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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21화
PAYLUA ORIGINAL · 제21화

21화. 계약이 끝난 다음 날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331자

오프라인 책장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었다. 이수현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세었다. 널빤지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틈은 모두 아홉 개였다. 어제까지는 일어나자마자 제7원정대 천막으로 가서 출정표부터 확인했을 시각이었다. 오늘은 아무 약속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야 할 일은 넘쳐났지만 일을 하기로 한 계약은 없었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는 걸 수현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수현 씨! 식사하러 안 나오세요?” 메이의 목소리였다. 수현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작업복 대신 가지고 온 셔츠를 입은 뒤 문을 열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해요.” “네? 아프세요?” “아뇨. 계약 끝났잖아요.” 메이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마를 탁 쳤다. “아, 그렇죠. 그래도 같이 아침은 드셔도 되는데.” “그건 좋죠. 식사는 근로 제공이 아니니까요.” “가끔 수현 씨 말을 들으면 밥 먹는 것도 서류를 써야 할 것 같아요.” “밥값은 누가 내는지 정도는 알아 두면 좋겠네요.” 두 사람은 웃으며 복도로 나왔다. 계단 아래에는 카이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보다 얼굴빛이 좋았다. 깨어 있는 용사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이 청년이 저렇게 편안하게 설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부터 삼십 일 시험 운영입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그렇죠. 여러분의 시험 운영이요.” “수현 씨는 저희와 함께하지 않습니까?” “하고 싶다고 자동으로 계약이 늘어나는 건 아니에요.” 카이렌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새로 부탁드려야겠군요.” “무슨 업무를, 얼마나, 어떤 책임으로 맡길 건지부터 정하면요.” 그가 빙긋 웃었다. “수현 씨가 그 말을 할 줄 알았습니다.” 수현은 대답 대신 따뜻한 수프를 받아 들었다. 몇 주 전까지 서울에서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으며 상담 전화를 받던 사람이었다. 이제 낯선 세계의 용사에게 계약의 정의를 설명하며 보리 수프를 먹고 있었다. 직업병도 이 정도면 차원을 넘었다. *** 아침을 먹고 나자 세드나가 두 장짜리 서류를 들고 왔다. “제7원정대가 요청한 자문 연장안이다.” “어제 회의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요?” “카이렌이 새벽에 요청서를 냈어.” 수현이 카이렌을 돌아보았다. “새벽에요?” “잠깐 깼습니다.” “그건 기상이지 휴식이 아니잖아요.” “그런 말을 들을 줄 알고 낮에 다시 자겠습니다.” 수현은 웃으려다 연장안을 읽고 웃음을 멈췄다. 근무 장소는 ‘원정대 및 관계 지역 일원’, 업무는 ‘필요한 모든 협조’, 보수는 ‘길드 재량에 따름’이었다. “누가 썼어요?” “감독관실 초안이야.” “그럼 일단 수정을 해야겠네요.” 세드나는 예상했다는 듯 의자에 앉았다. 수현은 세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필요한 모든 협조라면 마물 앞에 서라는 지시까지 포함될 수 있어요. 저는 전투원도 아니고 왕국에서 인정한 법무관도 아니죠. 업무 범위를 계약 확인, 현장 기록 정리, 당사자 동의에 따른 이의 신청 지원으로 한정해 주세요.” “보수는?” “기존 일당 은화 두 닢. 길드 업무 때문에 이동하면 교통과 숙식은 별도. 위험 지역 동행을 요구하려면 먼저 동의받고, 거절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문구도요.” “기간은 삼십 일이 아닌가?” “시험 조정이 삼십 일인 것과 제 체류 결정을 삼십 일 묶는 건 달라요. 우선 열나흘만 하죠. 중간에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떠날 권리도 필요하고요.” 세드나가 펜을 멈췄다. “그 조항은 전례가 없군.” “그렇다면 첫 전례가 되면 되죠. 거절할 거면 서로 계약하지 않으면 되고요.” 그녀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속으로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은화 스무 닢을 받아도 집에 돌아가는 길은 살 수 없었다.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영영 이곳에 머물겠다는 약속을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조사 대상 기록에 접근할 땐 별도 권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자문 계약서 하나로 모든 비밀 장부를 열게 해 달라는 뜻이 아니에요.” 세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내가 오히려 넣고 싶었어.” 둘은 함께 문장을 다듬었다. 서류 위에 적힌 ‘충성’이라는 말을 ‘업무 수행’으로 고쳤을 때 세드나가 잠깐 웃었다. “우리 길드에서 충성이 빠진 계약서를 보게 될 줄이야.” “용사로서의 신념은 본인이 갖는 거예요. 계약상 복종 범위와는 별개죠.” 수현이 최종안을 돌려주었다. “당사자에게 검토할 시간 주세요. 오늘 바로 서명하라고 하지 마시고요.” 세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정식 계약 전에는 일을 안 할 건가?” “동료로서 이야기하는 것과 정식으로 서류를 열람하는 건 나눠야죠.” “알았어. 그럼 이건 업무가 아닌 소식이다.” 그녀가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서부 성역 지하 보존실 R-0 기록철 열람 신청. 접수 가능. 보호 대상 정보와 연계되므로 당사자 또는 이해관계인의 사유서 필요.] “접수 가능이라니, 좋은 소식 아닌가요?” “그래. 다만 여기서 서부 성역까지 마차로 사흘이야.” “사흘이요?” 서울에서 부산을 가도 몇 시간이면 되는데. 수현은 휴대폰의 꺼진 지도를 떠올리다 한숨을 쉬었다. “서류도 장거리 출장을 다녀야 하는 세상이군요.” *** 그날 오전 원정대 천막에는 여섯 사람이 모였다. 수현은 자신이 계약을 검토 중이며 참석자들에게 개인 기록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권한이 아직 없다고 분명히 했다. 그러나 카이렌이 먼저 자기 출정표를 펼쳤다. “이건 제 기록입니다. 제가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메이도 손목 고리 정산서를 내밀었다. 오르카는 라비엔의 방패 수리 대장을, 데런은 서부 성역에서 돌아온 운송 명세를 꺼냈다. 젠이 빈손을 들어 보였다. “저는 정보가 없네요.” “아직 없는 게 아니라 본인이 확인해야 할 게 남은 거겠죠.” 수현이 말했다. “저희끼리 기억을 맞춰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지 맙시다. 각자 알고 있는 걸 따로 적고, 맞는 부분만 연결해요.” 카이렌은 고개를 숙인 채 종이를 바라봤다. “제 기록에 사흘이 없습니다.” “근무표에는 있죠.” “네. 그런데 기억에는 없어요.” “그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는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가 직접 묻고 싶어요. 누군가 저 대신 대답해 주는 건 이제 싫습니다.” 그 말에 수현은 속으로 작은 표시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카이렌은 자신이 모르는 계약에 대해 질문하는 일조차 부끄러워했다. 이제는 모른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덜했다. 메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고리 비용이 R-0 계정과 이어진다면 제가 심사 신청인이 될 수 있겠죠?” “실제 관련성이 인정되는지가 먼저예요. 비용 코드가 같다고 그 안의 모든 기록에 접근할 권리가 생기지는 않아요.” “그래도 신청해 볼 수는 있죠?” “네. 거절되더라도 어떤 이유로 거절됐는지 받아야 다음 단계를 생각할 수 있어요.” 오르카가 방패를 세워 놓았다. 라비엔이 쓰던 방패의 안쪽에는 오래된 흠집과 작은 수리 표식이 남아 있었다. “기록철이 살아 있다면 좋겠네요.” “기록철은 살아 있죠.” 수현이 말했다. “사람도 그러길 바라는 겁니다.” 오르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도 쉽게 위로하지 않았다. 라비엔의 생사에 대해 확인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 오후가 되자 브레그가 새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수현이 제시한 문구 중 일부는 손으로 정리돼 있었다. 위험 지역 임무는 사전 서면 동의, 이동 비용은 실비 지급, 임의 전투 배정 금지. 계약 기간은 열나흘. 중도 종료는 사전 통지를 원칙으로 하되 귀환 가능성처럼 즉시 이탈이 필요한 사유는 예외로 했다. “일당 은화 두 닢은 그대로다.” “좋네요.” “성과금은 없다.” “없어도 됩니다. 제가 사람을 몇 명 구했는지로 상담료를 계산하면 상담할 일이 없는 날은 손해 보잖아요.” 브레그가 코웃음을 쳤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 “자주 듣습니다.” 그가 펜을 내밀기 전에 수현은 계약서 하단을 읽었다. 거기에는 ‘비밀 기록을 무단 열람한 경우 즉시 계약 종료’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 자체로 부당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무단’의 범위가 모호했다. “정당한 절차로 받은 자료와 당사자가 스스로 제공한 자료는 제외한다는 문구를 넣어 주세요.” “참 까다롭군.” “나중에 서로 편하자는 겁니다.” 브레그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명을 마치기 전, 수현은 카이렌과 메이에게 말했다. “제 계약이 체결돼도 두 분의 일을 자동으로 대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위임이 필요하면 별도로 다시 정해야 해요.”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안심돼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수현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서명 후 세드나가 계약서 사본 두 장을 나누어 주었다. 수현은 자신의 사본에 날짜를 적고 가방에 넣었다. 이제 다시 일할 수 있었다. 다만 일할 수 있다는 사실과 반드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달랐다. “그럼 첫 번째 업무는?” 브레그가 물었다. “서부 성역 보존실 열람 신청서를 접수하는 겁니다.” “거기까지 갈 생각인가?” “허가가 나면요. 그 전에 현지 담당자에게 열람 범위와 안전한 이동 경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세드나는 그 말에 만족한 듯 웃었다. ***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숙소였다. 수현의 방은 지금껏 제7원정대에서 제공한 임시 숙소였다. 기존 계약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방값이 언제까지 지원되는지 물으려고 숙소 관리인을 찾아갔다. “오늘부터는 일반 손님으로 계산하시면 되겠네요.” 관리인이 장부를 꺼냈다. “길드 요청으로 사흘분이 더 예약돼 있습니다.” “누가 요청했나요?” “감독관실입니다.” 수현은 잠깐 멈췄다.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과 비용이 누구에게 청구되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충돌하지 않았다. “그럼 그 사흘을 누가 부담하기로 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관리인은 이상한 사람을 본 듯했다. “그냥 편하게 묵으시면 되는 걸요.” “나중에 제 임금에서 공제되면 서로 난감해질 수 있어서요.”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있을 수도 있죠.” 관리인은 장부에 별도 표시를 해 주었다. 감독관실에 확인을 요청한 뒤 결과를 알려 주겠다고 했다. 수현은 그에게 감사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세드나가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일까지 확인하다니 네가 정말 노무사라는 사람인가 보다.” “서울에서는 저도 이런 건 귀찮아서 대충 넘어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왜?” “모르는 세계니까요. 친절한 사람도 많은데, 모른다는 이유로 손해 보는 사람도 너무 많아서요.” 세드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가 떠난 뒤에도 우리가 해 볼 수 있겠군.” “그게 목표예요.” 수현은 방에 돌아와 받은 은화 스무 닢을 하나씩 세었다. 무겁고 둥근 금속이었다. 고향에서는 돈을 벌면 카드 명세서에 숫자가 올라갔다. 여기서는 일한 날마다 무게가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세 닢만 작은 주머니에 따로 넣었다. 긴급 귀환 수단을 찾거나 이동 중 안전한 숙소를 구할 때 쓸 돈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조사라도 자기 생계를 전부 잊은 채 이어 갈 수는 없었다. 해가 떨어질 무렵 서부 성역의 회신이 도착했다. 비둘기도 아니고 얇은 금속판이 푸른빛을 내며 전달문을 내뱉는 방식이었다. 수현은 이 세계의 행정이 때때로 서울의 팩스보다 앞섰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세드나가 문장을 읽었다. [보존실 접수 승인. 실물 열람은 서부 성역 관리자의 확인 필요. 기록철은 사흘 뒤 정기 봉인 점검에 편입 예정.] “봉인 점검이 뭐죠?” “오래된 계약 원본에 마력 표식을 다시 입히는 절차야. 그 기간엔 열람이 정지될 수 있어.” “얼마나?” “한 달일 수도 있고.” 수현의 손이 멈췄다. 지금까지 기다려 온 기록이 눈앞에 있는데 한 달 뒤로 미뤄진다는 말이었다. 그동안 30일 시험 조정도 끝나 버릴 것이다. “그럼 내일 출발하려면 뭘 해야 하죠?” “당사자 동의서, 길드 출장 승인, 마차 두 대에 대한 안전 확인이 필요하다.” “차가 아니라 마차라니, 출장을 가도 시대가 바뀐 게 실감 나네요.” 카이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무조건 따라오겠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몸 상태로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지 메이 씨에게 먼저 확인받으세요.” 카이렌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현은 새로운 업무표를 꺼냈다. 첫 줄에는 ‘허가 확인’, 둘째 줄에는 ‘의료 판단’, 셋째 줄에는 ‘위험 시 철수’라고 적었다. 아직 한 걸음도 서부로 가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 누구도 이번에는 영웅의 희생을 당연한 조건으로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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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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