됐대요.”
병사가 옆 사람에게 투덜거렸다.
“뭔데?”
“부상 확인 신청서. 치료받은 날을 적었는데 출정 기록이랑 안 맞는다고.”
“너 그날 야간 경계도 섰잖아.”
“그러니까. 근데 경계는 근무로 안 친대.”
수현은 발을 멈췄다.
서류에는 작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기록 불일치. 사실관계 재확인 요망.]
놀랍게도 길드는 기록이 틀리면 신청을 반려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그 기록을 누가 만들었는지, 틀렸을 때 어떻게 고치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기요.”
수현이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그날 같이 경계 섰던 분이 계세요?”
“네? 같이 선 사람은 있죠.”
“그럼 그분한테 날짜랑 시간을 확인받아 보세요. 그리고 왜 출정 기록엔 빠졌는지도 물어보고요.”
병사는 수현을 이상한 눈으로 봤다.
“그렇게 해도 됩니까?”
“신청서에는 사실을 적으라고 돼 있잖아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면 해 보는 거죠.”
병사는 종이를 다시 펼쳤다.
“감사합니다, 누님.”
“누, 누님?”
수현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동갑인지 몇 살 어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누님 소리를 들으니 이상했다. 이세계에서도 나이는 피해 갈 수 없나 보다.
세드나가 안쪽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넌 원래 어디서든 그렇게 남의 일에 끼어드나?”
“직업병입니다.”
“그럼 치료는 어렵겠군.”
“아마 평생이요.”
***
야영지에 돌아왔을 때 카이렌은 이미 깨어 있었다.
눈가에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처음보다 얼굴빛은 나았다. 그는 메이를 보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늦게 일어나서 미안해.”
“사과하지 마.”
메이가 딱 잘라 말했다.
“네가 자는 동안 진짜 중요한 일 하고 왔으니까.”
카이렌이 수현을 바라봤다.
“제 계약이요?”
“네. 그리고 메이 씨 치료비요. 두 분 모두 생각보다 사정이 복잡하네요.”
“전……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수현은 그의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있죠. 아주 중요한 거요.”
카이렌이 자세를 바로 했다.
“무슨 임무입니까?”
“기억나는 대로 사실을 이야기해 주세요. 지난 일주일 동안 언제 잤고, 언제 싸웠고, 언제 다쳤는지요.”
“그게 임무입니까?”
“네. 그리고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괜찮다고 하실 때마다 메이 씨가 아주 무섭게 쳐다보니까.”
메이가 두 손을 허리에 올렸다.
“지금도 보고 있어.”
카이렌이 겸연쩍게 웃었다.
수현은 그 미소를 보며 조금 숨을 돌렸다.
그동안은 계약서가 주인공 같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종이가 아니라 종이 때문에 삶이 바뀐 사람들이었다.
카이렌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흘 전, 북쪽 숲에서 열세 시간 전투를 벌였다는 이야기.
그다음 날 밤에는 동료의 빈자리를 대신해 경계근무를 섰다는 이야기.
그다음 새벽에는 무릎이 풀려 넘어졌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수현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적었다.
그러다 카이렌이 문득 말했다.
“저, 사실 하나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뭐가요?”
“지난달에 사흘 정도요.”
“왜요?”
카이렌이 천천히 오른쪽 손등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하얀 실선 같은 흉터가 둥글게 남아 있었다.
“그때 저는 분명히…….”
입술이 움직이다 멈췄다.
메이의 얼굴이 굳었다.
카이렌이 겨우 말을 이었다.
“정신을 잃었거든요. 그런데 길드 기록에는 제가 그 사흘 동안 계속 출정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수현은 펜을 내려놓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근무 기록이 사라지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사람의 근무 기록이 새로 생기는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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