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성역의 지하에는 바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수현은 첫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신이 긴장한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지하에서 들리는 소리는 발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서울의 법원 기록 보관실에 처음 들어가던 날과 비슷했다. 사람 하나의 인생이 낡은 서류철 몇 장으로 요약되는 장소에서는 발끝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아스텔은 작은 등불을 들고 앞장섰다.
“오늘은 비용 계산서에 연결된 번호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병력과 전출 사유는 열람 허가가 나지 않았어요.”
“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수현이 말했다.
세드나는 아스텔이 건넨 열람대장에 서명했다. 메이는 비용 신청인으로, 수현은 동행 자문인으로 각각 이름을 적었다. 오르카는 보호자로 온 것이 아니므로 기록실 문밖에서 기다렸다.
“동료인데 못 들어간다는 게 좀 서운하군요.”
“그만큼 다른 사람의 기록도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뜻이잖아요.”
수현의 대답에 오르카는 잠시 방패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실 내부에는 철제 선반 여섯 줄이 있었다. 그중 세 번째 선반에 ‘R’ 자가 찍힌 통이 놓여 있었다. 아스텔은 통을 꺼내기 전 봉인의 균열 여부를 살폈다.
“봉인이 멀쩡합니다. 참관인께서도 확인해 주세요.”
세드나가 이음새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눈으로만 확인했다. 자신이 모르는 마법 표식에 대해 멀쩡하다고 서명할 수는 없었다.
“저는 외형 손상 여부만 확인할 수 있어요.”
“그렇게 적겠습니다.”
아스텔이 뜻밖에도 미소를 지었다.
***
첫 번째 종이는 숫자로 가득했다. 마석 등급, 배송 수수료, 성역 관리비, 응급 보존료. 메이가 청구받은 금액과 똑같은 끝자리 숫자가 보였다.
“여기입니다.”
수현이 줄을 짚었다.
[계정 R-0. 회복 물자 선지급. 개인 정산 전환 가능.]
“전환 가능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쓰였죠?”
세드나가 물었다.
“어떤 경우에 개인 정산이 된다는 뜻인지 조건이 필요해요.”
수현은 장부 아래의 작은 문구를 읽었다.
[대상자가 확정되고 원계약 서명이 유효한 경우에 한함.]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메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제 고리에 뜬 비용은 대상자가 확정됐다는 전제로 계산된 거예요?”
“적어도 이 기록상 전제는 그래요.”
수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전산 절차를 거쳤는지는 아직 몰라요. 계정 전환 기록을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아스텔이 더 얇은 장부를 가져왔다. 같은 금액이 옮겨진 날짜가 기록돼 있었다. 주목할 점은 메이가 제7원정대에 배치되기 전의 날짜라는 것이었다.
“제가 오기 전인데요.”
메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렇다면 지금 청구가 시작된 이유를 먼저 물어야겠어요. 과거 비용을 승계하도록 합의한 문서가 있는지.”
세드나가 메이의 계약서를 펼쳤다. 이 문서에는 ‘기존 성역 회복 비용의 당사자 부담 가능성’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누가 부담하며 어떤 비용이 포함되는지는 별도 부속서에 따른다고 적혀 있었다.
“부속서는 받으셨어요?”
수현이 물었다.
메이는 고개를 저었다.
“서명할 때 네 장만 봤어요.”
“그때 부속서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부터 확인해야겠네요.”
사라진 종이는 숫자의 틈을 타 사람에게 붙는 법이었다. 수현은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메이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
***
점심 무렵 오르카가 기록실 밖에서 수현을 불렀다.
“방패를 수리한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합니다.”
성역 뒤편에는 무기 수리 공방이 있었다. 장인 토르반은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라비엔의 방패 사진 대신 오르카가 직접 가져온 방패를 보자 손을 멈췄다.
“이거 내가 고쳤지.”
“언제요?”
오르카가 물었다.
“지난겨울. 가장자리 안쪽에 금이 갔어.”
“누가 맡겼습니까?”
“여기 성역의 운송 담당자가.”
수현이 물었다.
“그 담당자의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토르반은 고개를 저었다.
“하루에도 열 개씩 들어와. 이름까진 몰라.”
“수리 전후 기록은 있나요?”
“장부라면 있지.”
그는 오래된 책을 꺼냈다. 오르카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흠집과 장부의 도면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수현은 공방 주인의 허락을 받아 도면과 날짜를 베껴 적었다.
“수리비는 누가 냈나요?”
“성역 회복 관리국. 왜?”
“지금 그 비용이 다른 사람의 개인 채무에 섞였는지 조사하고 있어서요.”
토르반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난 방패 하나 고쳐 줬을 뿐인데.”
“그렇죠. 장인님 책임을 묻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누구에게 청구됐는지 확인하는 거예요.”
그는 한동안 수현을 보다가 말했다.
“수리비 영수증은 가져가도 좋아. 원본은 두고.”
수현은 그 제안이 반가웠다. 말보다 날짜와 금액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러다 토르반이 덧붙였다.
“그런데 방패 주인이 직접 가지러 오진 않았어.”
오르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럼 라비엔은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그건 모르지. 난 방패만 봤으니까.”
토르반이 단호히 말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직한 문장이 다른 어떤 친절한 추측보다 도움이 되었다.
***
점심을 마친 뒤 수현은 방패의 안쪽 테두리를 가까이 살펴볼 수 있는지 오르카에게 물었다. 오르카는 두 손으로 방패를 세워 주었다. 그곳에는 칼날에 찍힌 자국, 줄에 긁힌 자국, 유난히 반듯하게 다듬어진 작은 홈이 있었다.
“라비엔은 원래 방패에 이름을 새기는 걸 싫어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름을 많이 새겼어요. 자기 이름은 안쪽에, 같이 전투한 사람 이름은 바깥 가장자리에요.”
“그럼 지금 남은 자국도 누군가의 이름일 수 있겠네요.”
오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홈은 제가 처음 합류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수리 뒤엔 글자가 사라졌어요.”
수현은 확대경을 빌려 홈의 모양을 보았다. 작은 금속 조각이 표면을 덮고 있었다. 토르반의 수리 기록에는 ‘안쪽 균열 보강’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름은 지운 것이 아니라 보강판 아래 가려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뜯어 볼까요?”
오르카가 물었다.
“아니요. 방패가 손상될 수 있어요. 장인님께 먼저 물어야죠.”
토르반은 흔쾌히 설명했다.
“덮인 부분은 갈라진 금속 때문에 보강한 거요. 손상이 적은 방법으로 확인하려면 망치질을 한 사람이 필요하겠지.”
“그분은 어디 있나요?”
“그때 내 제자가 맡았는데, 지금은 북쪽 마을에서 공방을 열었소.”
수현은 잠깐 숨을 멈췄다. 북쪽이라는 말이 자꾸 나왔다. 하지만 북쪽은 넓었다. 서류 한 장이 또 북쪽을 가리켰다고 모두 같은 사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제자의 이름과 공방 주소를 적었다.
“확인해야 할 게 하나 더 생겼네요.”
오르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린 하나를 찾을 때마다 둘을 더 찾게 되는군요.”
“그렇죠. 그래도 하나씩 근거가 생기니까요.”
***
밀로를 만나기 전 수현은 세드나에게 제안했다. 기록을 베껴 쓴 사람에게 기억만 묻기보다, 당시에 어떤 서식을 썼는지부터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다.
세드나가 옛 서식을 빌려 오자 수현은 펜을 움직였다. 이름을 직접 적는 칸, 마력 인장으로 대신하는 칸, 직접 확인할 수 없을 때 이유를 남기는 칸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실제 원정대 전출 문서에는 세 칸이 한 줄로 합쳐져 있었다.
“이 서류만 보면 사람이 서명했는지, 관리자가 대신 확인했는지 헷갈리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개정 전에는 분리돼 있었어. 업무를 줄이려고 서식을 단순화했지.”
“단순한 게 항상 좋은 건 아니군요.”
“그래. 누가 확인한 건지는 더 중요해졌는데 확인 칸은 줄었으니까.”
그들은 날짜가 다른 문서 세 개를 놓고 표시 위치를 대조했다. 결과는 일정하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서명 인장과 확인 불가 표시가 번갈아 찍혀 있었다.
“그럼 밀로 씨가 말한 붉은 인장이 당사자 동의의 대체 수단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겠어요.”
수현이 말했다.
“맞아. 대신 원본의 작성 책임자를 찾아야 해.”
“그럼 기록 담당자가 왜 필요했는지도 알 수 있겠죠.”
세드나는 수현을 보며 웃었다.
“처음에는 네가 문서를 너무 세세하게 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요?”
“여전히 세세해. 다만 그 덕에 우리가 누구를 함부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겠어.”
수현은 그 말을 작게 적어 두었다. 사건을 해결한 성과와는 달랐지만, 그만큼 지키고 싶은 태도였다.
오후에는 보존실 앞 대기실에서 낯선 남자가 그들을 찾아왔다. 회색 앞치마를 입은 성역 기록 필경사였다. 이름은 밀로. 그는 세드나의 추천서를 보고 왔다고 했다.
“예전에 특별 전출 기록을 베껴 쓴 적이 있습니다.”
수현은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기억하시는 것만 말씀해 주세요. 불확실한 건 그렇게 적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출 대상자의 이름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다만 서명란에 이상한 표시가 있었어요.”
“어떤 표시요?”
“손으로 직접 쓰는 서명 대신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어요. 그런데 인장 옆에 '현장 확인 불가'라는 작은 글씨가 있었습니다.”
메이가 놀라 물었다.
“그럼 당사자가 쓰지 않은 건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성역에선 의식이 없는 환자를 대신해 임시 보호 기록을 만들기도 해요. 전출 동의까지 그런 방식으로 할 수 있는지는 제 소관이 아니었습니다.”
수현은 그 말을 빠짐없이 적었다. 밀로는 라비엔이라는 이름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가 다룬 문서와 라비엔의 문서가 같은 것인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기록 날짜는 기억하세요?”
“서리달 열다섯째 날. 그날 큰눈이 왔죠.”
수현은 손을 멈췄다. 라비엔의 특별 전출 직후 날짜와 가까웠다.
“원본을 찾을 수 있을까요?”
“문서번호가 있어야 합니다. 제 기록실에는 그날 처리한 문서가 여럿이에요.”
수현은 메모를 닫았다.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는 사실보다 무엇을 아직 모르는지 훨씬 또렷해졌다.
***
수현은 면담 기록을 정리하며 밀로에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지금 하신 이야기를 서명해서 남겨 주실 수 있나요?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표시하고요.”
밀로는 잠깐 망설였다.
“나중에 제가 틀렸다고 밝혀지면 어떡합니까?”
“그럼 기록을 정정하면 돼요. 서명은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는 보증이 아니라 오늘 무엇을 기억했다고 말했는지 남기는 거니까요.”
그는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썼다. 수현은 증언지를 접기 전에 맨 아래 '추가 기억 또는 정정 시 별도 기록 가능'이라는 문장을 적었다. 밀로가 그 말을 읽고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
밤이 되자 오르카가 방패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홀로 앉아 있었다. 수현은 따뜻한 차 두 잔을 들고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라비엔은 내 선배였습니다. 저는 늘 그 사람 방패 뒤에 있었어요.”
“많이 의지하셨군요.”
“네. 그분이 사라지고 나서 내가 전방에 섰죠. 방패를 고칠 때도 그 사람이 어떻게 잡았는지 따라 했습니다.”
오르카는 손가락으로 작은 홈을 만졌다.
“저기에 원래 라비엔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어요. 수리하고 돌아왔을 땐 없어졌더군요.”
수현은 몸을 숙여 홈을 보았다. 새김이 깎인 흔적처럼 보였다. 하지만 수리 과정에서 우연히 지워졌을 수도 있었다.
“수리 전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있나요?”
“데런이 그림을 그렸어요. 오래된 보급 도면에.”
“그럼 돌아가서 비교해 보죠.”
오르카는 한참 방패를 바라보다 말했다.
“이름을 지우는 건 사람을 지우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저도 싫어요.”
수현이 답했다.
“다만 누가 왜 지웠는지는 알아야겠죠.”
그때 세드나가 대기실로 걸어왔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지하 보존실장이 부르셔.”
“무슨 일이죠?”
“R-0 장부와 함께 보관된 추가 운송장이 나왔어.”
아스텔은 빛 아래 종이를 펼쳤다. 운송장의 품목은 두 개였다.
[개인 기록철 한 권. 신원 확인 전까지 봉인.]
[방패 한 점. 원소유자 인도 불가.]
수현은 두 번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들었다.
“인도 불가라는 게 사망을 뜻하나요?”
“아니요.”
아스텔이 말했다.
“운송 시점에 소유자에게 직접 돌려줄 수 없었다는 뜻뿐입니다.”
수현은 오르카를 보았다. 아픈 진실보다 근거 없는 희망이 더 잔인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희망을 접을 근거도 아직 없었다.
아스텔은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전출 처리 방식: 본인 확인 미완료. 추가 열람은 신원 심사 후.]
그들이 찾으려는 것은 방패의 주인만이 아니었다.
누가 누구의 이름을 대신 쓸 권한을 가졌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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