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텔 수녀는 지하 보존실이 가장 조용할 때만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이수현은 그 말을 듣고 조금 걱정했다. 사람을 만나러 온 거지 비밀을 거래하러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밤에 만난다고 해서 비밀 이야기가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기록으로 남겨도 될까요?”
아스텔은 조용히 웃었다.
“기록해야 할 일은 기록하세요. 다만 다른 환자의 사생활은 가려 주세요.”
둘은 저녁 기도 시간이 끝난 뒤 빈 열람실에 앉았다. 세드나가 참관인으로 동석했고, 메이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야기라면 듣지 않겠다고 말한 뒤 밖에서 기다렸다.
“오래전 서리달, 눈이 많이 오던 밤에 응급 환자 둘이 이곳으로 왔습니다.”
아스텔이 말했다.
수현은 펜을 멈추지 않았다.
“직접 보셨나요?”
“네. 저는 그날 야간 기록 책임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시나요?”
“한 사람은 얼굴을 가렸고, 다른 한 사람은 치료 천막 안쪽에 누워 있었습니다. 누가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어요.”
“그럼 운송장에 적힌 환자 두 명과 일치할 가능성은 있군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시간이 운송장 시간과 같다는 확인이 필요하겠지요.”
수현은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추측을 사실로 만들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증인은 대개 사건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 가장 오래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
아스텔은 당시의 세부사항을 조금씩 떠올렸다. 응급 환자 하나는 침대에 묶인 보호 끈을 풀어 달라고 손짓했다. 다른 하나는 계속해서 어떤 이름을 찾았다.
“정확히 무슨 말을 했나요?”
수현이 물었다.
“‘명부가 틀렸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돌려보내지 마세요'라고도 했던 것 같아요.”
“두 문장을 같은 사람이 말했나요?”
“그것조차 확실치 않습니다.”
아스텔은 눈을 감았다.
“환자들이 약을 먹고 열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목소리가 서로 겹쳤죠. 그날 저는 열이 심한 환자의 몸을 닦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그럼 지금 기록에는 ‘그날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적어도 될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수현은 그 말을 그대로 기록했다. 이름은 쓰지 않았다. 환자의 생존이나 신원을 암시하는 문장도 쓰지 않았다.
“그때 같이 있던 분은요?”
“기록 담당자 한 분이 더 있었습니다. 다만 당시 외부 길드에서 파견된 사람이라 성역 명부에는 임시 식별자로 남았어요.”
“동행 기록관일 수 있겠군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한 사람의 기억과 종이 한 장이 교차하는 지점이 생겼다.
***
다음 날 수현은 밀로 필경사를 다시 만났다. 서리달 열다섯째 날 기록을 베낀 일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도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환자를 직접 보진 못했어요.”
“동행 기록관이라는 직책을 쓰셨나요?”
“저는 필경사였고, 길드에서 온 기록관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기록관이 남긴 서명이 있나요?”
“예전에는 서명뿐 아니라 직접 들고 온 보관함을 그려 놓기도 했습니다.”
밀로는 낡은 필기 연습장을 꺼냈다. 장부 옆에 그려진 작은 문양은 방패의 모양을 닮았지만 제7원정대의 공식 문장과는 달랐다.
“이건 뭔가요?”
“그 기록관의 개인 표식인 것 같습니다. 이름 대신 넣으라고 했거든요.”
수현의 가슴이 뛰었다. 라비엔은 방패 기사였고 기록도 담당했다. 그러나 방패 모양을 그렸다는 이유로 그가 기록관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 문양을 사용한 다른 사람도 있었나요?”
“모릅니다.”
밀로는 미안한 얼굴이 됐다. 수현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고 해 주시는 게 도움이 돼요. 알아야 할 질문이 생겼거든요.”
그는 웃으며 연습장을 덮었다.
***
동행자 문제를 조사하는 동안 원정대에서 또 쪽지가 도착했다.
[카이렌이 오늘 자신의 명의로 진료 기록 대조를 신청했습니다. 본인 확인표 첨부.]
수현은 쪽지를 읽고 미소를 지었다. 원정대 대표라는 이유로 누군가 대신 신청하지 않았다. 카이렌은 자기 몸에 대한 기록을 스스로 확인하겠다고 결정했다.
“이런 것도 바뀐 거겠죠?”
데런이 물었다.
“많이 바뀐 거죠.”
데런은 수현이 가져온 서류 뭉치를 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사흘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게 이것뿐입니까?”
“이것뿐이라니요.”
“라비엔이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모르잖아요.”
“그렇죠. 다만 이제 찾을 장소와 질문이 달라졌어요. 무작정 병실을 열어 보는 대신 기록관이 사용한 표식과 운송 날짜를 확인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데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사람을 찾는 데도 길을 잃지 않으려면 지도가 필요한 거군요.”
“맞아요. 그 지도에 사람의 이름이 함부로 적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요.”
***
그날 오후 아스텔이 오래된 구조 일지를 찾아냈다. 폭설이 심했던 날, 환자를 옮기던 마차가 성역 입구에서 멈췄고 여러 사람이 들것을 나른 기록이었다. 서명 칸 중 하나는 유독 진했다.
[운송 책임: 북문 경비대 부장 프레드.]
“이 사람을 찾을 수 있나요?”
수현이 물었다.
세드나가 기록을 훑었다.
“북문 경비대는 지금도 있어. 하지만 프레드가 아직 근무하는지는 확인해야 해.”
그들은 경비대에 공문을 보냈다. 답신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프레드는 이미 퇴직했으며 동쪽 작은 마을에서 정원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퇴직자면 기억이 더 흐릿할 수도 있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그래도 그날 눈이 많이 왔다면 기억할지도 몰라요.”
세드나는 임의로 찾아가겠다는 대신 정식 면담 동의를 요청했다. 수현은 그 점을 반겼다. 기록관을 찾겠다며 또 다른 사람의 조용한 삶을 마구 헤집을 수는 없었다.
***
프레드에게 가기 전, 수현은 기록의 빈자리를 정리한 종이를 오르카에게 보여 주었다. 서부 성역에 들어온 두 들것, 성역에 남은 한 명, 북쪽으로 이동한 한 명, 동행 기록관 한 명. 숫자만으로는 세 사람인지 네 사람인지조차 단정하기 어려웠다.
“들것에 탄 사람 둘과 기록관 한 사람이면 세 사람이잖아요.”
오르카가 말했다.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성역에 남은 사람이 운송 전부터 있던 환자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아스텔 수녀님이 직접 두 들것을 봤다고 하셨지만, 시간대와 목적지가 같은지 아직 확인이 안 됐어요.”
“수현 씨는 모든 말을 의심합니까?”
“아뇨. 사람을 믿으려고 구분하는 거예요.”
오르카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죠?”
“기억이 다른 사람을 바로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 둘 다 성실하게 말해도 기억이 다를 수 있잖아요.”
그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엔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게 다른 사람이었다고 밝혀질 수 있겠군요.”
“네. 그래서 확인하러 가는 거예요.”
***
아스텔은 회복실 관리 일지를 한 장 더 찾아냈다. 폭설이 내리던 날, 환자들은 번호 대신 이름으로 불렸다. 그런데 당시 서기관이 남긴 인계 양식에는 이름란이 통째로 공란이었다.
“응급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나요?”
수현이 물었다.
“있습니다. 신원을 모르는 사람이 실려 오면 먼저 살리고 나중에 기록하니까요.”
“나중에 이름을 확인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요?”
“회복실과 이송기관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기록실이 통합되는 시기였어요.”
세드나가 종이를 훑었다.
“길드 조직 개편 시기랑 겹치네.”
“그럼 당연히 불안정했을 수도 있겠네요.”
수현은 말했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이후 서류에는 확정된 것처럼 옮겨 적혔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녀는 일지의 마지막 열을 보았다. ‘보호자 연락’ 칸에 붉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이 점은 무슨 뜻이죠?”
아스텔은 손을 뻗다 멈췄다.
“당시엔 연락 시도 중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연락한 상대는요?”
“공개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수현은 수첩에 썼다. 보호자 연락을 시도한 흔적은 있으나 상대는 미확인. 짧은 표시 하나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
수현은 돌아서려다가 아스텔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했다.
“수녀님은 당시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아스텔은 놀란 얼굴이 됐다.
“왜 그걸 묻지요?”
“증언을 정리할 때 자신도 모르게 기대가 섞일 수 있어서요. 제 생각에도 자꾸 라비엔이라는 이름이 떠올라요.”
아스텔은 잠깐 침묵했다.
“저는 누군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것은 들것이었고, 들은 것은 흐릿한 목소리였습니다.”
“저도 그래요. 누가 살아 있다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이름을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가 바라는 것과 실제로 기억하는 것을 따로 적었다.
“희망을 포기하자는 건 아니에요.”
수현이 말했다.
“희망이 기록을 덮지 않게 하자는 거죠.”
아스텔의 눈가가 부드러워졌다.
“그 말은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말이군요.”
***
성역 정원 한쪽에서는 작은 추모 예배가 열리고 있었다. 여행길에 죽은 낯선 사람들을 기억하는 자리라고 했다. 오르카는 한동안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름도 없이 죽으면 누가 기억해 줄까요?”
그가 물었다.
수현은 성급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아예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면 안 되겠죠. 그래서 가명이나 번호라도 남기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그 번호가 영영 사람을 대신해 버리면 곤란하겠지만요.”
오르카는 방패를 끌어안았다.
“라비엔이 살아 있든 아니든, 그 사람 이름으로 남는 기록이 필요하겠습니다.”
“네. 그 기록을 남길 권한과 방법을 같이 찾아봅시다.”
나무 위에서 종이 울렸다. 수현은 동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은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지만 오르카가 해야 할 일을 하나 찾은 것 같았다.
프레드의 답신이 도착한 뒤 오르카는 마차의 짐칸에 앉아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수현이 다가가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 그날 절던 기록관이 라비엔이라면, 제가 옆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당시 전출 사실을 알고 계셨어요?”
“아니요. 제가 알았을 때는 이미 방패만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몰랐던 일을 두고 자신을 탓하실 필요는 없어요.”
오르카는 씁쓸하게 웃었다.
“머리로는 압니다. 그래도 마음은 그렇지 않군요.”
수현은 그의 옆에 앉았다.
“저도 돌아갈 길을 아직 모르는데 여기서 누군가를 찾겠다고 약속할 때마다 겁이 나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일과 못 할 일을 나누는 거예요.”
오르카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프레드 씨가 실제로 기억하는 걸 듣고, 그 말이 라비엔을 가리킨다는 증거가 있는지 확인하는 거죠.”
“그렇다면 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는 장갑을 끼고 일어섰다. 예전처럼 모든 답을 검으로 찾을 필요는 없었다.
***
저녁 면담을 수락한 프레드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눈 아래 깊은 주름이 있었고 손은 흙투성이였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말했다.
“내가 누군가를 숨겼다는 소문이라도 도는 겁니까?”
“그런 뜻으로 온 게 아닙니다.”
수현은 허리 숙여 인사했다.
“당시 운송 기록과 실제 현장 상황이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프레드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들것 두 개가 들어온 건 기억해요. 하나는 성역 안으로 들어갔고, 하나는 계속 북쪽으로 갔지.”
“누가 동행했나요?”
“기록관 하나. 방패를 등에 멨었어. 젊었고, 부상당한 듯 다리를 조금 절었지.”
오르카가 숨을 멈췄다. 수현은 그의 손짓을 보고 잠깐 기다렸다.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셨나요?”
“아니요. 다만 길드 표식이 있는 나무 상자를 들고 있었어.”
“북쪽으로 간 들것은 어디로 갔습니까?”
“검역 초소로. 전쟁터에서 옮겨 온 환자는 감염 여부를 확인해야 했으니까.”
“초소 이름은요?”
“그때는 북방 회복 전초소라고 불렀지.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을 거요.”
수현은 펜을 멈췄다. 드디어 길이 하나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길을 간 환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프레드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그 기록관은 자꾸 같은 말을 했어.”
“무슨 말이요?”
“사람을 보낸 뒤에는 이름도 같이 보내야 한다고.”
오르카는 고개를 숙였다. 수현은 지금 당장 라비엔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누구의 말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문장은 어딘가에서 오래 기다린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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