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문 반환 검토실은 새 안내문을 붙였다. ‘열람·기술 검토·물품 시험·인체 이동은 각각 별도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 한 문장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았다.
새 안내문에는 작은 단점도 있었다. 글씨가 너무 작았다. 수현은 문 앞에서 허리를 숙여 문구를 읽는 노인을 보고 나엘에게 문제를 말했다. 나엘은 처음에 공간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수현은 안내문 전체를 더 크게 만들고 긴 조항은 별도 서류로 건네면 되지 않느냐고 제안했다. 문구를 정확히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이 그 문구를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접수 창구 앞에 서서 몇 사람이 문장을 실제로 읽는지 살폈다. 어떤 사람은 볼 시간이 없어서 지나갔고, 다른 사람은 글씨를 읽을 수 없어서 망설였다. 나엘은 큰 글씨의 간단한 안내문과 상세 설명서를 따로 만들었다. 필요하면 직원이 천천히 읽어 줄 수 있도록 근무 계획에도 시간을 넣었다. 수현은 안내문의 완성보다 그 일을 맡을 사람의 시간이 배정된 것을 더 반겼다.
“문서가 길면 불리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어요.” 나엘이 말했다.
“읽을 수 없는 문서는 아무리 짧아도 도움이 안 돼요.” 수현이 답했다.
두 사람은 새 안내문을 붙인 뒤 서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멀리서 보아도 ‘거절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보였다. 수현은 그것만으로도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문장을 만들기까지 수현이 이 세계에서 보낸 시간은 너무 길었다.
나엘은 안내문 아래에 실제 동의서를 놓았다. 각 칸에는 미리 표시된 선택이 없었다. 거절을 선택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조항과 언제든 참여를 중단할 권리가 적혀 있었다. 루세는 물품 시험에 쓰는 장치가 일시 정지 신호를 받아들이는지 먼저 확인하는 절차를 따로 표시했다.
“이제 장치를 시험할 수 있습니까?” 세드나가 물었다.
“아뇨. 이제 시험을 제안할 자격이 생겼다는 뜻에 가깝죠.” 루세가 대답했다.
수현은 책상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종이가 매끄러웠다. 지난번에는 작은 찢김이 있던 자리였다. 나엘이 직접 고쳤다고 했다. 오래된 틈 하나를 메우는 일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다른 세계를 잇는 기술은 얼마나 조심해야 할까.
그날 수현에게 특별한 참관인이 찾아왔다. 은퇴한 서기 호른이었다. 그는 왕도 외곽에서 책 수리점을 운영하면서 구형 담당실 지정 도장이 원래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증언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도장 하나 대신 오래된 교육용 대장을 들고 왔다.
“담당실 지정이 끝나면 이런 도장을 찍었어. 그런데 서기들이 바빠지자 여기에 다른 칸을 덧붙였지.”
대장에는 ‘현장 확인인에게 확인 요청’이라는 문장 뒤에 ‘응답 대기’라는 작은 네모가 있었다. 다음 판본에서는 그 칸이 사라지고 대신 ‘배정 처리’가 있었다. 호른은 말없이 손가락을 옮겼다.
교육 대장 맨 뒤에는 아주 낡은 메모가 있었다. ‘질문을 보냈으니 답은 올 것이다.’ 수현은 이 문장을 오래 읽었다. 질문을 보낸 사실과 답을 받았다는 사실은 전혀 달랐다. 그런데 기록을 만드는 사람이 다음 절차를 서둘러 시작하고 싶을 때는 두 사건 사이의 빈 시간을 지우고 싶어질 수 있었다.
호른은 그 메모를 쓴 사람이 자신인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옛 동료일 수도 있었고 교육생일 수도 있었다. 수현은 서명 감정을 의뢰하는 대신, 당시 실제로 발송된 답신과 미수신 목록을 찾아보겠다고 적었다. 사람의 기억은 소중한 증언이지만 혼자 모든 증거가 되어서는 안 됐다.
호른은 피곤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 나이에 와서 모른다고 말해도 되는 줄은 몰랐네.”
“모른다고 말하면 우리가 조사할 수 있잖아요.”
그는 대장을 접어 원래 천에 쌌다. 책 수리점에 돌아가면 오래된 제본 기술을 배우는 젊은 사람에게도 이 일을 말해 주겠다고 했다. 잘못된 서식이 사람을 건너뛰는 법을 가르쳤다면, 그 경험은 사람을 다시 확인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쓰일 수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고치면 일을 덜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누구에게 물어보는 일이 사라졌는지 돌아볼 사람이 없었어.”
수현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호른이 자신의 잘못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뢰가 갔다. 그는 바뀐 서식이 실무에서 어떤 효과를 낳았는지 일부만 알 뿐이었다.
“이 일을 기억하는 다른 분들은요?”
“어떤 사람은 죽었고, 어떤 사람은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지. 남아 있는 사람이 과거의 모든 답을 아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럼 남아 있는 답부터 바로잡아야겠죠.”
점심 전 열린 청문회에서 메이도 잠깐 참석했다. 오래전 그녀가 보낸 민원은 치료받고 쉴 시간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민원 때문에 수현이 강제로 이동했다고 해도, 그녀가 사람을 불러 달라고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메이는 이미 여러 차례 같은 사실을 말했다. 오늘은 누군가 대신 그 말을 읽지 않기를 원했다.
“저는 사람을 데려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메이는 증언하기 전 전날 밤 작성한 작은 쪽지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민원이 처음 어떻게 시작됐는지 설명했다. 야간 치료실에 환자가 너무 많아 물조차 마시지 못했던 밤, 쉬는 시간을 달라는 말이 사치처럼 취급되던 날, 부상자를 다른 치료소로 보내는 결정을 할 권한도 없었던 때. 그때 그녀는 누군가 일을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모르는 사람을 그 사람의 뜻과 상관없이 데려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구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면 안 됩니다.” 메이는 말했다. “그런데 제가 도움을 구했다는 사실까지 잘못으로 만드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는 피해를 호소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제도 오류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오해를 받아 온 사람이었다. 수현은 그녀가 두 가지 사실을 분리하는 말을 스스로 찾아낸 것이 자랑스러웠다. 누군가 민원을 냈다는 사실은 타인에 대한 강제 행위를 승인하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메이는 쪽지를 접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수현이 눈을 맞추자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지난날의 무서움과 이제 막 생긴 자신감이 함께 있었다. “제가 구하고 싶었던 사람은 당시 제 곁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던 환자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살던 곳에서 강제로 떠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심사반이 원문 대조 결과를 다시 확인했다. 메이의 원문과 이관된 요약문이 달랐고, 요약문만 읽으면 타인의 이동에 동의한 것처럼 보일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의 권한과 실제 문서 내용 모두 그 결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신청인의 요청이 현장 확인인의 사전 동의에 갈음하지 않는다.’ 그 문장이 최종 권고 초안의 맨 위에 놓였다.
메이는 잠시 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은 작은 고개짓만 했다. 용기를 내라고 손을 꼭 쥐어 주고 싶었지만, 그 말이 필요한 사람은 이미 자기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실 뒤에서 누군가 묻기도 했다. “그럼 옛 서식 때문에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구나 소송을 할 수 있습니까?”
마틸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왕국의 구제 절차는 사건별로 다릅니다. 이번 권고는 타인의 의사를 추정하지 말라는 원칙과 조사 절차를 제안합니다. 다른 사건도 자동으로 결론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수현은 그 답에 동의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연을 가지지는 않았다. 잘못된 자동화 하나를 멈췄다고 해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또 하나의 자동화로 덮어서는 안 됐다.
청문회가 끝나고 메이는 손목의 금속 고리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여전히 남아 있었다. C-47의 일부 항목이 정정됐지만 남은 청구가 아직 최종 결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이 마지막 정산 심사예요.” 메이가 말했다.
“긴장돼요?” 수현이 물었다.
“네. 하지만 제가 제출한 자료를 읽고 결정할 거라고 했어요. 누군가 대신 죄송하다고 말해 주는 것보다 그게 더 좋아요.”
수현은 웃었다. “내일 끝나면 같이 밥 먹어요.”
“이번엔 제가 사겠습니다. 제 돈이 남으면요.”
“빚 문제 해결 뒤에 나오는 최고의 약속이네요.”
저녁에 루세는 제한적 비작동 검증 계획을 가져왔다. 제2권에는 물품의 출발점과 수신 확인을 구별할 수 있는 오래된 시험 도식이 있었다. 그는 마력이 없는 얇은 유리편과 두 개의 독립 기록판을 사용해 자료가 가리키는 판독 규칙이 같은 시설 안에서도 재현되는지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인체 이동과는 멀리 떨어진 시험이었다.
수현은 허가서의 열람 칸에는 서명했지만 시험 참여 칸은 비워 두었다.
시험실에는 두 명의 관리자가 교대로 서 있었다. 원래라면 경험 많은 직원 한 사람이 모든 위험 중단 장치를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간에 장치가 오작동했을 때 누가 중단을 요청하고 누가 확인할지를 미리 나누어 놓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수현은 그들이 적은 역할표를 보며 물었다. “두 분 중 한 분이 쉬는 날에는 어떻게 합니까?”
“대체 인력이 있어야 합니다.” 루세가 답했다.
“오늘 없으면요?”
“시험하지 않습니다.”
수현은 그 말을 듣고 미소 지었다. 왕도의 기술자들이 어느새 수현의 대답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수현은 이 말이 자기 생각이기 때문에 옳다고 여기지 않았다. 안전한 절차를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책임이 각 기관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시험실 바닥에는 오래된 기름 얼룩이 남아 있었다.
점검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루세는 수현에게 검토실 직원들의 질문을 보여 주었다. 그중에는 ‘중단권을 행사한 직원에게 인사상 불이익이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단순한 기술적 안전장치가 아니라 사람의 권리와 연결된 문제였다. 수현은 직원들과 함께 중단 사유를 기록하고, 중단 뒤에는 별도의 검토자가 다시 시작할지를 결정하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직원이 두려워서 정지 손잡이를 잡지 못한다면 손잡이는 장식에 불과했다.
나엘은 그 방안을 문서로 옮기면서 또 하나의 함정을 발견했다. 직원에게 중단 사유를 너무 자세히 요구하면, 급박한 순간 오히려 설명하느라 시간을 잃을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저 중단하고 나중에 사유를 적도록 순서를 바꾸었다. 한 문장 바뀐 것뿐이었지만 수현은 안심했다. 안전은 예쁜 보고서가 아니라 실제 긴급한 순간에 작동해야 했다. 한 직원이 천으로 닦으며 과거에는 장치의 접점을 고치다가 손을 데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새 계획에는 보호 장갑과 접점 냉각시간도 들어 있었다. 먼 세계와 연결될 문을 조사하는 동안 바로 눈앞의 손을 다치게 하지 않는 일. 수현은 이것이 연구의 수준을 보여 주는 더 솔직한 지표라고 생각했다. 시험을 지켜볼지 여부는 결과를 본 뒤 정하겠다고 말했다. 기술 검토실 직원이 잠깐 어리둥절해했지만 나엘이 웃으며 설명했다.
“빈칸이면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이 검토실에서는 이제 그렇게 씁니다.”
그날 밤 수현은 꿈에서 다시 서울 사무실 복도를 걸었다. 늘 누군가 서명을 받으러 왔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복도 끝에서 메이가 나타났다. 그녀는 손에 빈 서식을 들고 있었다. ‘안 하셔도 돼요’라고 말한 뒤 돌아섰다. 수현은 꿈속에서 이상하게 안심했다. 누군가의 거절을 존중받는 것이 그렇게 따뜻한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잠에서 깨자 창밖에 아직 달이 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만져 보았다.
그녀는 메이가 다음 날 정산실에서 어떤 질문을 할지 떠올렸다. 위로의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이미 메이는 자료를 정리했고 심사에 참석할 준비를 마쳤다. 수현이 할 일은 메이를 대신해 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이야기를 들어 줄 친구로 남는 것이었다. 작은 종이에 ‘식사는 꼭 하세요’라고 적었다가 웃으며 구겼다. 그런 말은 이제 메이가 자신에게 하게 됐다. 둘 사이에 도움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책상에 놓인 시험 허가서를 다시 봤다. 한 번의 동의를 모든 행동에 확대하지 않는 원칙, 설명을 듣고 철회할 수 있는 권리, 안전 문제 때문에 정지할 수 있는 사람. 예전의 수현이라면 이 모든 문구를 한 장의 안내문으로 정리했을 것이다. 이제는 누군가 그 문구를 실제로 지킬 시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사실까지 알았다. 차갑고 고요했다. 돌아갈 곳은 마음속에서 이미 분명했다. 남은 일은 그곳으로 사람을 안전하게 데려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뿐이었다.
제19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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