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렌이 잠든 지 정확히 열일곱 분째였다.
이수현은 그의 침대 옆에서 조용히 의자를 끌어당겼다. 잠을 좀 자라고 해 놓고 옆에서 종이를 바스락거리는 것도 민폐일 것 같아, 계약서는 무릎 위에 얹어 두었다.
천막 바깥에선 갑옷 부딪히는 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두 시간 출정이 미뤄졌을 뿐인데 야영지 전체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잔뜩 분주한 야전 본부였다. 사정을 알고 보는 수현의 눈에는 조금 달랐다.
쉬는 시간에 쉬지 못하는 사람들.
한국에서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점심시간에 회의를 잡아 놓고 도시락은 알아서 먹으라는 팀장들. 휴가를 승인해 놓고 급한 메신저에는 답해 달라는 관리자들. 그런데 여기선 메신저 대신 전령병이 뛰어다녔다.
그나마 알림을 꺼 버릴 수는 있을 줄 알았는데.
“카이렌 님! 길드 본부에서 새로운 지시가 왔습니다!”
전령이 천막 입구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수현이 먼저 일어났다.
“쉬는 중입니다.”
“급한 명령입니다.”
“목숨이 달린 일인가요?”
“북쪽 수로에서 마물 흔적이 발견돼서…….”
“발견됐다는 건가요, 지금 쳐들어온다는 건가요?”
전령의 입이 벌어졌다.
“그건 아직…….”
“그럼 전달은 제가 받겠습니다. 깨우지 마세요.”
“하지만 용사님 서명을 받아야 합니다.”
“용사님은 지금 잠든 상태라 서명할 능력이 없어요. 수면 중 서명까지 가능하다고 계약서에 적혀 있나요?”
전령이 눈을 깜박였다.
이 세계 사람들은 이상하게 계약서라는 말을 들으면 몸부터 굳었다. 신성한 서약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자세히 읽어 본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든 그런 문서는 사람들에게 무적의 방패로 취급된다. 내용을 묻기 전까지만.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전령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메이가 약초를 찧던 손을 멈췄다.
“저분, 저렇게 순순히 돌아가는 사람 아닌데.”
“그래요?”
“그냥 깨워서 서명받고 가거든요.”
“그럼 오늘은 새로운 경험을 하셨네요.”
수현은 억지로 웃었다. 사실 속으로는 조금 떨렸다. 몸에 칼을 찬 사람을 말로 돌려보내는 건 현실에서도 충분히 위험한 일이었다. 더구나 여기선 경찰에 신고할 전화도 없었다.
수현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은 있었다. 화면은 켜졌다. 신호는 없었다.
[통신망 없음]
아, 반갑다. 대한민국 통신사 로고가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남은 배터리 38퍼센트. 충전기도 없고 콘센트도 없는 세상이었다.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알람보다 손전등으로 쓰는 편이 나을 듯했다.
“메이 씨, 아까 말씀하신 진정서요.”
“네?”
“정확히 어떻게 보내셨어요?”
메이가 작은 약병을 내려놓았다.
“그게…… 길드 게시판에 있던 오래된 민원 봉투였어요.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도 진실을 보낼 수 있다’고 쓰여 있었죠.”
“우편요금은요?”
“그런 건 없었는데요.”
수현은 이마를 짚었다.
공짜 우편이 차원을 뚫는 시대라니. 우편사업을 시작하면 돈을 긁어모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 봉투, 어디에 있어요?”
“비어 있는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더니 없어졌어요. 그러고 나서 수현 씨가 나타났고요.”
수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왜 그런 봉투를 만들었는지, 그게 왜 자기 사무실에 도착했는지는 나중에 알아볼 일이었다. 지금은 여기서 한 사람이라도 덜 다치게 만드는 게 급했다.
“먼저 치료비부터 확인해 봅시다.”
그녀가 계약서 마지막 장을 펼쳤다.
[소생 비용은 본인 부담. 해당 비용은 향후 지급되는 급여 및 포상금에서 우선 공제한다.]
저 문장만 보면 소생을 대단한 복지 혜택처럼 느끼게 만든다. 실제론 사용한 사람에게 고지서가 날아오는 상품이었다. 그것도 죽었다 돌아온 사람에게.
“소생술은 흔한가요?”
메이가 고개를 저었다.
“흔하지 않아요. 성역에 있는 사제들이 아주 큰 마석을 써야 하거든요.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럼 누구든 죽으면 다시 살려 주는 건 아니군요.”
“네. 길드가 허락하고, 사제가 가능하다고 판단해야 해요.”
수현은 계약서의 조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근데 비용은 본인이 부담하고요?”
“그렇게 적혀 있네요.”
“살려 달라고 신청하지 못한 사람도 비용을 내야 한다는 거네요.”
메이가 잠깐 말을 잃었다. 죽은 사람이 신청서를 쓸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계약서를 만들었던 사람은 그 당연한 사실을 불편해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소생된 사람이 있나요?”
“봤어요. 딱 한 번.”
“누군데요?”
메이는 대답 대신 카이렌을 살폈다.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고열에 시달리던 얼굴이 이제야 어린 청년처럼 보였다.
“이전 원정대원이요. 우리 쪽 사람은 아니었고, 서쪽 길드의 기사였어요. 일주일 뒤 다시 전장으로 갔죠.”
“멀쩡했어요?”
“몸은요.”
그 한마디가 수현의 귀에 걸렸다.
“몸은?”
“눈을 뜨고도 한참 동안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어요. 나중엔 떠올렸지만, 웃는 모습이 전과 달랐어요.”
수현은 거기서 질문을 멈췄다. 처음 보는 세계에서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계약을 논하면서까지 성급하게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확인할 항목이 하나 더 생겼다.
[소생 이후 후유증: 확인 필요.]
수현은 잠깐 천막으로 돌아와 바닥에 종이 두 장을 펼쳤다. 하나는 메이가 가져온 계약서, 다른 하나는 방금 보급창고에서 받아 적은 지급 내역이었다.
“뭐 하세요?”
메이가 물었다.
“같은 날에 발생한 일을 같은 줄에 놓는 중이에요.”
“그게 도움이 돼요?”
“종종요. 사람들은 말을 기억할 때 자기한테 유리한 부분만 골라서 기억하거든요. 근데 날짜는 마음대로 골라서 바꿀 수 없잖아요.”
메이는 가까이 앉아 수현이 만든 표를 들여다봤다.
수현은 천막 안에 놓인 물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곳 하루는 스물네 시간쯤 되는 듯했다. 정확한 분 단위까지는 맞출 방법이 없었지만 대강의 순서는 알 수 있었다.
“어제 저녁엔 물약이 없었고, 오늘 새벽에는 메이 씨 이름으로 물약이 지급됐다고 쓰여 있어요. 그런데 메이 씨는 계속 카이렌 씨 옆에 있었죠.”
“네. 다친 대원도 둘 있었고요.”
“그 사실을 본 사람은요?”
“카이렌은 정신이 없었으니까…… 젠이랑 데런이 있었어요.”
“좋아요. 그분들한테도 확인해 봐요.”
“저를 안 믿으세요?”
메이가 입술을 내밀었다.
수현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반대예요. 메이 씨 말을 믿으니까 그 말을 지킬 자료가 필요한 거예요.”
메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길드에서는 안 그래요?”
“길드는 늘 '믿을 만한 용사는 변명하지 않는다'고 해요.”
수현은 펜을 놓았다.
그 말이 참 불편했다. 변명하지 않는 사람만 믿을 만하다고 하면, 억울한 사람은 억울함을 증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말을 안 하면 성실하고 말을 하면 문제 직원이 되는 오래된 방식이었다.
“사실을 말하는 건 변명이 아니에요.”
메이는 한동안 종이를 내려다봤다. 이윽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카이렌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안 깨웠는데요.”
수현이 말했다.
“저도 모르게 깼습니다.”
“그럼 물부터 드세요.”
메이가 컵을 건넸다.
카이렌은 목을 축인 뒤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 제가 서명한 게 잘못된 건가요?”
“모르죠. 아직 계약 내용을 다 확인하지 못했으니까요.”
“다들 서명하길래 저도 한 겁니다.”
“그럴 수 있어요.”
“그때는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현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이 속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그 생각까지 잘못된 건 아니에요.”
“…….”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은 카이렌 씨 거잖아요. 계약서를 이상하게 만든 사람한테 그 마음까지 뺏길 필요는 없죠.”
카이렌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그럼 조금만 더 자겠습니다.”
“네. 그게 오늘 제일 중요한 업무입니다.”
메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수현도 웃었다.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나았다.
***
길드의 보급 사무소는 천막 세 개를 이은 창고였다.
수현은 메이와 함께 그 앞에 섰다. 문 대신 걸린 두꺼운 천에는 ‘물품 수령은 일몰 전까지’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일몰 전이면 지금은 가능한 거죠?”
“가능해야 하는데…….”
메이가 말을 흐렸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창고 안에는 통조림도, 붕대도, 회복 물약도 거의 없었다. 선반마다 빈 상자가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배 나온 중년 남자가 계산대를 붙들고 있었다.
“제7원정대? 오늘 물건은 다 받아 갔잖아.”
“받았다고요?”
메이가 놀라 되물었다.
“네가 서명했잖아.”
중년 남자가 장부를 턱 내밀었다.
수현은 그 장부부터 받아 들었다. 보급품 내역은 깔끔했다.
붕대 열 꾸러미, 지혈 약초 스무 묶음, 마력 회복 물약 다섯 병.
인수 확인란에는 ‘메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 글씨 아니에요.”
메이가 즉시 말했다.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명할 때 직접 확인하셨어요?”
중년 남자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오는데 그걸 하나하나 어떻게 기억해?”
“그럼 수령한 사람은요?”
“갑옷 입은 사람이 가져갔지.”
“누구요?”
“갑옷 입은 사람이라니까.”
수현은 창고 입구에 걸린 갑옷들을 떠올렸다. 이 부대에서 갑옷 입은 사람을 찾으라면 식당에서 숟가락 든 사람을 찾는 것과 비슷했다.
“물품을 어떤 사람에게 줬는지 기억은 못 하지만 이름만 있으면 지급 처리된다는 말씀이군요.”
“규정이 그렇다니까.”
“규정 보여 주세요.”
“아가씨,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자꾸…….”
“모르니까 묻는 겁니다.”
수현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그리고 메이 씨는 지금 이 물건이 없어서 부상자를 치료하지 못하고 있어요. 누가 받아 갔는지도 모르는 물품 때문에 환자가 방치되는 게 규정이라면, 그 규정을 적은 사람 얼굴은 한번 보고 싶네요.”
창고지기가 수현을 빤히 봤다.
“넌 누구야?”
“이수현이요.”
“그 이름 말고.”
“일한 대가와 안전 문제를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아…….”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감사관이야?”
수현은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감사관이라고 거짓말하면 당장은 통할지 몰라도 나중에 문제가 더 커진다. 자격도 없는 사람이 권한을 사칭하는 건 본인 전문분야에서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아뇨. 현장에 초청된 외부 상담인입니다.”
“그런 직책이 어디 있어?”
“저도 방금 생긴 것 같습니다.”
메이가 옆에서 웃음을 참았다.
창고지기는 한숨을 쉬더니 뒤편의 낡은 서랍을 열었다.
“그럼 정말 확인하고 싶으면 지급 확인 종이부터 가져가 봐.”
얇은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물품 지급 날짜와 수령 번호가 적혀 있었다.
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붕대와 물약이 지급됐다는 시간은 오늘 새벽이었다. 그런데 메이는 그때 카이렌을 치료하고 있었다. 세 번이나 치유술을 썼다고 했다. 적어도 혼자 보급창고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메이 씨, 새벽 세 시에는 어디 계셨어요?”
“카이렌 옆에 있었죠. 왜요?”
“여기엔 새벽 세 시에 물품을 받아 갔다고 적혀 있네요.”
창고지기가 팔짱을 꼈다.
“그럼 누가 이름을 도용했나 보지.”
“그래서 확인하자는 거잖아요.”
수현은 빈 병 상자를 들어 올렸다. 바닥에 은색 실로 묶인 작은 표식이 붙어 있었다.
[왕실 보급품. 재판매 금지.]
“이런 표식은 물품마다 붙어 있나요?”
“당연하지. 왕실 돈으로 산 거니까.”
수현은 지급 번호를 베껴 적었다. 그리고 종이를 돌려줬다.
“원본은 여기 두세요. 제가 확인한 것만 적어 갑니다.”
“왜?”
“나중에 누가 바꿨다고 할까 봐요.”
“누가 장부를 바꿔!”
“그러니까 더 좋죠. 안 바꾸시면 되잖아요.”
창고지기가 대꾸할 말을 찾는 동안 수현은 문을 나섰다.
***
카이렌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천막 입구에 도착한 수현은 무심코 걸음을 늦췄다. 낮잠이라고 하기엔 숨소리가 너무 깊었다. 쉬라고 명령해야 겨우 눕는 사람에게 한 시간은 아마 한 달치 휴가만큼 소중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메이의 팔에 차고 있던 작은 금속 고리가 붉게 빛났다.
“어?”
메이가 손목을 움켜쥐었다.
금속 위에 글씨가 나타났다.
[치유 비용 미정산. 현장 물품 지급 정지.]
“이게 무슨…….”
“아까 약품은 못 받았다면서요.”
“네. 근데 이전 치료비가 남아 있대요.”
“본인 돈으로 이미 물약을 샀다면서요.”
“그건 따로예요. 치유술에 쓴 마석 값도 계산해야 한다나 봐요.”
수현은 메이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금속 고리 안쪽에는 아주 작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계약에 따른 비용 통지를 수령하였음을 확인한다.]
“이거 벗길 수 있어요?”
“계약 기간에는 안 풀린대요.”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알림 장치가 아니네요.”
수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지급 장부는 멀쩡한데 실제 물건은 없고, 치료받아야 할 사람은 빚이 있다는 이유로 물품을 지급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 빚을 알려 주는 물건은 몸에서 떼지도 못한다.
여기가 얼마나 이상한 곳인지 알 것 같았다.
그때 천막 밖에서 누군가 차갑게 말했다.
“이수현이라는 여자가 여기 있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메이가 숨을 삼켰다. 수현이 입구로 돌아서자 회색 망토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가슴에는 저울 문장이 달려 있었다.
“왕립용사길드 계약관리실 소속, 세드나라고 한다.”
그녀가 얇은 문서를 펼쳤다.
“외부인이 제7원정대의 계약과 보급 장부를 열람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열람 권한을 증명해라.”
수현은 메이를 한 번 바라봤다.
두 시간의 휴식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써 서류 전쟁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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