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엔의 편지는 왕도에서 북방까지 일곱 날을 걸려 도착했다. 반대로 그녀의 회신이 도착하는 데는 아홉 날이 걸렸다. 수현은 그 시차 때문에 달력을 새로 그려야 했다. 북방 회복소가 왕도보다 느리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편지가 길을 가는 동안 진짜 사람이 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편지는 다른 때보다 두꺼웠다.
오르카는 봉투를 건네기 전에 표지에 적힌 수신인을 확인했다. 수현이 이 편지를 봐도 된다는 표시가 있는지 먼저 읽었다. 예전에는 전령이 편지를 가져오면 누가 먼저 펼칠지를 정하는 일이 사소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라비엔의 사례 이후 원정대는 서신을 당사자에게 먼저 전달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증빙만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라비엔이 이번엔 정말 기뻐하는 것 같아요.” 오르카가 말했다.
“일한 시간을 인정받아서요?”
“그것도 그렇고, 자기가 남기로 한 걸 모두가 이해해서요.”
수현은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 자신이 귀환을 희망한다고 말할 때마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벼워지는 것처럼 느꼈었다. 하지만 라비엔의 선택을 응원하는 오르카를 보니 누군가의 선택을 존중하는 일이 곧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르카가 가져온 봉투 안에는 라비엔이 직접 작성한 계약 정산 확인서 사본과 짧은 개인 편지가 있었다. 수현은 세드나와 함께 사본의 열람 범위를 확인했다. 라비엔은 자신의 보수 항목 중 공개해도 되는 부분만 선택해서 보냈다.
그동안 회복소에서는 야간 기록 협력 업무가 봉사처럼 처리되거나 치료받는 기간의 숙식과 뒤섞이곤 했다.
라비엔의 편지에는 부록으로 회복소의 새 교대표가 들어 있었다. 라비엔은 실제로 일한 시간을 인정받는 것만큼 치료받는 시간에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이 필요했다고 적었다. 야간 기록실의 불빛 아래 오래 앉아 있으면 옛 부상이 심해졌고, 그때마다 동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안함 대신 대체 근무표를 확인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대신해 일하는 직원에게 공짜로 도움을 받지 않았다. 회복소는 별도의 담당자를 배치했고 추가 근무가 필요하면 해당 시간의 보수를 계산했다. 서류에 적힌 한 줄이었지만 동료들에게는 중요한 변화였다. 라비엔이 아프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 무급으로 더 일해야 한다면 새로운 계약도 공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현은 편지를 읽다가 라비엔이 얼마나 오래 아픔과 죄책감을 같이 안고 살았는지 생각했다. 이제는 그것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다. 원정대의 방패를 들던 사람이 기록실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정확히 기록하는 일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일지 몰랐다. 라비엔은 실제 일한 날과 쉬었던 날을 따로 기록했다. 동료들이 함께 확인했고, 회복소의 정산 담당은 일부 야간 업무 시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문제의 숙식 공제는 재심사를 거쳐 계산 기준이 달라졌고, 과거 제7원정대에서 미지급된 보수도 별도의 정산 절차를 끝냈다.
“최종 정산 확인서네요.” 세드나가 말했다.
수현은 서류를 다시 읽었다. “네. 다만 이것으로 라비엔의 거취까지 확정하는 건 아니겠죠.”
“그건 본인의 다음 계약에 있겠죠.”
봉투 속 두 번째 종이가 바로 그것이었다. 라비엔은 회복소의 기록 협력 업무를 새로 계약하기로 했다.
편지에는 자신이 다음 달부터 배울 업무도 적혀 있었다. 회복소에 새로 들어오는 환자들이 자신의 치료 기록을 열람하는 절차를 안내하는 일이었다. 라비엔은 누군가의 정보를 대신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기록을 확인할 수 있게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수현은 이 문장을 읽으며 처음 만났던 라비엔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모든 위험을 받아내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스스로 위험을 알아보고 선택하도록 돕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변화는 느렸지만 확실했다.
새 계약에는 직원이 치료를 받을 시간을 먼저 정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라비엔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한 번에 오래 서 있거나 야간에 쉬지 않고 문서를 정리하면 통증이 심해진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회복소는 작업대의 높이를 조정하고 야간 업무의 일부를 낮 시간으로 옮겼다. 계약서에는 이러한 조정이 혜택이 아니라 실제 업무 수행 조건으로 기록됐다.
오르카는 그 조항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원정대에서 이런 걸 먼저 했어야 했는데.”
“이제부터라도 할 수 있잖아요.” 수현이 말했다.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 방패를 산다는 예산 신청보다 교대 근무표를 만드는 일이 먼저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느리게 배웠다. 그래도 배우고 있었다. 야간 근무 상한과 유급 휴식, 치료 일정 우선 원칙이 적혀 있었다. 예전처럼 원정대에서 자리가 나면 자동 복귀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북방에 남는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오르카는 서류를 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그는 라비엔과 오랫동안 함께 싸웠고 언젠가 그녀가 다시 방패를 들고 돌아오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별을 거부하는 마음과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다.
“축하해야겠지.” 그가 말했다.
“그럼요.” 수현이 답했다.
“솔직히 섭섭해.”
“그것도 말해도 돼요. 돌아오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면요.”
오르카는 웃었다. “편지에 쓸게. 네가 정한 곳에서 행복하길 바란다고.”
수현은 문득 자신을 생각했다. 메이는 왕도에 남을 것이다. 카이렌도 제7원정대를 지킬 것이다. 라비엔은 북방에 남기로 했다. 그런데 수현은 반대로 떠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세계가 가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 오후에는 반환 검토실에서 오래된 점검판을 열람했다.
검토실은 원래대로 돌아온 전사판과 아직 수리 중인 판을 구분해 두었다. 나엘은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장치의 목록을 설명하면서 비상 정지권을 누가 행사하는지 다시 확인했다. 기술 책임자는 자신이 모든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 누구든 위험을 발견하면 작동 중단을 요청할 수 있고, 검토 책임자도 그 이유를 확인하기 전에는 다시 가동하지 않기로 했다.
수현은 자료를 읽으며 조금 전 라비엔의 편지를 떠올렸다. 북방의 기록실과 왕도의 기술실은 서로 다른 일을 했다. 그러나 일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다. 누군가 다치지 않을 권리를 직접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똑같이 필요했다.
루세는 안전 점검표에 대체 근무자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시험을 연기했다. 수현은 그가 아쉬워하는 얼굴을 보았다. 기술자는 오늘 새로운 결과를 얻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혼자 일을 더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수현은 별다른 말 없이 그의 결정에 동의했다. 시간 보정 제2권의 마지막 부록에는 작은 선이 촘촘히 그려진 수신 확인 판이 있었다. 다른 부서에 있는 판 두 장과 달리, 부록의 판은 같은 질문이 되돌아온 것인지 다른 장소에서 새로 작성된 답변인지 비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루세는 반향판을 완전히 분리해 놓고 서류 위에 시험 순서를 그렸다.
그가 설명을 시작하자 수현은 먼저 작업자들의 배치를 확인했다. 전사판을 조작하는 직원과 안전 정지를 담당하는 직원이 다른 사람인지, 두 사람이 서로를 볼 수 있는지, 중단 신호를 누르면 실제로 기록이 남는지. 루세는 하나씩 답했다. 그 과정에서 오래된 장치에 작은 문제가 발견됐다. 안전 정지 손잡이를 내리면 기록판까지 함께 멈춰, 왜 멈췄는지 나중에 확인하기 어려웠다.
“정지 기록만 별도로 남길 수 있나요?” 수현이 물었다.
“가능합니다. 다만 구조를 바꿔야 해서 오늘 시험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답이 즉시 나온 것이 수현은 기뻤다. 과거에는 시험을 멈추면 실적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모두가 서둘렀을 것이다. 지금은 멈추는 일이 안전 검증의 일부가 되었다. 루세는 독립 기록장치를 추가하는 비용을 적고 수리반의 교대 시간을 먼저 확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첫 번째 단계는 송신 기록에 없는 무작위 신호를 원점 측이 새로 넣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두 번째는 복귀한 답변의 시간 표식이 왕도 시설이 기록할 수 없는 별도의 기준을 갖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원점에 누가 있어야겠군요.” 수현이 말했다.
“예. 그렇지 않으면 이 장치는 우리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는 데 그칠 수 있어요.”
“다른 세계에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대답하도록 하죠?”
루세는 오래된 한 장을 내밀었다. 동의 없이 타인을 실험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경고였다. 공개할 수 있는 신호만 보내고, 상대가 자발적으로 답하도록 기다릴 것. 이 장치로 특정 개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수현은 그 문장을 좋아했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오래전의 누군가는 모르는 사람의 의사를 존중하려 했다는 뜻이었다.
한편 왕도 행정청에서는 E-17 사건의 후속 조치가 진행됐다. 잘못된 자동 완료 출력은 공식 정정되었고, 책임을 구분하기 위한 독립 감사가 시작됐다. 개인 명의가 확인되지 않은 공용 계정의 과거 변경 기록은 지워지지 않고 보존됐다. 피해 당사자가 확인 가능한 진전은 작았지만 분명했다. 수현은 그 결과를 라비엔에게도 간단히 적어 보냈다.
‘우리 사건도 아직 전부 밝혀지지 않았어요. 다만 이제 누군가의 귀환과 계약이 누구의 말로 정해지는지 조금씩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밤에는 오르카와 데런, 젠이 식당에서 작은 모임을 열었다.
그들은 선물 목록을 작성하다가 작은 논쟁을 벌였다. 데런은 라비엔이 북방에 있으니 두꺼운 털모자를 보내자고 했고, 젠은 회복소에서 이미 필요한 물품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했다. 오르카는 라비엔에게 필요한 것을 직접 묻자고 주장했다. 수현은 모두의 의견을 듣다가 웃었다. 예전 같으면 용사가 명령하는 대로 물품을 보냈을 원정대였다.
“그럼 내가 손수 만든 장갑을 보내면 되겠네.” 데런이 말했다.
“손수요?” 젠이 눈을 크게 떴다.
“아, 바느질은 메이에게 물어봐야겠군.”
메이는 즉시 반대했다. “제가 휴무일에 남의 장갑을 만들 이유가 뭔데요?”
모두 크게 웃었다. 데런은 결국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라비엔에게 필요한지 먼저 묻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수현은 그 웃음 속에서 원정대가 서로에게 기대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느꼈다. 더 이상 가장 착한 사람이 모든 일을 떠맡는 조직은 아니었다. 라비엔의 새 계약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들은 라비엔이 없는데도 그녀의 이름을 남용하지 않았다. 대신 회복소로 보낼 음식과 필요한 겨울 장갑 목록을 만들었다. 보내기 전에 수령 의사를 묻는 편지를 함께 넣기로 했다.
“장갑까지 승인받아야 하나?” 데런이 투덜거렸다.
“장갑을 좋아할 수도 있고 필요 없을 수도 있잖아요.” 젠이 말했다.
오르카가 잔을 들었다. “라비엔이 결정하도록.”
그 말을 듣고 수현은 웃었다. 처음에는 용사 파티가 노동 규정 때문에 싸울 줄만 알았다. 이제 그들은 장갑 한 켤레를 보내는 데에도 상대의 의사를 물었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 작은 일들을 통해 조직은 오래 버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북방에서 다시 편지가 왔을 때 라비엔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을 곳으로 가는 중이다.’ 수현은 그 문장을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다.
수현은 라비엔의 편지 아래에 자신의 짧은 답을 적었다. 북방에 남는 결정을 축하한다는 말, 정산 절차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확인해 보라는 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속도를 지키라는 말이었다. 보낼 편지를 접기 전에 문장을 하나 지웠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라는 말이었다. 라비엔은 돌아온다고 약속한 적이 없었다. 수현이 원하는 결말을 라비엔의 종이에 적을 필요는 없었다.
오르카가 봉투를 가져갈 때 수현은 그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오르카는 잠깐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웃었다. “알아요. 라비엔은 자기 자리에서 잘 지낼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을 하는 거죠.”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과 붙잡는 일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자신에게도 쓸 수 있는 말일지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일이 여기서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언젠가 자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19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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