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7 사건의 최종 심사일, 왕도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수현은 창가에서 신발끈을 매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가장 많이 연습한 말은 ‘그렇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였다. 오늘은 어쩌면 다른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회의장에는 예전보다 많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회의장은 사람 수만 많아진 것이 아니었다. 발언 순서도 달라졌다. 행정기관의 설명이 끝난 뒤에 피해 당사자의 질문을 받는 방식 대신, 각 결정 항목을 확인할 때마다 수현이 의미를 물을 수 있도록 했다. 법률상 그녀에게 모든 결정권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기 사건의 설명을 듣는 데 필요한 시간이 주어졌다.
수현은 첫 번째 항목이 낭독될 때 손을 들었다. ‘이동 동의 자료 부재’라는 문장이 왜 ‘당사자 의사 거절’로 바뀌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심사위원은 거절 기록도 없으며 미확인 상태를 사실대로 적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리한 사실을 부풀릴 필요도 없었다. 남아 있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문제를 지적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뒤쪽의 어떤 직원은 오래 서 있어야 했다. 수현은 회의장 운영 담당에게 교대 인력을 요청할 수 있는지 물었다. 모두 큰 결정을 내리느라 분주했지만 그 결정을 기록하는 사람도 몸이 있는 사람이었다. 담당자는 뒤늦게 의자를 가져왔다. 수현은 작은 일에 마음이 놓였다. 심사반의 직원들, 왕립길드 담당자, 기술청의 안전 담당자, 통합 이관반의 현직 책임자, 피해 구제 담당자가 참석했다. 메이는 자기 일이 있어서 잠깐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메이는 수현에게 작은 종이 봉투를 하나 건넸다. 손목 고리가 빠진 뒤 처음으로 직접 구운 과자라고 했다. 수현은 봉투를 받으며 메이가 오늘 오후에도 치료실에서 일할 예정인지 물었다. 메이는 아니라고 답했다. 오전 진료만 하고 오후에는 사엘과 업무를 바꿨다는 것이었다. 이제 수현이 어디에 있든 그녀의 휴식은 누군가의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실제 운영표에 남아 있었다.
“오늘 심사 잘 끝내고 와요.” 메이가 말했다.
“네. 그리고 쉬는 날에는 일하러 오지 마세요.”
메이는 웃었다. “그 말은 이제 제가 당신에게 할 차례죠.”
수현은 그녀의 가벼운 손목을 한 번 바라봤다. 그 작은 변화가 자기 사건의 거대한 심사만큼 중요하다고 느꼈다. 누군가 돌아가는 길을 찾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남아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았다. 오늘의 사건은 수현의 것이었다. 카이렌은 휴가 중이라 오지 않았다. 그는 응원의 편지만 보냈다.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킨 채 다른 사람을 응원하고 있었다.
심사 결과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첫째, 수현에게 사전 이동 동의를 구한 기록이 없고 메이의 민원이 타인의 이동 승인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을 확정했다. 둘째, 오래된 자동 이관 절차가 ‘의사 미수신’을 ‘담당실 배정’으로, 다시 ‘집행 완료’로 바꾸어 표시한 운영상 결함을 인정했다. 셋째, 기술적으로 누구의 조작이 신체 이동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원본 자료가 부족하므로 개별 실행 책임의 단정은 보류했다.
수현은 세 부분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만으로도 왕국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누군가 직접 조작했다고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잘못된 절차를 유지하고 사람을 보호하지 못한 기관은 구제책을 마련해야 했다.
“왕국은 부당한 이동 절차로 발생한 체류·조사 비용을 부담합니다.” 심사반장이 말했다. “현행 자동 이관 방식은 폐기하고 당사자 의사 확인과 기술 운용 승인을 분리합니다. 수현 씨의 안전 귀환을 위한 조사와 연락 지원은 본인 동의를 전제로 계속합니다.”
그 뒤에 정정된 기록 원본이 제출됐다.
심사반은 자동 이관 절차를 폐기한 뒤 대체 절차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할 점검일도 지정했다. 수현은 나중에 다른 부서에서 예전 서식을 다시 쓰지 않도록 교육과 원본 보존 규칙도 함께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불합리하다고 판단된 절차가 현장 창고에 남아 다른 이름으로 재사용되는 경우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틸은 폐기라는 말을 주의해서 사용하자고 했다. 서식의 사용은 끝내되 조사에 필요한 원본은 보존해야 했다. 수현은 동의했다. 증거를 없애는 일이 잘못된 제도를 없애는 것과 같지는 않았다. 기록을 완전히 지워 버리면 나중에 비슷한 피해를 겪은 사람이 자신의 사정을 입증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회의실의 서기는 최종 결정문에 정정할 수 없는 사실과 앞으로 확인해야 할 사실을 따로 적었다. 실제 인체 이동의 기술적 원인이 남은 조사 과제라고 명시되었다. 수현은 그 문장에 동의했다. 결말을 위해 틀린 답을 만들어 넣지 않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고 있었다.
마틸은 원장의 보존 원칙을 설명했다. 과거의 잘못된 표시를 지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만드는 대신, 언제 어떤 근거로 정정했는지 함께 남긴다고 했다. 수현은 그 방식에 동의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겪은 일은 단순한 착오로만 남아서는 안 됐다. 기록이 있었기에 조사할 수 있었고 기록이 잘못됐기에 자신의 말을 증명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다.
회의장 한쪽에 앉은 젊은 기록원은 정정 문구를 여러 번 읽었다. 그는 새 방식으로 업무를 배우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의사 미수신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배정 완료로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부터 배우는 셈이었다. 수현은 그에게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정확하게 기록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시간을 확보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집행 완료’라는 한 단어 위에는 굵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대신 ‘행정 이관 처리, 실제 신체 이동 원인 미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완료 도장은 취소됐고 취소 사실은 사라지지 않도록 원장에 함께 보존됐다.
수현은 그 문구를 읽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공식 기록의 사본을 하나 더 요청했다. 장식할 상장이 아니라 자신이 귀환한 뒤에도 사건의 진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심사반은 민감한 개인정보를 가린 사본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수현은 그 조건에 동의했다. 누군가의 책임을 확인할 권리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함부로 공개하지 않을 의무는 함께 지킬 수 있었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사건 기록이 누군가에게 빌려 받은 힘이 아니라, 당사자로서 정당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고 느꼈다. 마침내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써 놓은 말이 진짜 사람의 사연보다 위에 있지 않게 됐다.
하지만 심사는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다른 유사 사례에 대한 안내와 재심 청구 창구를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수현 한 사람의 사건만 바로잡고 끝낼 수는 없었다. 왕국의 구형 절차가 어디까지 쓰였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합 이관반의 현직 책임자가 일어서서 기관 명의로 사과했다. 그는 누가 수현을 이동시켰는지 알 수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렇기에 지금 할 수 있는 책임을 명확히 기록하겠다고 했다. 수현은 그 사과를 들었다. 모든 잘못이 해명됐다는 느낌은 없었다. 다만 누군가 처음으로 자신이 겪은 일을 기관의 책임 안에 놓고 있었다.
“사과를 받아들일지에 대한 대답은 지금 하지 않겠습니다.” 수현이 말했다. “조치가 실제로 이행되는 걸 확인한 뒤 생각하고 싶어요.”
심사반은 그 말도 기록했다. 침묵이 동의로 바뀌지 않는 순간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루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검토실의 독립 검사 보고서를 가져왔다. 두 세계를 잇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 경로는 반복된 양방향 문답에서 외부 독립 응답을 보였고, 왕도 안의 반향이나 자동 답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한국어 답변자의 참여 범위도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사람 이동 안전성에 대한 판정은 별개의 연구로 남았다.
“여기까지 와서도 곧바로 돌아갈 수 없다니, 실망했죠?” 루세가 물었다.
“네. 하지만 사실 기뻐요. 당신이 안전하다고 거짓말하지 않아서요.”
“돌아가는 길을 만드는 일은 계속됩니다. 단계를 건너뛰지는 않을 겁니다.”
수현은 보고서를 덮었다. “저도 이제 그 과정을 믿어 보고 싶어요. 다만 언젠가 가는 날이 오면 최종 선택은 제가 합니다.”
그날 오후 메이는 고리 없는 손목으로 수현의 팔을 잡았다.
강가의 모임에 나가기 전에 세드나는 수현에게 작은 서류함을 전해 주었다. 왕국이 부담하기로 한 체류비 정산 내역과 향후 귀환 조사 비용의 지원 조건, 정정 심사의 단계별 안내가 들어 있었다. 수현은 하나하나 확인했다. 지금까지의 체류비를 일괄 수령해 버리는 대신, 직접 낸 비용과 기관이 제공한 지원을 분리해 계산했다. 왕국의 책임을 인정받았다고 해서 확인할 수 없는 숫자를 함부로 청구하고 싶지 않았다.
세드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지원받는 입장에서도 이렇게 까다롭군요.”
“제가 돈을 내는 쪽이어도 똑같아요.”
그들은 잠시 웃었다.
세드나는 웃음을 멈춘 뒤 자기 책상에 쌓여 있던 편지들을 가리켰다. 구형 자동 이관 절차의 중단 통지를 받은 다른 기관에서 질문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떤 부서는 실수한 기록의 정정 방법을 물었고 다른 부서는 야간 인력을 늘릴 예산을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 물었다. 수현은 그 목록을 보며 기분이 묘했다. 자신이 떠나온 세계에서 익숙하던 질문들이 다른 세계에서도 같은 무게로 들렸다.
“당신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다 잊어버릴까요?” 세드나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저는 제 이름이 필요 없는 절차가 남았으면 해요. 사람들이 서로 확인하고 고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면, 제가 없어도 돌아갈 겁니다.”
세드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영웅 한 사람보다, 잊어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록과 사람들의 습관이 더 오래갈 수 있었다. 수현은 이 사건이 끝난 뒤에도 새 규칙이 실무에서 작동하는지 확인할 독립 창구가 남는다는 소식에 안도했다. 자신이 언제 귀환하더라도 왕국 사람들이 직접 감시하고 고칠 수 있어야 했다. 일을 제대로 마무리한다는 것은 누군가 계속 자신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카이렌은 평범한 옷차림으로 나타났고, 젠과 데런은 여전히 서로의 휴무일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오르카는 라비엔에게서 온 편지를 보여 줬다. 북방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고, 그녀는 자신의 새 계약 조건에 따라 눈 오는 날의 기록실 교대를 줄였다고 했다.
모두가 왕도 강가에 모였다. 제7원정대가 예전에 원정에서 돌아오면 작은 축하를 하던 장소였다. 수현은 강물에 떠오른 가을 하늘을 바라봤다. 자신이 정말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더는 자기 삶 전체가 미해결 사건 하나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돌아가면 연락해요.” 카이렌이 말했다.
“어떻게요? 여기에는 휴대전화도 없는데.”
“그런 것까지 제가 알아야 합니까? 기술자들이 알아낼 겁니다.”
모두 웃었다. 루세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떠넘기시지 마십시오. 연구비가 필요합니다.”
“그럼 예산부터 청구하세요.” 수현이 말했다.
메이는 빵을 나누어 주었다. 한때 그녀는 자신에게 쌓인 치료비를 걱정하느라 다른 사람의 음식을 먼저 챙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지금은 자기가 먹을 몫을 남겨 두고 빵을 나눴다.
수현은 자신의 몫을 받아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이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어느 쪽도 잘못된 감정은 아니었다.
그날 밤 그녀는 수첩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수현은 처음 적었던 질문들 옆에 날짜를 적었다. 사건을 처음 접수한 날, 메이가 자신의 말을 직접 증언한 날, 제0회신함의 내용이 밝혀진 날, 관제실이 완료 표식을 정정한 날. 날짜들은 왕도의 달력으로 기록됐다. 서울의 시간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기록에는 모두 그녀가 실제로 겪은 날들이 있었다. 서울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날들이 지워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떠난 뒤 서류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담당 기관 목록도 적었다. 세드나의 길드, 나엘의 검토실, 마틸의 공동보존실, 그리고 제7원정대의 자율 근무 위원회. 이름과 역할이 섞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끝에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연락도 분명히 했다. 여기에 남는 일을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어야 했다. 처음 이 세계에 도착한 날 적은 문장에는 물음표만 있었다. 누가 불렀는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여기서 살게 되는가. 이제 답이 조금 달라졌다. 일부는 확인됐고 일부는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누가 자기 의사를 대신 결정할 수 없는지만큼은 분명했다.
수현은 새 페이지에 한 문장을 적었다. ‘사건은 끝난 게 아니라 올바른 상태로 남았다.’ 그리고 창밖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왕도 사람들은 오늘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도 언젠가 그들과 같은 저녁을 한국에서 맞을 수 있기를 바랐다.
제19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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