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은 짧았다.
이수현이 제7원정대의 임시 자문 계약에 서명한 지 열흘째 되는 아침, 숙소 창가에는 빈 잉크병 두 개와 종이 뭉치가 쌓여 있었다. 서울에서 들고 온 펜은 잉크가 거의 떨어졌고, 휴대폰 배터리는 14퍼센트였다. 그런데도 할 일 목록은 첫날보다 길었다.
그녀는 새 종이 맨 위에 적었다.
[열흘의 결과는 사람에게 남아야 한다.]
거창한 선언으로 보이지 않게 작은 글씨로 적었다. 적어도 자신이 멋진 문장에 취해 정작 지급받아야 할 돈을 잊는 일은 없게 하려는 다짐이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카이렌이 먼저 말했다.
“오늘로 계약이 끝나는 거죠?”
“네. 별도 연장 계약 없으면요.”
메이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럼 내일부터는….”
“일단 오늘 결산부터 합시다. 연장은 서로 조건을 보고 정하는 거고요.”
수현은 웃었다. 여기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고용 관계를 애정만으로 연장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제가 계속 있든 없든 여러분이 만든 기록은 남아요.”
그녀는 카이렌에게 출정 확인표를 넘겼다. 젠에게는 시간 기록표를, 데런에게는 보급 수령 대장을, 메이에게는 비용 이의 신청서 사본을 넘겼다. 한 사람의 가방에만 서류가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이 떠나는 순간 일이 멈춘다.
오르카가 팔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제 일은요?”
“부상자 업무 분장표요. 제일 중요한 거 아닐까요?”
“그걸 맡을 줄은 몰랐네요.”
“저도요.”
모두 웃었다.
***
최종 평가 회의는 경비가 있는 본관 회의실에서 열렸다. 브레그, 세드나, 에드갈, 제7원정대 대표 카이렌과 메이, 그리고 수현이 참석했다. 왕도에서 온 법무관은 젊은 남성이었다. 그는 본인을 리온이라고 소개했다.
“벨튼 공작가 법무실 소속입니다. 공작님의 직접 지시는 아니며 위임 인장 등록 업무를 확인하기 위해 왔습니다.”
수현은 그 표현을 마음속으로 표시했다. ‘공작의 의사’와 ‘공작가의 업무’는 같지 않다.
회의는 우선 시험 규칙 평가부터 시작했다.
세드나는 지난 열흘간의 출정 기록을 펼쳤다. 출정 전에 위험 정보를 확인한 사례, 부상으로 전방 임무를 대체한 사례, 보급품을 실수령한 사례가 정리돼 있었다.
“전투 성과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고 할 자료는 없습니다.”
수현은 먼저 말했다.
에드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실패한 시험인가?”
“성공이라고 단정하지도 않겠어요. 다만 치료 비용과 보급 누락이 더 빠르게 드러났고, 위험한 상황에서 대체 임무를 택할 수 있었습니다.”
“문서가 더 늘었다는 불만도 있지.”
“있어요. 그래서 원래보다 항목을 줄인 양식도 준비했습니다. 매번 긴 보고서를 쓰는 건 비효율적이에요.”
수현은 작은 한 장짜리 확인표를 내밀었다. 고위험 출정에만 상세 기록을 추가하고, 일상 순찰은 간단한 점검으로 끝내는 방식이었다.
에드갈은 잠시 종이를 살폈다.
“이 정도면 현장 부담이 줄겠군.”
그는 승인 인장을 들었다.
[제7원정대 시험 조정 운영: 조건부 삼십 일 연장.]
메이가 기쁨을 감추지 못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젠은 소리를 지르려다 브레그 눈치를 보고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수현은 기뻤다. 그러나 바로 뒤의 문장을 읽었다.
[급여 산정 기준 및 정산 문제는 별도 심의 대상.]
아직 할 일이 남았다.
***
급여 문제는 예상보다 진전됐다. 중간 평가 때 보류됐던 근무 효율 공제는 일부가 취소됐다. 출정 준비와 차량 점검이 업무로 인정되었고, 치료 대기 시간은 별도 분류로 이동했다.
“그러면 돈을 다 받는 건가요?”
젠이 물었다.
“아니요. 아직 다툼이 남아 있어요.”
수현은 확인된 금액을 분리해서 적었다. 실제 지급할 금액, 아직 보류된 금액, 이의 신청 대상 금액을 색깔 다른 줄로 표시했다.
카이렌이 조용히 말했다.
“전에는 나라가 많이 지원했다고만 들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얼마를 받았고 무엇을 못 받았는지 알겠어요.”
에드갈이 그를 바라봤다.
“왕국에 대한 신뢰가 줄었나?”
“아닙니다.”
카이렌은 잠깐 생각한 뒤 덧붙였다.
“믿으려면 무엇을 믿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수현은 그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말이었다. 카이렌이 스스로 선택한 문장이었다.
***
메이의 치료비 분쟁에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특별 회복 관리국은 미정산 금액 중 ‘관리 지연비’를 계속 부과하지 않기로 했고, 착용한 고리의 안전 점검을 승인했다. 하지만 소생 대비 충당금과 마석 원금의 부담 주체는 확정되지 않았다.
“절반도 못 끝낸 것 같은데요.”
메이가 속삭였다.
“원금이 남아 있으니까요.”
수현도 속삭였다.
“그런데 전에는 설명할 사람도 없었잖아요.”
메이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빛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뜨거워지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이제 질문할 수는 있겠네요.”
“그럼요.”
그 말이 끝나자 리온 법무관이 서류 가방을 열었다. 회의실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인장 B-13의 위임 범위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
리온은 관련 대장의 공개 가능한 부분을 펼쳤다.
“B-13은 회복 관리국 운영 비용 및 긴급 자원 배정에 관한 위임 인장입니다. 개인의 신분을 변경하거나 복무 계약을 신규로 체결할 권한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수현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럼 서리달 열셋째 날 R-0 계약을 승인하는 데 쓰였다는 기록은요?”
“그 문서가 비용 계정 개설인지, 개인 계약인지는 원문을 확인해야 합니다. 문서 유형이 다르면 승인 권한의 범위도 달라집니다.”
“개인 계약서를 보려면 원본이 필요하군요.”
“맞습니다.”
“그 원본은 지금 비공개고요.”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문서의 효력 범위를 다투는 정식 심사를 제안하러 왔습니다.”
수현은 되물었다.
“누가 신청할 수 있죠?”
“직접 계약 당사자, 정당한 권한을 가진 대리인, 또는 해당 계약 때문에 실제 비용 부담을 진 사람입니다.”
“메이 씨와 카이렌 씨도 신청할 수 있나요?”
“둘의 계약과 R-0 계약 사이에 직접 관련성이 인정된다면 가능합니다. 먼저 신청 자격에 대한 심사가 필요합니다.”
여전히 조건은 많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닫힌 문 앞에 ‘접수처’가 생겼다.
***
리온이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 에드갈은 원정대의 조건부 연장 기준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기록을 남긴다는 이유로 출정이 지연되면 곤란하다.”
카이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험 작전에는 미리 역할을 나누고, 긴급 구조 때는 현장에서 필요한 확인만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돌아온 뒤 적겠습니다.”
“이해했군.”
에드갈이 말했다.
브레그는 간단한 표를 들어 보였다.
“감독관실도 기록을 같이 맡겠습니다. 원정대가 출정 때문에 쓰기 어려운 문서는 우리가 대신 취합하죠.”
수현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자기 업무가 늘어난다는 걸 알면서도 브레그가 협조하겠다고 말한 건 뜻밖이었다.
“감사합니다. 다만 현장을 보지 않은 사람이 마음대로 내용까지 적지는 않도록 해 주세요.”
“알고 있어. 목격한 사람 이름을 쓰면 되잖아.”
“맞아요.”
세드나는 마지막으로 메이의 손목을 확인했다.
“고리 안전점검은 별도 날짜를 잡아 진행하겠다. 사람을 위험하게 만드는 장치라면 미정산 금액과 상관없이 다뤄야 해.”
메이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쥐었다.
“그 말을 길드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
세드나가 머쓱하게 웃었다.
수현은 회의 기록 마지막에 당사자들이 직접 확인한 내용을 적었다. 모두가 맞다고 동의한 문장만 최종 보고서에 들어갔다. 이의를 제기한 항목은 삭제하지 않고 미결 사항으로 남겼다.
그때 에드갈이 카이렌에게 물었다.
“자네는 앞으로도 이런 방식을 계속할 생각인가?”
카이렌은 잠깐 생각했다.
“전투에서는 여전히 실수할 겁니다. 부상자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고, 판단이 늦을 때도 있겠죠.”
“그런 말을 하는 용사는 드물지.”
“그래도 기록이 남으면 다음번엔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모든 걸 기억하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에드갈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삼십 일 동안 보여 주게.”
평가는 끝났다. 수현은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회의실 앞 의자에 잠시 앉자 메이가 물을 가져다주었다.
“이번엔 수현 씨 차례예요.”
“뭐가요?”
“쉬는 거요.”
수현은 웃었다.
“오늘은 정말 쉴 거예요.”
메이는 그녀를 보다가 조금 진지해졌다.
“우리 때문에 돌아갈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니겠죠?”
수현의 웃음이 멈췄다.
“그건… 저도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 귀환 방법도 계속 찾고 있어요.”
“만약 갑자기 돌아갈 문이 생기면요?”
“여러분한테 인사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돌아가고 싶어요.”
메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녀는 수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해 볼게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게 필요한 약속이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카이렌은 수현에게 물었다.
“수현 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먼저 제 계약 연장 조건부터 확인해야죠.”
“저희가 부탁드리면 남아 주실 겁니까?”
“남고 싶은 마음과 남을 수 있는 조건은 다른 문제예요.”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처음보다 시간이 덜 걸렸다.
세드나는 별도 봉투를 내밀었다.
“열흘 자문료 정산서다. 계약에 적힌 일당 은화 두 닢, 열흘. 제공한 숙식은 별도로 기록했고.”
수현은 정산서를 펼쳤다. 은화 스무 닢. 현물 숙식의 제공 내역. 지급일과 수령 확인란. 숫자가 정확한지 확인한 뒤 서명했다.
“받았다고 표시하는 건 실제 돈을 받은 다음에 할게요.”
세드나가 웃었다.
“알고 있어. 그렇게 적혀 있다.”
수현도 웃었다. 누군가 그 말을 먼저 해 준 게 꽤 기뻤다.
실제 은화 스무 닢을 손에 쥐었을 때, 그녀는 첫날과 다른 무게를 느꼈다. 이세계에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 이제는 정식으로 인정받은 일이 되었다.
***
해가 질 무렵 성역 후문에서 마지막 답신이 도착했다. 라비엔의 개인 기록철 운송 내역을 재확인한 결과였다.
[운송장상 기록철 인수자: 왕립길드 보급계가 아닌 특별 회복 관리국 연락관.]
수현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방패는 보급창고로 들어왔고, 기록철은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 누락이 아니라 분리 인수였다.
아래에는 연락관이 남긴 짧은 메모의 사본이 붙어 있었다.
[원계약자는 생존 확인 전까지 별도 등록. 임의 소멸 처리 금지.]
“생존 확인 전까지라니.”
카이렌이 중얼거렸다.
“그럼 라비엔이 살아 있었단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어요. 누군가 생존 여부를 확인하려 했다는 뜻에 가까워요.”
수현은 답했다.
그때 문서의 날짜를 본 세드나가 얼굴을 굳혔다.
“수현. 이 메모는 라비엔 전출 이후 날짜야.”
“그럼 기록철은 전출 다음 날 옮겨졌고, 그 뒤에도 계속 처리 중이었던 거네요.”
“그래. 그런데 수신 부서가….”
세드나가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보관 장소: 서부 성역 지하 보존실. 담당 접수번호 R-0.]
수현은 눈을 감았다 뜨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제7원정대의 최초 계약일에 지워진 이름. 라비엔이 남긴 방패. 카이렌의 사라진 사흘. 메이에게 청구된 소생 대비 비용. 멀리 떨어진 것 같았던 이야기들이 한 장부 번호로 모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 사람의 음모인지, 오래된 제도의 오류인지, 더 복잡한 사정인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수현은 새 수첩 맨 위에 적었다.
[11일째 할 일: R-0 계약의 당사자와 효력 확인. 서부 성역 보존실의 라비엔 기록철 열람 신청.]
그리고 그 아래에 덧붙였다.
[오늘은 퇴근.]
카이렌이 그 문장을 읽었다.
“그건 저도 할 수 있겠군요.”
수현이 웃었다.
“제일 어려운 일인데, 이제는 하실 수 있겠죠.”
그날 제7원정대의 등불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꺼졌다. 어디선가 마물이 울었고 왕도에서는 새로운 명령이 작성되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사람을 먼저 쉬게 하는 규칙이 지켜졌다.
수현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일부터 진짜 어려운 조사가 시작된다.
그러니 오늘은 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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