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렌이 왕도 치료실에 도착했을 때 수현은 이미 복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검집을 옆으로 치웠다. 평소 같았으면 긴급 출정 준비를 하느라 진료 시간을 줄였을 것이다. 오늘은 달랐다. 그가 정한 휴가가 끝날 때까지 원정대의 정찰은 젠이 맡았다.
“옛날엔 여기 오면 전쟁터보다 더 긴장됐습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왜요? 의사 선생님이 무섭나요?”
“아뇨. 내가 없는 사이 누군가 다칠까 봐요.”
“그러면 휴가가 아니라 대기 근무였네요.”
카이렌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걸 배우는 데 오래 걸렸죠.”
의사 리벨은 카이렌에게 열람할 자료의 범위를 확인했다.
리벨은 처음부터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료정보를 알 권리가 있지만, 모든 정보를 혼자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카이렌에게 혼자 듣고 싶은지, 신뢰하는 사람이 함께 있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카이렌은 잠깐 망설이다가 혼자 듣겠다고 했다. 수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몸에 관한 설명을 자신의 귀로 처음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현은 복도에 앉아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을 느꼈다. 치료실에서는 환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여러 색의 줄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환자는 검사실로 가는 길, 약을 받는 길, 휴식실로 가는 길을 구분할 수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장식인 줄 알았지만 그 줄 덕분에 직원들이 같은 질문에 답하느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줄었다고 했다. 수현은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제7원정대에 제안했던 업무 동선표를 떠올렸다. 그때도 사람의 발걸음을 줄이는 것이 환자의 위험을 낮추고 직원의 시간을 되돌려줄 수 있었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수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사흘이 기록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 시간을 수현이 대신 채울 수는 없었다. 카이렌이 문을 열고 나왔을 때까지도 그녀가 할 일은 물을 한 잔 준비하고, 그가 원한다면 앉을 자리를 남겨 두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사흘에 관한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처음 두 장은 본인의 체온·진정제 투여 기록이었고 다음 장은 K형 안정장치의 병동 재고 내역이었다. 실제 장치 착용 기록은 별도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그 기록까지 보고 싶습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리벨이 다시 물었다. “읽다가 멈추고 싶어지면 말씀하세요.”
수현은 문 옆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카이렌의 의료기록을 볼 권한이 없었고, 그가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캐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복도에는 달큰한 약초 냄새가 났다. 창가에서는 치료실 견습생이 환자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 카이렌이 나왔다. 얼굴은 창백하지 않았지만 말이 없었다. 그는 수현과 함께 작은 정원 벤치에 앉았다. 손등에 남은 흰 고리 모양의 흉터를 잠깐 바라보더니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날 K형 장치가 내 침대 옆에 있었다는 기록은 맞았습니다.”
카이렌은 진료실에서 받은 작은 도표를 보여 주었다. 물론 본인이 공개하기로 한 부분뿐이었다. 도표에는 두 침상의 위치와 장치를 보관한 바구니의 이동 기록이 표시돼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 이름으로 알려졌던 K가 사실 장비의 형식이라는 점은 이미 확인됐지만, 이번에는 그 장비가 어느 침상에서 쓰였는지 구분할 수 있었다. 카이렌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줄에 X자를 그었다.
“예전에는 이 표시를 보면 내가 죽은 사람이었을까 봐 겁이 났어요. 지금은 누군가 내 이름 위에 다른 기록을 덮어쓴 거였을 가능성이 더 커 보여요.”
“정정 신청하셨어요?”
“네. 의사 선생님과 함께요. 제가 적지 않은 기록이라 제가 단독으로 고칠 순 없지만, 당사자의 의견을 붙일 수 있다고 했어요.”
그는 어느 침상에 있던 다른 환자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수현은 그러면 된다고 말했다. 모르는 사람의 정보를 빼앗아 자기 기억을 채우지 않는 것도 중요한 선택이었다.
“본인이 착용했대요?”
“직접 착용한 건 아니래요. 담당 의사가 옆 침대 환자에게 사용했던 장치를 내 침대 가까운 곳에 대기시켰던 거죠. 사람 이름 대신 침상 번호를 적는 관행 때문에 나중엔 내 기록처럼 보였답니다.”
수현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럼 사흘은요?”
“약물에 의한 깊은 진정과 부상 후 회복 기간이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체온을 낮추는 처치 기록도 있었어요. 당시 내가 의식이 없던 시간과 의료진이 따로 남긴 관찰표가 맞아떨어지더군요.”
“소생 기록은요?”
카이렌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기록이 정리됐습니다. 적어도 내게 연결된 사망 판정은 없었습니다. 대신 이송 도중 누군가가 다른 환자의 긴급 기록을 내 침상 번호와 합쳐 적은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정보는 내가 볼 수 없는 게 맞죠.”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생과 부활이라는 극적인 단어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알 권리가 있는 사실과 없는 사실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남의 의료정보가 카이렌의 불안을 해결하는 대가가 되어서는 안 됐다.
“흉터는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날 묶었던 보호대 자국일 수도 있다고 해요. 더 검사를 받을 수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보려고요.”
“좋은 선택이에요.”
“뭐가 좋은 건지는 스스로 생각해 보려고요.” 카이렌이 웃었다.
그는 작은 편지 한 장을 꺼냈다.
편지에는 정찰 담당자 젠이 자신의 판단을 왜 그렇게 내렸는지 적혀 있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을 때 돌아갈 길이 어두워졌고, 두 대원의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젠은 임무 목표를 일부 이루지 못했다고 솔직히 기록했다. 예전 같았으면 모두에게 무능하다는 비난을 들을까 봐 그 사실을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이렌이 만든 철수 기준표에 따라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이었다.
“상부에서 문제 삼지는 않았어요?” 수현이 물었다.
“처음엔 이유를 물었죠. 그런데 우리가 미리 정한 기준대로 철수했잖아요. 예산 담당도 그 기준을 인정했습니다.”
“그럼 기준표가 사람을 지켰네요.”
“그리고 기준을 지킬 수 있는 권한이요.”
카이렌은 보고서 끝에 젠의 이름을 적어 칭찬했다. 수현은 그 장면이 특별하다고 느꼈다. 영웅이 된다는 이유로 모든 판단을 독점하던 사람이 자신이 없던 날의 좋은 결정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남기고 있었다. 서로의 실적을 빼앗지 않는 것도 동료를 존중하는 방법이었다. 젠이 보낸 근무 보고였다. 정찰대는 숲의 북쪽 길이 무너진 것을 확인하고 훈련을 취소했다. 예전에는 카이렌이 없을 때도 부하들이 그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길을 끝까지 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현장 담당자가 정해진 철수 기준에 따라 판단했고 상부도 이를 승인했다.
“내가 쉬는 사이에 별일 없었던 게 아닙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별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멈췄어요.”
수현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카이렌은 갑자기 점심 식당에 가자고 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무릎에 통증이 와 잠깐 앉았다. 수현이 도움을 주려 손을 뻗자 카이렌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앉았다 갈게요.” 그는 스스로 숨을 고르고 통증이 가라앉자 일어났다. 예전 같았으면 다리가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곧장 걸었을 것이다.
“용사의 체면을 버리기로 하셨네요.” 수현이 농담했다.
“체면은 밥을 먹여 주지 않잖아요. 제 무릎도 고쳐 주지 않고요.”
그는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길가에서 아이들이 나무 칼로 싸움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카이렌을 알아보고 검을 보여 달라고 소리쳤다. 카이렌은 웃으며 허리의 검을 살짝 들어 보였지만 실제로 뽑지는 않았다. 아이는 아쉬워했으나 곧 친구와 다시 놀았다. 수현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과 자기 몸이 원하는 모습 사이에서 카이렌이 처음으로 후자를 선택하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빠져야 조직의 강함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 쉬어도 다른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강한 조직이었다.
그들은 병원 앞 시장에서 따뜻한 수프를 먹었다.
카이렌은 수프를 먹는 동안 옛 전투 이야기 대신 요즘 시장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을 들려주었다. 데런의 말이 새 먹이를 싫어해서 하루 종일 마구간이 소란스러웠다는 이야기, 젠이 정찰 중 무너진 다리를 발견하고도 영웅처럼 건너지 않았다는 이야기, 메이가 휴무일에 자기 방을 정리하다 너무 많이 자서 저녁 약속에 늦었다는 이야기였다.
“진짜 원정대 이야기가 이 정도입니까?” 수현이 웃었다.
그들은 수프를 비운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카이렌은 목소리를 낮추어 휴가가 끝나면 원정대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말했다. 부상자들이 다시 임무에 나서기 전 본인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 치료받는 사람을 위해 야간 보급을 따로 남기는 방법, 임무가 없는 날에는 훈련 시간을 무리하게 늘리지 않는 규칙이었다. 예전의 계획은 더 강한 검을 얻는 것이었지만 오늘의 계획에는 사람이 먼저 있었다.
수현은 모든 제안을 칭찬하지 않았다. 어떤 규칙은 예산이 필요하고 어떤 규칙은 장비나 사람을 추가로 배치해야 했다. 그래서 누가 실제 일을 맡을지까지 확인하자고 했다. 카이렌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웃었다. “역시 당신이 오면 일이 늘어요.”
“아뇨. 보이지 않던 일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 카이렌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그 모든 일을 해 왔을 것이다. 이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함께 확인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날에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항상 피를 흘리는 이야기만 있다면 누군가 잘못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수현은 잠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래전 처음 용사를 만났을 때 그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으려면 자신이 모든 위험을 견뎌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는 위험을 줄이는 일도 영웅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변화가 마법보다 더 믿기 어려운 기적처럼 느껴졌다. 카이렌은 제7원정대의 첫날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용사라는 칭호를 받았을 때 주변 사람들이 무엇이든 해결할 사람처럼 바라봤다는 것. 그 시선에 응답하려다 힘들다고 말하는 법을 잃었다는 것. 수현은 조용히 들었다.
“다들 나한테 강해야 한다고 했거든요.” 카이렌이 말했다. “그런데 요즘은 강하지 않은 날도 있어요. 그런 날엔 젠이 정찰을 하고, 데런이 말을 돌보고, 메이가 나한테 약을 먹으라고 합니다.”
“아주 무서운 조직이 됐네요.”
“치유사가 무섭습니다. 정말로요.”
그들이 웃는 동안 시장의 종이 울렸다. 카이렌은 다음 약속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그는 출정하지 않는다. 치료실을 나와 시장을 걷고, 자기 발로 여관까지 돌아갈 것이다. 내일도 휴가였다.
늦은 오후 수현은 제7원정대 사무실에 들렀다. 젠이 지휘한 철수 보고서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메이가 초대해 약재 창고의 새 휴게석을 보러 온 것이었다. 창고에는 벤치가 두 개 생겼고 교대표가 벽에 붙어 있었다. 사엘이 치료를 맡는 시간에는 메이가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 수현은 그 간단한 질서가 전장에서 싸워 얻은 승리처럼 보였다.
“카이렌이 자기 기록을 읽었대요.” 메이가 말했다.
“본인이 이야기해 줬어요?”
“아니요. 진료를 받았다는 것만요. 내용은 묻지 않았습니다.”
수현은 메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병실의 모든 환자를 걱정하느라 자신이 쉴 곳을 찾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비밀을 지켜 주면서도 자기 일을 할 수 있었다.
저녁에는 카이렌이 짧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이 누군가의 음모였는지는 여전히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내가 어떻게 보낼지 이제는 알겠습니다.’ 수현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억지로 되살리는 것보다, 앞으로의 날들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수첩에 적었다.
그날 저녁에는 리벨 의사가 보내 온 일반적인 회복 관리 안내가 도착했다. 개인정보가 포함되지 않은, 오래 다친 사람이 휴식을 취할 때 알아야 할 주의사항이었다. 수현은 안내문을 카이렌에게 다시 보내며 굳이 의학적인 조언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가 잘 아는 것은 근무와 기록의 영역이었고 치료에 대한 판단은 의사와 본인이 해야 했다.
다음 날 카이렌은 병원에서 권고한 가벼운 산책을 했다. 수현은 멀리서 그를 한 번 봤지만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혼자 걸으며 길가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은 돌아섰다. 무엇인가 알아냈을 때마다 모든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신도 조금 벗어난 기분이었다. 타인의 일상에는 듣지 않아도 되는 장면이 있었다. ‘세 날을 돌려받는 방법은 과거를 강제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날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빈 귀환 신청서를 바라봤다. 자신에게도 오늘과 내일을 정할 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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