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준비를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이수현은 문제의 본질을 깨달았다.
마차는 느린 것이 아니었다. 마차를 출발시키려면 허가서가 너무 많았다.
“동행자 명부, 통행증, 짐 목록, 위험 구간 사전 보고서, 성역 방문 목적서.”
수현이 손에 쥔 종이를 하나씩 읽었다.
“용사 길드에서 마물 잡으러 갈 때도 이렇게 하나요?”
데런이 고삐를 정리하며 웃었다.
“원래는 그냥 나갑니다.”
“그럼 위험한 일엔 서류가 없고, 서류 보러 가는 일엔 서류가 잔뜩 있네요.”
“맞습니다.”
놀랍도록 간단한 대답이었다. 수현은 서류철을 덮었다. 별도 이동비가 계약에 명시돼 있지 않았다면 이 모든 시간을 누가 일한 것으로 볼지 또 싸웠을 것이다.
이번 일행은 수현과 세드나, 데런, 오르카, 메이였다. 카이렌은 동행하고 싶어 했지만 메이가 장거리 이동을 권하지 않았다. 최근 고열과 피로에서 회복 중인 데다 손등의 흰 고리도 여전히 원인 불명이었다.
“용사가 안 가도 괜찮습니까?”
마차 옆에서 카이렌이 물었다.
“괜찮을지는 가 봐야 알죠. 하지만 무리한 동행이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제가 여기에 남아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는 안전한 통신 초소를 확보하고, 정기 출정 기록을 제출하며, 필요할 경우 자신의 계약서 사본을 성역에 보내기로 했다. 어딘가 섭섭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억지로 웃지는 않았다. 수현은 그쪽이 오히려 건강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혹시 위험하면 즉시 돌아오십시오.”
“카이렌 씨도요. 지원 요청이 오면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요.”
두 사람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젠이 옆에서 속삭였다.
“두 분은 서로의 상관 같아요.”
“상관 아니에요.”
수현이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 잘 들으세요. 자율적인 사람들이 약속한 거잖아요.”
젠은 눈을 굴리더니 웃었다.
***
첫날 길은 비교적 평탄했다. 들판을 지나 작은 시장이 나타났고, 종탑 그림자가 짧아졌을 무렵 첫 휴게소에 도착했다. 데런은 말을 먼저 쉬게 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수레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우리도 쉬는 거예요.”
수현이 말했다.
오르카가 어깨를 펴면서 하품했다.
“말이 쉬는데 사람이 앉아 있는 건 휴식 아닙니까?”
“허리를 펴고 물도 마셔야죠. 특히 오르카 씨 팔은 오래 고정하면 안 된다면서요.”
메이가 웃으며 약주머니를 꺼냈다.
“오늘은 환자가 말을 잘 듣네요.”
“제가 언제 안 들었습니까?”
“지난달부터 이번 달까지 열아홉 번요.”
“세어 두셨습니까?”
“치유사도 기록하거든요.”
수현은 차를 마시다 웃음을 터뜨렸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동료의 부상은 말없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부상자가 약을 잘 먹었는지 농담할 수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채무와 사라진 사람의 문제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사람이 조금 숨 쉴 여지를 찾는 데는 그런 순간들이 필요했다.
휴게소의 주인은 서부 성역에 간다는 말을 듣고 표정을 굳혔다.
“봉인 점검 기간에요? 길드 사람들은 다 급하네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수현이 물었다.
“작년에도 봉인을 새로 했는데 기록 몇 상자가 다른 곳으로 갔다더군요.”
“직접 보신 건가요?”
“아뇨, 운송꾼이 그랬어요.”
수현은 그 말을 수첩에 ‘소문’이라고 적었다. 휴게소 주인의 친절과 말의 정확성은 다른 문제였다.
세드나가 옆에서 속삭였다.
“들리는 얘기를 전부 기록하면 머리가 아프지 않나?”
“증거로 쓰려고 적는 게 아니에요. 나중에 사실인지 확인할 질문을 잊지 않으려고요.”
그녀가 수첩을 보여 주었다. ‘지난해 기록 이송 여부. 출처: 휴게소 주인, 전언.’ 딱 그 정도였다.
***
둘째 날 저녁에 문제가 생겼다. 산길을 내려오던 마차 바퀴가 깊은 진흙에 빠진 것이다. 데런이 로프를 풀어 말과 수레를 연결하는 동안 오르카가 손을 뻗었다.
“제가 밀겠습니다.”
“안 됩니다.”
메이가 즉시 말했다.
“왼팔에 힘 주지 마세요.”
“아직 완전히 못 쓰는 것도 아닌데.”
“바퀴를 밀어 올리다 다시 찢어지면 오늘까지 회복한 걸 다 잃어요.”
수현은 허둥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길 옆 나무 그루터기와 도로 아래 돌무더기가 보였다. 자신에게 마법이나 괴력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 같이 짐을 내려 마차 무게를 줄이는 일은 할 수 있었다.
“말 두 마리에 동시에 당기게 하는 건 위험한가요?”
“한 마리씩 힘을 받아야 합니다.”
데런이 답했다.
“그럼 데런 씨 지시에 따를게요. 저는 짐 목록 체크할게요. 뺀 물건 빠뜨리면 곤란하니까요.”
오르카가 물을 나르고, 메이가 말 다리를 살피는 동안 데런이 천천히 수레를 끌어냈다. 해가 지기 직전에 마차는 다시 길 위로 올라왔다.
“용사가 없어도 되네요.”
오르카가 중얼거렸다.
데런은 고삐를 만지며 대답했다.
“용사는 저 로프가 어디에 걸리는지 모르실 수도 있죠.”
“그 말은 카이렌 앞에서도 하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대신 저보고 마물 앞에 서라고 하면 도망칠 겁니다.”
사람들이 웃었다. 역할을 나누는 건 서로의 강함을 깎아내리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현은 새삼 느꼈다.
***
출발 전 세드나는 일행에게 작은 금속판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연락이 끊어졌을 때 위치를 전하는 장치라고 했다.
“이렇게 편리한 게 있으면 평소에도 쓰면 되잖아요.”
수현이 감탄하자 데런이 웃었다.
“값이 비싸고, 성역과 길드 초소 근처에서만 작동합니다.”
“역시 모든 통신에는 요금제가 있군요.”
그들은 장치가 닿지 않는 산길에서 만날 지점을 미리 정했다. 마차가 갈라지거나 누군가 길을 잃으면 가장 가까운 초소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메이는 응급 약품을 두 묶음으로 나누었고, 오르카는 어느 마차에 어떤 물품이 있는지 표시했다.
“우리 지금 엄청 조심하는 것 같아요.”
메이가 말했다.
“조심하는 만큼 불안한 건 덜하지 않나요?”
수현이 물었다.
“네. 전에는 출발해 놓고 나중에 생각했거든요.”
데런이 말했다.
“이젠 길에서 바퀴가 빠져도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할지 정했으니까요.”
모두 웃었다. 하지만 첫날 밤 수현은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을 느꼈다.
작은 여관의 벽은 얇았다. 옆방에서 용병들이 다음 날의 사냥 대가를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마물이 한 마리 늘 때마다 은화 한 닢을 더 달라고 했고, 고용주는 계약서에 이미 위험이 포함돼 있다고 우겼다. 수현은 무심코 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내가 이 사람들 계약까지 들여다볼 권한은 없지.
대신 양초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자꾸 모든 부당함에 달려들고 싶은 마음은 선의와 피로가 섞인 무엇이었다. 자신의 일을 알아보는 일과 남의 일을 모두 떠안는 일은 달랐다.
다음 날 아침, 용병 중 한 명이 마구간에서 팔을 싸매는 모습을 보았다. 데런이 말에게 물을 주다가 그에게 붕대가 필요한지 물었다. 용병은 손사래를 쳤다.
“괜찮소. 어제 계약도 고쳤거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수현은 더 묻지 않았다.
***
둘째 날 강가에는 오래된 검문소가 있었다. 병사는 그들을 세우고 임무 명세서를 확인했다.
“왕립길드 사람이라면 긴급 통행세가 면제입니다.”
“우린 긴급 작전 중이 아니에요.”
수현이 말했다.
병사는 멈칫했다. 데런도 당황한 듯 수현을 보았다.
“임무를 보러 가는 거니까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적으면 긴급 작전인 것처럼 기록될 수 있잖아요. 정상 출장으로 통행하고 비용은 영수증 받아 정산하면 돼요.”
세드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길까지 와서 기록 때문에 돈을 더 내겠다는 사람은 처음 본다.”
“나중에 부정 통행했다는 말 듣는 것보단 낫죠.”
마차가 다리를 건널 때 수현은 통행세 영수증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데런이 작게 말했다.
“오늘도 한 가지 배웠습니다.”
“아직 영수증 분실하지 않는 건 안 배우셨잖아요.”
“그건 너무 어렵습니다.”
수현은 웃었다. 사람들은 조금씩 같은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빚을 지우지 않고, 서류가 말하는 일을 실제 일과 맞추는 언어였다.
서부 성역은 산을 등지고 있었다. 새하얀 돌계단이 세 갈래로 갈라졌고, 가운데 길은 일반 참배객이, 왼쪽 길은 환자가, 오른쪽 길은 서류와 보급품이 드나들었다.
서류가 사람과 다른 길로 들어간다는 점이 수현에게는 묘하게 보였다.
입구 접수관은 통행증을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R-0 지하 보존실 열람이라면 직접 계약 당사자가 와야 합니다.”
세드나가 준비한 서류를 보여 주었다.
“원정대의 정산 분쟁 당사자가 비용 관련성을 소명했고, 외부 자문인은 그 신청에 동행한 겁니다.”
“당사자는 누굽니까?”
“메이입니다.”
메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손목 고리가 희미하게 빛났다.
“제 이름으로 비용이 청구되고 있어요. 어떤 원계정에서 나온 건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접수관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정산 관련 부분의 열람 심사는 가능하지만 타인의 개인 기록을 그대로 보여 줄 순 없습니다.”
“그걸 요청하는 게 아니에요.”
수현이 말했다.
“메이 씨가 부담해야 한다는 금액의 계산 근거부터 보여 주세요. 그 근거에 다른 사람의 민감한 정보가 있으면 가리고요.”
“그렇게 좁히면 담당자의 판단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그는 접수 번호를 적어 주었다. 번호 아래에는 붉은 글씨가 있었다.
[봉인 점검까지 이틀. 자료 열람 중 기록 손상 또는 위조 의심 발견 시 즉시 중단.]
수현은 종이를 한 번 더 읽었다.
“열람 중 중단되면 이의 제기 절차가 있나요?”
“있습니다. 다만 보존실장에게 직접 제기하셔야 합니다.”
“보존실장이 누군데요?”
“수녀 아스텔 님입니다.”
그 이름을 듣자 메이가 잠깐 표정을 바꿨다.
“아스텔 수녀님이라면… 제가 견습 시절 배운 분이에요.”
수현은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낯선 곳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길을 헤맬 걱정을 줄여 줄 것이다. 그러나 아는 사이란 이유로 기록을 열어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 정식으로 만나죠.”
***
아스텔은 넓은 서가 앞에서 작은 유리병을 닦고 있었다. 백발이 섞인 머리를 단정히 묶었고, 손에는 잉크 얼룩이 남아 있었다. 메이가 이름을 부르자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곧 수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분이 현장 확인을 하러 온 이방인인가요?”
수현은 인사를 하다가 멈칫했다.
“제가 이방인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소환 서고에서 문의가 왔습니다.”
“무슨 문의요?”
“민원 전달 경로와 원본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었지요.”
아스텔은 서랍에서 봉인된 종이를 꺼냈다. 봉투에는 수현이 서울 사무실에서 본 것과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았다. 거울에 비춘 듯 좌우가 뒤집혀 있었다.
“이 봉투를 아세요?”
수현이 물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이런 봉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보내는’ 데 쓰이고, 돌아오는 봉투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봉투요?”
“그 말의 의미를 확인하려면 소환 서고의 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보존실 기록을 맡고 있을 뿐이에요.”
수현의 심장이 잠깐 빨리 뛰었다. 귀환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이곳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아스텔은 그저 들은 이야기를 말했을 뿐이었다. 수현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알겠습니다. 그 얘기는 별도로 확인할게요. 먼저 신청서를 받아 주시겠어요?”
아스텔은 메이의 신청서를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이분이 원하시는 것은 진실입니까, 아니면 특정한 누군가의 유죄입니까?”
메이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제가 왜 빚을 졌는지 알고 싶어요. 제가 쓴 적 없는 비용이라면 내고 싶지 않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스텔은 신청서에 날짜를 적었다.
“오늘 해 질 때까지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공개할 수 있는 부분과 지켜야 하는 부분을 나누겠습니다.”
수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날 저녁 보존실 문 앞에 작은 쪽지가 붙었다.
[정산 근거 일부 열람 허가. 원계약 인명 부분 비공개.]
아래에는 아스텔의 필체로 한 줄이 더 있었다.
[단, 기록철이 말하지 않는 것을 사람에게서 들으려면, 그 사람이 말할 준비가 되었는지 먼저 물으세요.]
수현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이곳에는 종이보다 오래 침묵한 사람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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