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정산실의 복도에는 늘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아픈 가족 대신 온 사람, 잘못 적힌 수령 서명을 정정하려는 사람, 물품 창고에서 일하다 다친 사람. 메이는 그들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손목의 금속 고리는 평소처럼 차갑게 닿았다. 이날만큼은 그 감촉을 무시할 수 없었다.
수현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메이의 신청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늘 회의에는 메이 자신이 신청인으로 출석했고, 수현은 공개가 허용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지인으로 동석했을 뿐이었다.
“제가 말해야 할 게 잊히면 어떡하죠?” 메이가 물었다.
“잊어도 괜찮아요. 본인 기록을 다시 보고 답하면 돼요.”
“그래도 너무 느리다고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심사하는 분들이 속도를 조절할 일이고요.”
메이는 소리 없이 웃었다. “예전에는 당신이 이런 말을 하면 까다롭다고 생각했어요.”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 한 남자가 메이에게 다가와 자신의 가족도 부당한 치료비를 청구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메이는 무작정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건 번호를 보여 주며 어떤 자료가 필요했는지 설명했고, 창구에서 다른 사례로 접수하라고 안내했다. 남자는 낙담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는 그의 가족이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묻지 않았다. 공개하고 싶지 않은 의료정보를 자신이 먼저 요구할 이유가 없었다.
수현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메이는 오늘 자신의 빚을 해결하러 왔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에 관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모든 문제를 혼자 짊어지는 대신 적당한 방법으로 돕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소진시키지 않고 오랫동안 누군가를 돌보는 방법일 수 있었다.
“지금은요?”
“필요할 때는 제가 더 까다롭습니다.”
실제 회의는 예상보다 조용했다. 정산실의 키아가 청구 항목을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미 개인 산정에서 빠진 예비 적립비, 출고는 확인되었지만 메이가 직접 수령했다는 증거가 없는 약재, 환자 치료에 사용됐지만 원정대 공용 보급 예산에서 처리해야 할 물품. 마지막으로 개인 부담이 될 수 있는 항목은 소액이었고, 그것마저 당사자의 승인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다.
“왜 당시에는 전부 제 이름으로 올렸나요?” 메이가 물었다.
키아는 오래된 지급표를 펼쳤다. “치유사 근무 인장이 공용 약재 인수증에도 같이 사용됐습니다. 출고를 담당한 사람이 가장 가까운 치유사의 이름으로 적어 놓았고, 그 자료가 정산실로 넘어오면서 개인 비용으로 합쳐졌습니다.”
“제가 치유사여서 빚을 졌다는 말이군요.”
“그렇게 처리된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메이는 손목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회의실 건너편 직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산실은 마지막으로 메이가 담당했던 어느 밤의 약재 지급 대장을 펼쳤다. 대장에는 두 병의 소독약과 마석 조각 세 개가 같은 사람에게 지급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치료실의 진료기록에는 서로 다른 환자 둘과 긴급 공용 물품의 사용 시각이 따로 적혀 있었다. 키아는 그날 창고에서 일했던 직원의 보조 기록을 가져왔다. 급히 치료실로 보내느라 환자별 명단을 정리하지 못했고, 야간 치유사였던 메이의 인장만 확인했다는 증언이 붙어 있었다.
“그러면 물건이 사라진 건 아니군요.” 메이가 말했다.
“네. 사용자는 따로 있고 인수표만 합쳐졌습니다.”
“그걸 제가 썼다고 했으니 그동안 제 빚이 된 거네요.”
“그렇게 계산된 잘못은 인정합니다.”
수현은 메이가 한마디씩 확인하는 모습을 보며 손바닥을 꼭 쥐었다. 많은 사람이 병원비를 낼 때 자기 치료비조차 복잡하다고 느낀다. 메이는 다른 사람을 치료하다 쓴 공용 물건의 비용까지 개인에게 청구받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외로운 싸움인지 수현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회의 기록원은 메이가 묻는 시각마다 질문을 멈추고 정확한 항목을 찾아 주었다. 서두르지 않는 태도 덕분에 과거의 숫자가 비로소 사람의 얼굴과 분리됐다. 두 병의 약재는 누군가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쓰였고 그 비용은 치유사의 개인 채무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다른 치유사에게 같은 일이 생기나요?”
키아는 시범 개선 서식을 보여 주었다. 환자별 실제 처치, 공용 보급, 개인 신청 물품을 분리했고, 현장의 확인인은 자동으로 채무자가 되지 않도록 했다. 이미 등록된 다른 청구 사례도 순차 검토하도록 권고를 올렸다.
“권고만으로 충분한가요?” 메이가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부서 수령과 실제 적용을 확인하겠습니다.”
메이는 수현 쪽을 보지 않았다. 수현은 괜히 기뻤다. 오늘의 질문은 메이가 자기 삶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다.
결정은 점심 무렵 내려졌다. 확인된 공용 비용은 원정대와 왕도 치료 예산으로 재분류되었고, 수령 근거가 없는 항목은 메이 개인 청구에서 제외됐다. 심사 결과 메이 명의 C-47에 남는 확정 개인 채무는 없었다.
결정문을 받는 순간 메이는 문서의 첫 줄을 오래 읽었다. ‘개인 청구 종결’이라는 표현에는 작은 주석이 붙어 있었다. 앞으로 발견될 미확인 항목을 그녀의 개인 채무로 자동 재등록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별도 심사를 진행하되 본인에게 사전에 통지하고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준다고 했다. 수현은 그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의 자유가 내일 또 다른 자동 계산으로 뒤집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키아는 고리 해제 담당 부서에 결정을 보내는 방법을 설명했다. 과거에는 결정문이 전달되지 않아 고리가 몇 달씩 남아 있는 사례가 있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메이가 직접 수령할 수 있는 사본을 만들고, 치유안전실의 수령 확인 날짜와 실제 해제 날짜를 따로 기록하기로 했다.
“그럼 제가 다음 주에 다시 오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메이가 물었다.
“다음 주에 별도로 확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확인을 원하시면 언제든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메이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그녀가 정산실에 다녀온 날이면 치료실 동료들은 언제 또 가느냐고 물었다. 이제는 정말 치료하는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쉬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 치료사로 돌아갈 것이다. 기존 강제 징수는 취소되고, 기등록된 금속 고리의 채무 연동도 종료할 수 있게 되었다. 문서에는 적용 날짜와 책임 부서가 분명히 적혔다.
메이는 문서를 받은 뒤 한참 말이 없었다.
“이제 끝났나요?”
키아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C-47 개인 청구는 종결됐습니다. 고리 해제는 치유안전실에서 별도로 진행합니다. 마력 잔류를 확인해야 해서 오늘 즉시 떼는 것은 권하지 않습니다.”
“고리를 바로 제거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록해 주세요. 제가 빚을 인정해서 남겨 두는 건 아니라고요.”
키아는 그렇게 적었다.
수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난 수많은 회의에서 메이는 ‘징수 보류’를 결정받았다. 그것은 필요한 임시 보호였지만, 손목의 쇠고리는 계속 남아 있었다. 오늘은 다르게 적혀 있었다. ‘개인 청구 종결.’ 그렇다고 빚이 사라졌다는 한 줄로 몇 년의 피로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시작은 있었다.
오후에는 치유안전실을 방문했다. 안전실의 치유사는 고리에 남은 마력을 비작동 상태에서 확인했다. 메이는 설명을 듣고, 제거 과정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선택했다. 누군가 고리를 자르려는 순간 그녀가 잠깐 손을 뒤로 뺐다. 치유사는 즉시 멈췄다.
“제가 그만하자고 하면 멈추는 거죠?”
“네. 오늘이 아니어도 됩니다.”
메이는 숨을 들이쉬었다. “오늘 하고 싶어요. 다만 제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해 주세요.”
쇠고리가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치유안전실의 기록원은 해제된 고리를 봉인 주머니에 넣으며 보관 여부를 물었다. 예전이라면 고리는 자동으로 창고에 반납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리가 메이의 치료기록과 연결된 물건이므로 당사자에게 선택을 설명했다. 메이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리를 연구실에 기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자료로 마음대로 쓰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록원이 물었다.
“제가 갖고 있다가 나중에 결정할게요. 버릴 수도 있고, 오래 보관할 수도 있어요. 제 물건이잖아요.”
직원은 고리의 안전성 확인서를 써 주고 가져가도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메이는 주머니를 받아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렇게 무겁던 물건이 이제는 작고 단단한 금속일 뿐이었다. 수현은 주머니를 대신 들어 주려다가 손을 거뒀다. 오늘은 메이가 자기 무게를 자기가 정하는 날이었다.
밖으로 나와 메이는 잠깐 손목 자국을 햇볕 아래 펼쳤다. 사람은 과거의 흔적을 없앨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그 흔적을 어떤 의미로 남길지는 바꿀 수 있었다. 메이의 손목에는 희미한 자국이 남았다. 아무런 빛도 솟아나지 않았고 환호성도 들리지 않았다. 치유사가 남은 피부를 살폈고 메이는 손목을 몇 번 돌려 보았다.
“생각보다 가볍네요.”
“손목이요?” 수현이 물었다.
“네. 그리고 제 마음도요.”
두 사람은 복도 밖으로 나와 햇볕이 드는 벤치에 앉았다. 메이는 손목을 가리던 소매를 걷었다. 빛이 닿은 자국이 조금 붉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수현에게 식당 메뉴를 물었다. 약속했던 밥을 사겠다고 했다. 수현은 가장 비싼 음식이 무엇인지 장난스럽게 물었다가 바로 포기했다.
식당 주인은 두 사람이 왜 이렇게 웃는지 몰랐지만 따뜻한 국을 한 그릇 더 가져왔다. 메이가 계산하려 하자 수현은 메뉴판의 가격부터 확인했다. 메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오늘까지도 가격표를 보세요?”
“돈이 남았다고 무조건 쓰면 내일의 제가 항의합니다.”
“역시 노무사는 한 번 노무사면 계속 노무사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메이는 고리가 풀린 손목으로 숟가락을 쥐었다. 처음에는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자꾸 허전했지만 조금 지나자 숟가락의 무게만 느껴졌다. 수현은 메이에게 맛있느냐고 물었다. 메이는 한참 국을 씹다가 대답했다. “네. 이걸 먹을 시간이 있다는 것도 좋아요.”
식당을 나오며 메이는 자신의 교대표를 확인했다.
돌아오는 길에 메이는 공방의 진열대에서 작은 유리 구슬을 하나 골랐다. 구슬 안에는 푸른 빛이 굳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치유 보조인 사엘에게 선물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정산실과 치료실을 오가는 동안 사엘이 교대를 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수현이 왜 그렇게 비싸지 않은 물건을 고르느냐고 묻자 메이는 웃었다. “사엘은 번쩍이는 것보다 손에 들어오는 걸 좋아해요. 제가 함께 일해 봤거든요.”
수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 함께 일해 본 사람의 취향을 안다는 것. 그것은 같은 조직에서 오래 일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늘 누군가 부상으로 떠나거나 임금 때문에 도망가던 원정대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제 메이는 다음 달에도 사엘과 교대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미래의 일정이 불안이 아니라 평범한 약속이 되는 날이었다. 내일은 사엘이 오전 진료를 맡고 자신은 오후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아무도 메이의 회복 시간을 공용 물품처럼 쓸 수 없었다. 그녀는 손목을 감싼 천 끈을 매만지며 말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보냈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무서웠어요.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서로를 고른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원치 않게 시작한 만남도 그다음 관계만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것이 오늘의 가장 큰 위로였다.
“오늘은 제가 더 많이 먹어도 되죠?” 메이가 웃었다.
“오늘은 그게 가장 중요한 권리예요.”
식당에는 제7원정대의 젠과 데런도 와 있었다. 그들은 메이의 결정을 축하했고, 메이는 자신의 청구서가 왜 잘못됐는지 직접 설명했다. 수현은 대화를 가로채지 않았다. 메이는 빚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자기 이름이 적힌 기록을 스스로 고쳤기 때문에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저녁 무렵 메이는 고리가 빠진 손목에 천으로 짠 얇은 끈을 묶었다. 누군가에게 강제로 받은 장식이 아니라 자신이 고른 물건이었다.
“왜 새 끈을 묶어요?” 수현이 물었다.
“자리가 허전해서요. 그냥 아무것도 없어도 되는데, 오늘은 제가 정해서 하나 갖고 싶어요.”
수현은 그 선택을 이해했다. 자유는 무언가를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 무엇을 놓을지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뒤 수현은 메이에게 받은 작은 편지를 폈다. 거기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돌아갈 날이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그날은 제가 쉴 수 있게 근무표를 짜겠습니다.’ 수현은 한참 웃다가 코끝이 시큰해졌다. 메이는 이제 자신의 휴가를 허락받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계획하고 있었다.
제19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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