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의 정산 담당자는 돈을 다시 세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수현은 그런 표정을 한국에서도 숱하게 봤다. 월급 명세서를 가져와 수당 계산이 맞느냐고 물으면 처음에는 대체로 같은 반응이 나왔다. 이미 확인했습니다. 규정대로입니다. 시스템에 그렇게 나옵니다.
성역 정산실장 발데르도 정확히 그런 얼굴이었다.
“마석 선지급은 모두 합법적으로 처리됐습니다.”
“합법인지 판단해 달라고 온 게 아니에요.”
수현이 대답했다.
“누가 얼마를 부담해야 한다는 계산이 어떻게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발데르는 세드나의 공문을 읽었다. 그 옆에는 메이의 정산 이의 신청서와 임시 자문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당사자만 들어오시오.”
메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가 당사자입니다. 수현 씨는 제 동의로 함께 있어요.”
“그렇다 해도 장부 전부를 공개할 수는 없소.”
“장부 전부가 아니라 제게 청구된 금액의 산식과 근거 자료를 요청합니다.”
메이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수현은 그 변화가 꽤 마음에 들었다. 예전의 메이는 자기 돈 문제를 말할 때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했다.
발데르는 마지못해 두 장의 계산서를 내놓았다. 하나는 회복 관리국의 선지급 정산서, 다른 하나는 길드 계약 유지 사무소에서 보낸 청구 통지였다.
“둘이 같은 거래를 가리키네요.”
수현이 숫자를 비교하며 말했다.
“선지급액이 은화 여덟 닢이고, 개인 청구서에는 은화 여덟 닢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관리국 최종 원장에는 같은 금액이 아직 회수되지 않은 것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건 회계 처리 시점 차이입니다.”
“가능하죠. 그럼 정산 반영 날짜를 알려 주세요.”
발데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지?”
“두 번 받았는지 확인하려고요.”
“우리가 그런 일을 한다는 말인가?”
“그런 의혹이 생기지 않게 장부를 맞추자는 겁니다.”
***
정산실은 생각보다 복잡한 구조였다. 왕실 예산으로 먼저 마석을 공급하는 부서가 있었고, 실제 사용 후 비용을 확정하는 부서가 있었다. 사용자가 불명확하면 보관 비용이 임시 계정에 남았다가 계약 유지 사무소로 넘겨졌다. 그 과정에서 ‘이미 공급된 마석’과 ‘아직 회수하지 못한 돈’이 다른 장부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다.
“같은 돈이 두 번 적히는 건 오류가 아닐 수도 있어요.”
수현이 메이에게 설명했다.
“한쪽은 자산이고 다른 한쪽은 채권일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두 금액을 각각 사람한테 청구했느냐예요.”
“저는 두 번 내라고 받은 적 있어요.”
메이가 손목 고리와 종이 통지를 내밀었다.
수현은 날짜를 맞췄다. 고리에는 마석 원금에 대한 청구가 있었고, 종이 통지에는 원금과 별도 회복 관리비가 표시돼 있었다. 서로 완전히 같은 청구인지, 일부가 겹치는 청구인지는 아직 모호했다.
“이걸 보고 겹치는지 아닌지를 확정해 줄 자료가 뭔가요?”
발데르가 한동안 입을 다물더니 말했다.
“반환 확인표와 물자 출고 대장입니다.”
“그 자료를 확인할 수 있게 요청하겠습니다.”
“대장이 오래돼서 보존실에 있을 거요.”
“그럼 여기서 발급 가능한 확인서는요?”
발데르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세드나가 공식 접수서를 내밀자 접수 일자를 기입했다.
***
기다리는 동안 수현은 메이와 함께 복도에 앉아 있었다. 메이는 손목의 고리를 만지다가 중얼거렸다.
“가끔 제가 마법을 쓰는 게 잘못인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람을 살리려고 마석을 쓰면 빚이 늘어난다고 하잖아요. 다음에는 그만큼 망설이게 될 것 같아서요.”
수현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의료비 때문에 치료가 미뤄지는 상황을 어떤 말로 가볍게 위로할 수 있을까.
“메이 씨가 어떤 치료를 할지는 의료 판단이고,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는 별개의 문제예요. 물론 현실에서는 섞이겠지만… 최소한 치료에 대한 책임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제가 비용을 모르고 썼다면요?”
“그럼 앞으로는 정보가 필요하겠죠. 그렇다고 이미 다친 환자를 보고 판단한 게 곧 잘못이었다고 할 순 없잖아요.”
메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출정할 때 치료비를 먼저 계산할까 봐 무서워요.”
“그래서 이 문제를 확인하는 거예요. 돈 때문에 치료 판단이 바뀌지 않게 하려고.”
잠시 뒤 메이가 웃었다.
“수현 씨도 사람을 고치네요.”
“아뇨. 전 계약서를 고치고 싶어요.”
“그것도 사람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잖아요.”
수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자신에게 칼도 마법도 없었다. 그래도 서류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면, 그 서류를 바꾸는 일도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는 일일 수 있었다.
***
오후에 발데르가 가져온 출고 대장은 두 사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석은 두 개가 출고된 것으로 적혀 있었다. 첫 번째는 성역 응급 보존실, 두 번째는 특별 회복 관리국의 예비고였다.
“같은 마석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하지만 비용 청구에는 한 개분만 잡혀 있어요.”
메이가 답했다.
“그렇죠. 그래서 어떤 마석이 누구에게 쓰였는지 구분해야 해요.”
문제는 첫 번째 마석의 사용처가 ‘보호 대상 미확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마석에는 표식 검사 보조라는 설명이 붙었다. 메이에게 청구된 비용은 첫 번째 출고액과 일치했다.
세드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보호 대상이 미확정인데 왜 메이에게 청구가 갔지?”
“계약 유지 사무소가 중간에 채무자를 지정한 기록이 있겠죠. 있어야 하고요.”
수현은 발데르에게 질문했다.
“그 채무자 지정 원본을 누가 보관하나요?”
“통합 이전 사무소 문서라서….”
“그 부서는 없어졌다면서요?”
“폐지된 게 아니라 합병됐소. 남은 기록은 특별 회복 관리국으로 넘어갔을 거요.”
아스텔이 뒤늦게 들어와 대화를 들었다.
“그렇다면 이곳의 이전 목록을 확인하겠습니다. 이전하지 않은 사본이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발데르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그렇게 오래된 서류를 뒤져서 무슨 도움이 되겠소.”
“누군가 잘못된 비용을 계속 부담하는 걸 막을 수 있겠죠.”
수현의 대답은 짧았다.
***
다음 날로 예정된 고리 안전점검을 앞두고 메이가 긴장했다. 고리를 떼는 검사는 아니었다. 마력 흐름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는 단순 진단이었다. 그러나 수현은 검사 동의서에 기재된 ‘일시적인 열감 발생 가능’ 문구를 보고 멈췄다.
“설명을 들으셨어요?”
“금방 끝난다던데요.”
“얼마나 뜨거워질 수 있는지는요?”
“그건….”
검사 담당자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마력 변화가 심하면 즉시 중단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메이가 중단을 요청할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그제야 메이가 서명했다.
검사 결과 고리 자체에 급격한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기록 표식이 두 겹으로 새겨져 있었다.
“두 겹이라는 건 뭐죠?”
수현이 물었다.
“원계정과 수령자 계정이 서로 다른 시스템에서 등록됐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확정은 아니고요?”
“네. 장치 이력을 확인해야 합니다.”
메이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하나는 제가 동의한 거고, 다른 하나는 동의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수 있어요. 그래서 각각 등록일과 동의 근거를 보자는 겁니다.”
***
마석 대장을 다시 가져온 발데르는 복잡한 계산표를 종이에 그렸다. 같은 물건을 두고 정부 예산과 원정대 부담금이 따로 기록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선지급은 물자를 먼저 내보내는 기록이오. 실제 부과액은 나중에 정해집니다.”
“그렇다면 최종 부과액이 정해지기 전엔 특정 개인에게 청구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규정상 긴급 정산이 가능하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긴급 정산이 언제 끝나는지와, 잘못 청구됐을 때 정정하는 절차가 필요하겠네요.”
“왜 자꾸 정정부터 말하시오? 장부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거요?”
“틀렸다는 결론은 아직 없어요. 다만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제도인지 묻는 거예요.”
발데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낡은 규정집을 꺼냈다.
[긴급 정산은 임시적 조치이며, 본정산 후 차액을 환급하거나 추가 청구할 수 있다.]
“환급 조항이 있네요.”
수현이 말했다.
메이의 눈이 커졌다.
“그럼 제가 돌려받을 수도 있어요?”
“청구가 잘못됐고 실제 납부금이 있다면요. 우선 납부 내역을 확인해야 합니다.”
메이는 자기 지갑에서 접힌 영수증을 꺼냈다. 작은 약재비와 성역 고리 사용료가 각각 적혀 있었다. 금액은 크지 않았지만, 그가 야전에서 조금씩 아껴 낸 돈이었다.
“이것도 포함되나요?”
“성격이 서로 다른 비용일 수 있어요. 따로 확인하죠.”
발데르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영수증을 이런 데까지 들고 다녔소?”
“전에는 버렸는데, 이제는 남겨요.”
메이는 단호히 말했다.
“제가 낸 돈이니까요.”
수현은 그 짧은 대답에 웃었다.
***
오후에는 과거 회복 관리국에서 일했던 회계 서기가 찾아왔다. 아스텔이 이전 담당자 명부를 조회해 연락한 사람이었다. 이름은 하닌. 그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옛 문서라고 해서 전부 비밀은 아닙니다. 제가 책임졌던 범위만 말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당시의 계정 전환은 누가 승인했나요?”
수현이 묻자 하닌이 고개를 저었다.
“특정인을 지목할 순 없습니다. 부서장 결재와 자동 이관이 함께 있었거든요.”
“자동 이관이요?”
“대상자 신원 확인이 오래 지연되면 관리비가 다른 계정으로 넘어가는 규칙입니다. 새 부서로 합쳐질 때도 그 규칙을 그대로 옮겼죠.”
“그때 사람들이 개인 채무로 잡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하닌은 천천히 말했다.
“저는 채무자를 지정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장부에서 '이관 완료'라고 떠서 더 묻지 않았어요.”
수현은 기록에 그대로 적었다.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악의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각자가 자기 칸만 보는 구조 자체가 문제였을 수도 있었다.
“이관 이후 기록에 오류가 났다면 누가 수정해야 하죠?”
“인수한 부서에서 수정 신청을 받아야 합니다.”
“그 부서 이름이 지금도 같나요?”
“아닙니다. 계약 유지 사무소는 특별 회복 관리국 정산팀으로 합쳐졌어요.”
세드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수정 신청 주소가 바뀌었는데, 옛 계약에는 예전 주소가 남아 있는 건가?”
하닌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수현은 그 문제를 별도로 적었다. 사람들이 항의할 곳을 찾지 못하는 동안 빚이 커졌다면, 잘못은 단지 장부의 숫자에만 있는 것이 아닐 터였다.
***
조사를 마치고 나오자 수현은 세드나에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자료 확인 요청: 마석 고유번호, 사용처, 개인 청구 전환 근거, 안내문 발송 기록, 최종 이의 접수 부서.]
“항목이 다섯 개야.”
세드나가 말했다.
“처음에는 열두 개였어요. 중복되는 건 합쳤죠.”
“그래도 많군.”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메이 씨가 왜 비용을 내는지 설명하기 어렵잖아요.”
세드나는 문서를 접어 보관했다.
“네 방식이 귀찮기는 해. 하지만 이제는 그 귀찮음이 누군가의 부담을 줄이는 데 쓰인다는 걸 알겠어.”
“그거면 다행이죠.”
메이는 옆에서 손목을 가만히 감쌌다. 아까보다는 얼굴이 훨씬 편안해 보였다.
저녁 무렵 세드나가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다.
“관리국이 메이의 분쟁 금액 중 R-0에서 넘어온 부분에 대해 임시 강제 징수를 중단했어.”
“원금이 없어졌나요?”
메이가 다급히 물었다.
“아니. 심사가 끝날 때까지 강제로 걷지 않겠다는 뜻이야.”
수현은 메이의 손을 잡았다.
“이건 중요한 차이예요. 빚이 없다는 판단이 아니라, 빚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사람을 몰아붙이지 않겠다는 결정이에요.”
메이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쉬었다.
“그것만으로도 좋네요.”
“아직 최종 결정은 아니지만요.”
수현은 즉시 결정문 사본을 요청했다. 구두로만 들은 이야기는 다음 담당자가 바뀌면 사라질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아스텔이 작은 문서 번호를 건넸다.
[옛 계약 유지 사무소, 채무자 지정 변경 신청. 접수번호 C-47.]
“원본을 찾았습니다.”
“누가 변경을 신청했나요?”
“발신자 인장이 흐려져 있습니다. 대신 첨부된 기록의 제목은 읽혀요.”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임시 보호 대상 신원 불일치에 따른 비용 승계.]
수현은 종이를 내려다봤다.
누군가의 이름을 확정하지 못한 비용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는 구조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아직 기록 속에 숨어 있었다.
“내일은 금액보다 이 문장의 뜻을 먼저 물어야겠네요.”
세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가 사람을 대신하는 순간, 누가 책임지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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