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현이 노무사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두 가지였다.
“저 정말 그만두고 싶어요.”
그리고.
“그런데 그만두면 제가 맡은 일은 누가 하죠?”
희한하게도 두 번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첫 번째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며칠째 퇴근을 못 한 개발자, 주말마다 호출되는 시설관리 직원, 아픈데 대신 근무할 사람이 없다는 간호사.
수현은 그럴 때마다 묻곤 했다.
“그 일, 안 하면 세상이 멸망합니까?”
대답은 대개 ‘그 정도는 아니죠’였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진짜로 세상이 멸망한다는 사람이 상담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
그날 오후 여덟 시, 서울의 작은 노무사 사무실.
수현은 퇴근 직전이었다. 책상 위에는 의뢰인이 보내온 근로계약서 열두 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중 열한 장에는 ‘기타 회사가 지정하는 업무’라는 무서운 문장이 들어 있었다.
회사들이 왜 그 말을 그토록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일을 시키고 싶으면 직원이 아니라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를 채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수현 노무사님.”
같이 일하는 사무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일 상담 하나 더 잡혔어요.”
“내일요? 오전 열 시는 비워 달라고 했는데요.”
“열 시 아니고 여덟 시요.”
“오전 여덟 시?”
“네. 아주 급한 사안이래요.”
수현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급한 일이란 말도 참 편리했다. 의뢰인에게 급하면 상담하는 사람의 잠은 급하지 않게 되는 모양이었다.
“무슨 사건인데요?”
“서류가 좀 이상해서요. 이메일로 안 보내고 등기로만 접수하겠다고 했대요.”
“요즘 세상에 등기요?”
“그러게요. 발신인이…… 왕립용사길드 제7원정대?”
수현은 피식 웃었다.
“새로 나온 게임 회사인가 봐요.”
사무장은 커다란 갈색 봉투를 건넸다.
우표는 없었다. 대신 밀랍처럼 보이는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봉투 표면에는 기묘한 문양이 돌고 있었는데, 빛이 비칠 때마다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요즘 인쇄 기술 좋네.
수현은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낡은 종이 세 장과 짧은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신청인: 카이렌, 용사]
[사용자: 왕립용사길드]
[진정 요지: 약정 휴식 미보장, 전투 수당 미지급, 치료비 본인 부담]
여기까지 읽었을 때만 해도 수현은 몰입형 방탈출 업체가 일을 크게 벌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줄에서 손이 멈췄다.
[신청인 현재 상태: 생존. 다만 다음 원정 후 생존 여부 불확실.]
글씨가 번져 있었다. 잉크가 아니라 피처럼 보였다.
“취향 한번 살벌하네.”
수현은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사제의 서명인지 뭔지 모를 기호가 빼곡했다.
그 순간 편지 아래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스마트폰 알림이 종이 아래에 비친 줄 알았다.
하지만 휴대폰은 충전기에 꽂혀 있었다.
“응?”
붉은 인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수현이 손을 떼기도 전에 문장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근로조건 분쟁에 대한 외부 전문가의 의견이 접수되었습니다.]
“뭐야?”
[현장 확인 절차를 개시합니다.]
“잠깐, 누가 의견을 접수했는데?”
[신청인의 안전을 위해 신속한 출석을 요청합니다.]
“아니, 요청은 당사자한테 물어보고 해야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 붉은 원이 번졌다.
서류가 회오리처럼 날아올랐다. 사무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수현은 가장 먼저 책상 위의 노트북을 붙잡았다. 업무용 노트북은 회사 소유이고, 회사 소유 재산은 잃어버리면 경위서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붙잡은 것은 노트북이 아니라 노트북에 연결된 충전선이었다.
“아악!”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건 사무장님의 얼굴이었다.
“노무사님! 어디 가세요?”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네요!”
그렇게 수현은 퇴근 대신 다른 세계로 출장을 가게 됐다.
출장비는 당연히 아직 받지 못했다.
***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돌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손바닥이 따끔했고, 귀에서는 종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멀리서 소리를 질렀다.
“치유사! 치유사 어디 있어!”
“이쪽으로 눕혀!”
“또 왔어! 이번에는 셋이야!”
수현이 고개를 들자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낡은 천막, 말뚝에 묶인 말, 소독약 비슷한 냄새. 그리고 천막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성벽.
사극 촬영장치고는 소품에 너무 돈을 쓴 것 같았다.
특히 부상자 한 명의 다리가 정말로 없다는 점에서.
“이거 진짜 피예요?”
수현이 얼빠진 목소리로 묻자, 지나가던 병사가 그녀를 힐끗 봤다.
“가짜 피라는 것도 있나?”
“있죠. 영화 촬영할 때 많이 쓰는데…….”
“영화가 뭐지?”
대화가 끊겼다.
아, 큰일 났다.
이거 정말 이상한 데 왔네.
“거기! 멀쩡한 사람!”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달려왔다.
은빛 머리를 땋아 올린 젊은 여자였다. 흰 예복 소매는 피와 약초즙으로 얼룩져 있었고, 눈 밑에는 시커먼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손이 남으면 붕대라도 감아 주세요!”
“저요?”
“네! 거기 멀쩡하게 서 계신 분!”
“아니, 저는 의료인이 아닌데…….”
“그럼 물이라도 길어 오세요!”
여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다른 천막으로 뛰어갔다.
수현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세계에 떨어진 사람에게 첫 번째로 주어진 업무가 물 긷기라니.
대단한 환영식이었다.
그래도 부상자들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수현은 우물 옆의 양동이를 잡았다. 그 순간에도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저 사람들은 누구고, 여기는 어디며, 자신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는가.
한 가지는 확실했다.
퇴근하려던 사람을 멋대로 데려와 일을 시키는 조직이라면 친절한 곳일 리가 없었다.
“물이요!”
양동이를 받아든 은발 여자가 짧게 외쳤다.
“고마워요! 이름이 뭐죠?”
“이수현이요.”
“메이예요. 왕립용사길드 제7원정대 치유사.”
수현의 얼굴이 굳었다.
제7원정대.
아까 봉투에서 읽었던 이름이다.
“혹시 카이렌이라는 분도 여기 있나요?”
메이가 물동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카이렌을 어떻게 알아요?”
“그분 이름으로 진정서가 들어왔거든요.”
“진정서?”
“아, 그러니까…… 일하다가 억울한 일이 생겼다고 신고한 서류요.”
메이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더니 수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서 그 얘기 하지 마세요.”
“왜요?”
“감독관 귀에 들어가면 또 일이 커져요.”
“감독관이면 오히려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요. 여기 감독관은 사람을 돕는 분이 아니에요.”
메이가 낮게 속삭였다.
“일정을 늦추는 사람이 있는지 감시하는 분이죠.”
수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세상에.
이쪽은 감독관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았다.
***
카이렌은 가장 안쪽 천막에 있었다.
용사라고 해서 빛나는 갑옷을 입고 성검을 들고 있을 줄 알았더니, 현실은 좀 달랐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졸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피 묻은 붕대가 감겨 있었고, 왼쪽 어깨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갑옷 한쪽은 깨졌고, 신발 밑창은 너덜너덜했다.
수현은 그 모습을 보고 가장 먼저 한마디를 했다.
“이분부터 재워야겠는데요?”
메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치료도 받아야 하고요.”
“치료는 제가 했어요. 세 번이나.”
“그런데 왜 이 상태죠?”
“상처가 아물면 다시 출정하니까요.”
카이렌이 눈을 떴다.
“메이, 무슨 일이야?”
“손님이 오셨어요.”
“길드에서?”
“아니요. 다른 세계에서요.”
그는 수현을 한참 바라봤다.
기대하던 구원자가 나타난 표정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제발 지금은 새로운 업무가 아니었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저한테 무슨 일을 시키려고 오셨습니까?”
수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람은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인사보다 일을 먼저 걱정하는구나.
“일 시키러 온 사람 아닙니다.”
“정말요?”
“네.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고 신고가 들어와서 왔어요.”
“신고요?”
메이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낸 거야.”
카이렌의 눈이 둥그레졌다.
“네가?”
“가만히 있으면 네가 죽을 것 같아서.”
“난 용사잖아. 죽으면 안 되지.”
“죽으면 안 되니까 쉬라는 거야!”
메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수현은 둘 사이를 번갈아 봤다.
싸움이라기보다 오랫동안 해 온 말다툼 같았다. 메이는 걱정하다 지쳤고, 카이렌은 미안해하다 지친 얼굴이었다.
“일단 확인부터 할게요.”
수현이 손바닥을 펼쳤다.
“최근 일곱 날 동안 하루에 몇 시간씩 일했습니까?”
카이렌은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이요?”
“네. 전투, 이동, 경계 근무, 작전 회의. 다 포함해서요.”
“그런 건 셈해 본 적 없는데요.”
“왜요?”
“마왕을 쓰러뜨릴 때까지 하는 거니까요.”
메이가 고개를 숙였다.
수현은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저런 대답은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회사가 어려워서, 고객사 일정이 급해서, 다른 동료에게 피해가 갈까 봐. 이유는 달라도 결과는 늘 같았다.
누군가의 시간을 아무도 세지 않는다.
“그럼 식사는 언제 하세요?”
“행군하면서 먹습니다.”
“잠은요?”
“교대할 사람이 있으면…….”
“있긴 합니까?”
“요즘은 없습니다.”
“휴일은?”
카이렌이 웃었다.
이렇게 순하게 웃는 사람이 저렇게 처참하게 일할 수도 있구나. 수현은 화가 났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나면 쉴 수 있을 겁니다.”
“그 마왕은 언제 쓰러뜨리는데요?”
“그건…….”
“모르죠?”
카이렌이 시선을 피했다.
메이가 옆에서 팔짱을 꼈다.
“봤죠? 맨날 이래요.”
수현은 천막 구석에서 마른 나무판을 발견했다. 앞면에는 출정 일정이 적혀 있었다.
제7원정대.
동쪽 협곡 정찰, 북쪽 산길 확보, 야간 경계, 서부 요새 지원.
날짜는 다 달랐지만 휴식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이거 누가 짰어요?”
“길드 본부요.”
“현장 사정은 확인하고 짜나요?”
“지도를 보시긴 할 겁니다.”
“그 지도에 사람이 그려져 있습니까?”
“……네?”
“사람이 쉬어야 한다는 표시가 있냐고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수현은 나무판을 내려놨다.
“계약서부터 봅시다.”
카이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계약서라면…… 용사의 서약 말씀입니까?”
“서약이든 계약이든 좋아요. 서로 무슨 약속을 했는지 적힌 종이요.”
메이가 천막 안쪽의 낡은 가방을 뒤졌다.
한참 만에 꺼낸 것은 금실로 테두리를 두른 양피지였다. 겉면에는 사자 모양 인장이 찍혀 있었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펼쳤다.
첫 줄부터 눈이 아팠다.
[선택받은 용사는 인류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봉헌한다.]
그 아래에는 의무 조항이 빼곡했다.
긴급 소집에 응할 의무.
왕국 명령에 복종할 의무.
작전 수행 중 이탈하지 않을 의무.
길드의 명예를 지킬 의무.
수현은 한 장을 넘겼다.
또 의무였다.
다음 장도 의무.
그다음 장도 의무.
이쯤 되니 계약서가 아니라 혼내는 글 모음집 같았다.
“근로조건이 적힌 부분은 어디 있습니까?”
카이렌이 메이를 봤다. 메이가 수현을 봤다.
“……모르겠는데요.”
“임금이나 수당이요.”
“용사는 국가에서 지원을 받아요.”
“얼마요?”
“필요한 만큼이요.”
“그러니까 얼마를 받았냐고요.”
“지난달에는 은화 스무 닢을 받았습니다.”
“몇 명이서 쓰는 돈인데요?”
“원정대 전체요. 여덟 명이었습니다.”
“지금은요?”
메이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다섯 명이요.”
수현은 더 묻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세 명이 줄었는지는 두 사람의 얼굴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그 돈으로 뭘 샀어요?”
“식량이랑 말먹이, 붕대랑 화살이요.”
“급여가 아니라 운영비네요.”
“그런가요?”
카이렌이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수현은 계약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카이렌 씨.”
“네.”
“지금까지 월급 받은 적 없죠?”
“……그게.”
“먹고 싸우는 데 필요한 돈 빼고, 본인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받은 적이 있냐고요.”
카이렌은 오래 생각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수현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쯤 되면 용사라기보다 나라에서 키우는 무급 전투 장비였다.
한때는 그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자부심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고, 사명감으로 부러진 뼈가 붙는 것도 아니다.
아, 붙긴 붙는구나.
옆에 치유사가 있으니까.
그게 더 끔찍했다.
낫게 해 주고 다시 내보내면 되는 거니까.
***
천막 밖에서 뿔나팔이 울렸다.
메이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설마 벌써?”
카이렌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정 신호야.”
“지금요?”
수현이 물었다.
“네. 북쪽 숲에 마물이 나타났대요.”
“그럼 다른 부대가 가야죠.”
“저희가 가장 가까워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가장 멀쩡한 사람이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카이렌은 대답 대신 갑옷 끈을 조였다.
손이 떨렸다. 매듭 하나를 묶는 데 세 번이나 실패했다.
메이가 이를 악물었다.
“카이렌, 너 지금도 열이 나.”
“괜찮아.”
“뭐가 괜찮아! 손끝이 파래졌잖아!”
“내가 안 가면 다른 사람이 다쳐.”
그 말을 듣자 수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 이 사람.
자기 몸을 아끼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칠까 봐 무서운 거구나.
이런 사람이 가장 쉽게 이용당한다. 거절하면 누군가 피해를 본다고 말하는 순간, 제 몫의 휴식까지 죄책감으로 바꿔 버리니까.
바깥에서 누군가 외쳤다.
“제7원정대! 출정 준비 완료 보고하라!”
카이렌이 검을 집었다.
수현이 그의 앞을 막았다.
“잠깐요.”
“비켜 주세요.”
“이 상태로 가면 쓰러집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왜요?”
“제가 용사니까요.”
수현은 그를 똑바로 봤다.
남의 목숨을 구하겠다는 말에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 말을 구실로 사람을 망가뜨리는 놈들에게는 화가 났다.
“좋아요. 그럼 같이 나가죠.”
“같이요?”
“명령한 사람 얼굴은 봐야겠어요.”
메이가 눈을 깜빡였다.
“싸울 줄 알아요?”
“못해요.”
“마법은요?”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데 왜요?”
수현이 양피지를 들어 보였다.
“말은 할 줄 아니까요.”
***
밖에는 투구를 쓴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견장이 번쩍였고, 허리춤의 칼집은 새것이었다. 흙탕물이 튄 원정대원들 사이에서 혼자만 지나치게 깨끗했다.
“카이렌! 왜 아직 준비가 안 됐나?”
“죄송합니다, 감독관님.”
“죄송하다는 말은 마물을 베고 나서 하게!”
남자가 손에 든 채찍을 허공에 휘둘렀다.
수현은 채찍보다 그의 입에서 나온 ‘감독관’이라는 말에 더 기분이 나빴다.
“잠깐 말씀 좀 나눌게요.”
“넌 누구지?”
“이수현입니다.”
“소속은?”
“공인노무사입니다.”
“그게 무슨 기사단이지?”
“기사단 아닙니다. 노동 관련 일을 합니다.”
“노동?”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싸울 줄도 모르는 민간인이 군무에 끼어들지 마라.”
“싸우라고 온 건 아니고요. 일하는 조건 좀 확인하려고요.”
“조건?”
“네. 출정 명령 내리시려면 최소한 부상 상태는 확인하셨어야죠.”
감독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용사의 몸은 신의 축복을 받았다!”
“그 축복에 연차휴가도 들어 있나요?”
주변 병사 몇 명이 푸흡 웃었다.
감독관은 이를 갈았다.
“감히 신성한 소명을 조롱해?”
“조롱이 아니라 질문인데요. 계약서에 휴식 기준이 없어서요.”
“용사에게 휴식이라니! 마물이 공격하는 동안 잠이나 자겠다는 건가!”
“아뇨. 지금 이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요.”
수현이 카이렌의 손을 가리켰다.
붕대 사이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카이렌은 손을 뒤로 숨겼다.
감독관이 얼굴을 찌푸렸다.
“메이! 치유술을 더 쓰면 될 것 아닌가!”
“마력이 바닥났습니다.”
“마력 회복 물약을 마셔!”
“남은 게 없습니다.”
“그럼 외상으로 받아!”
메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달 외상도 아직 못 갚았습니다.”
수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깐. 치료 물약을 개인 돈으로 사요?”
“물론이지!”
감독관이 으스댔다.
“국가가 이미 위대한 사명을 내려 주었는데 그 정도 헌신도 못 하나?”
아, 그래.
헌신.
참 좋은 단어다. 말하는 사람이 돈을 내지 않을 때 특히 그렇다.
수현은 웃지도 않은 채 손바닥을 내밀었다.
“명령서 보여 주세요.”
“뭐?”
“이번 출정 명령서요. 서명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겠습니다.”
“네가 뭔데?”
“계약 내용을 확인하러 온 사람이라니까요.”
“서류 따위로 전쟁을 하겠다는 거냐?”
감독관이 비웃었다.
“서류가 적을 베어 주나?”
“적은 못 베겠죠.”
수현은 그의 손에 든 출정 지시서를 가리켰다.
“대신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는 알려주겠네요.”
그 말에 감독관의 웃음이 뚝 끊겼다.
“……뭐라고?”
“치료도 못 받은 사람을 출정시켰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남겨야 하잖아요.”
말은 차분했지만 수현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여기 법이 한국 법과 같을 리 없었다. 노무사 자격증이 통하는 곳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기록을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기록하겠다는 말을 무서워한다.
감독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놈, 길드 본부에서 보냈나?”
“아닌데요.”
“왕실 감사실?”
“거기도 아닙니다.”
“그럼 대체 어디서 왔단 말이냐!”
“대한민국이요.”
감독관은 침묵했다.
수현도 침묵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는 잘 안 통하는 지명이었다.
그때였다.
감독관 허리춤의 작은 종이 울렸다.
띵.
그가 허겁지겁 금속판 하나를 꺼냈다. 판 위에 금빛 글자가 떠올랐다.
[제7원정대 출정 지연 12분. 사유 보고 요망.]
감독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카이렌을 노려봤다.
“좋아. 네놈들 때문에 보고서를 쓰게 됐군.”
수현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하.
저 사람도 누군가에게 찍히는 건 무섭구나.
“그럼 보고서에 이렇게 적으세요.”
수현이 또박또박 말했다.
“용사 카이렌, 고열과 출혈로 출정 불가. 치유사 메이, 마력 소진으로 치료 불가. 그런데도 출정을 강행하려 했다고요.”
“감히!”
“틀린 내용 있습니까?”
“…….”
“없으면 그렇게 적으시면 됩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감독관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제7원정대! 오늘 출정은 두 시간 연기한다!”
두 시간.
고작 두 시간이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병사 하나는 진짜로 울기까지 했다.
수현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겨우 두 시간 쉬는 게 저렇게 기쁠 일인가.
카이렌이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쉬어도 되는 겁니까?”
“쉬세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정말로요?”
“네. 그거 잘하는 거예요. 쉬는 것도요.”
카이렌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검을 내려놓았다.
툭.
검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
두 시간의 휴식이 결정되자 메이는 가장 먼저 카이렌을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수현을 천막 한쪽으로 불렀다.
“고마워요.”
“아직 고마워할 일은 아닌데요.”
“그래도 저 사람이 검을 내려놓은 건 오랜만이에요.”
메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수현은 천막 밖을 바라봤다. 병사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거나 짐을 정리했다. 연기된 두 시간을 어떻게든 쪼개 쓰려는 사람들 같았다.
“메이 씨는 괜찮아요?”
“저요?”
“아까 마력이 다 떨어졌다고 했잖아요.”
메이는 웃었다.
“조금 쉬면 다시 차요.”
“그럼 메이 씨도 쉬세요.”
“저는 부상자들이 있어서…….”
“그러면 다른 치유사는요?”
“없어요.”
“왜 없습니까?”
“지난번에 둘이 그만뒀거든요.”
“충원은요?”
“길드에서 곧 보내 준대요.”
“언제부터 곧인데요?”
메이가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여섯 달쯤 됐나?”
수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 여기는 사람을 뽑는다는 말도 번역이 필요하겠네.
어느새 천막 안에서는 카이렌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수현이 서류를 펼쳤다.
이번에는 용사의 서약 말고 그 뒤에 붙은 작은 부속 문서를 읽었다.
첫 장에는 식량 지원 기준이 적혀 있었다. 두 번째에는 말의 사육비. 세 번째에는 부상자 이송과 장비 손실 비용.
이상했다.
말먹이 값은 은화 한 닢까지 꼼꼼히 적혀 있었는데, 사람의 치료비는 단 한 줄이었다.
[치유 비용은 원정대 개인의 기여도에 따라 정산한다.]
“기여도?”
수현이 물었다.
메이가 눈을 돌렸다.
“마물을 얼마나 잡았는지에 따라 점수를 받는 거예요.”
“그 점수로 치료비를 내요?”
“네.”
“그럼 몸이 다쳐서 마물을 못 잡은 사람은요?”
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현은 양피지를 다시 봤다.
종이 가장자리에는 작은 글씨가 빼곡했다. 그냥 넘기기 쉽게, 눈도 아프게 쓰인 글씨였다.
수현은 천막 기둥 옆의 등불을 끌어와 문구를 읽었다.
[작전 중 발생한 부상 및 사망으로 인해 의무 수행이 중단될 경우, 해당 기간의 지원금은 지급하지 않는다.]
거기까지는 이상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 문장이었다.
[복귀한 자는 이전의 근무 경력을 주장할 수 없으며 신규 계약자로 간주한다.]
수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복귀?”
원정 중 다쳤다가 복귀하는 사람을 말하는 걸까?
그녀는 계약서 맨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본 조항에서 ‘복귀’란 치료, 소생 및 기타 신성한 방법에 따라 현장 업무가 가능한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포함한다.]
소생.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치료와 소생이 같은 줄에 나란히 쓰여 있었다.
“메이 씨.”
수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기서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습니까?”
메이는 얼굴을 굳혔다.
“그건 왜 물으세요?”
수현은 답 대신 마지막 문장을 가리켰다.
[소생에 필요한 비용은 본인 부담으로 하며, 해당 비용은 향후 지급될 급여 및 포상금에서 우선 공제한다.]
잠깐만.
죽으면 다시 살리고.
살려 준 비용은 빚으로 남기고.
그 빚을 갚으려고 다시 싸워야 한다고?
수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메이는 이미 눈을 피하고 있었다.
천막 안쪽에서 카이렌이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이번엔…… 꼭 살아 돌아올게.”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이번엔.'
수현은 계약서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두 시간 휴식을 얻어 낸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손에 쥔 것은 야근 수당이 빠진 계약서가 아니었다.
사람이 죽어도 끝나지 않는 계약서였다.
그리고 그 서류 맨 끝에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서명이 하나 찍혀 있었다.
[계약 승인권자: 벨튼 공작.]
— 1화 끝 —
제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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