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회복소에서 온 편지가 도착했을 때 수현은 T-3 원장의 복사본을 읽고 있었다. 봉투 안에는 라비엔의 글씨가 아닌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다. 하나는 회복소 직원, 다른 하나는 라비엔 자신이었다. 그들은 야간 기록 협력 업무의 실제 시간 일부를 확인하는 합의서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제 다 끝난 걸까요?” 수현이 세드나에게 물었다.
“서류를 보세요. 시간 인정에 관한 중간 합의입니다. 숙식 공제와 잔여 보수는 아직 심사 중이에요.”
“그렇죠. 이름 옆에 완료 도장이 없는 게 오히려 안심되네요.”
편지에는 라비엔이 직접 적은 사연도 있었다. 오래전 원정대가 자신을 전출 처리했을 때 그는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했다. 회복소에서는 병실 기록을 도우며 살았고, 그 일을 자신이 선택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선택한 일을 했다고 해서 돈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회복소가 제공한 침대와 치료를 고마워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고마움이 모든 임금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라비엔은 이 문제를 정리할 때 일부 직원들이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권했다고 썼다. 그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당장은 아니었다. 북방에 익숙해졌고, 다리 치료를 이어받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자신의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일하고 싶었다.
“이제 제가 제 이름으로 다시 계약을 쓰는 게 무섭지 않습니다.” 편지 끝에 적혀 있었다. “다만 서명하기 전에 조금 더 읽는 사람이 되었을 뿐입니다.”
수현은 그 문장을 읽고 오래 웃었다. 카이렌은 계약서를 읽지 않고 영광이라고 생각했었다. 라비엔은 계약을 거부할 자유를 얻은 뒤 다시 계약을 읽고 있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변화가 하나의 문장에 담긴 것 같았다.
왕도에서 북방으로 보내는 답장을 쓰려던 수현은 잠시 멈췄다. 조언을 너무 많이 적고 싶었다. 치료비와 숙식비 공제, 소급 보수와 계약 종료 정산을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비엔은 이미 계약을 직접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간단히 썼다. '본인이 원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기록을 보존하는 쪽으로 진행하세요. 필요하면 계약 검토 범위에 한해서 도울 수 있습니다. 북방에 남으실지 여부는 누구에게도 대신 결정하게 하지 마세요.'
세드나는 주소를 확인하다 말했다. “이 편지에는 원정대 복귀 안내가 없네요.”
“그럴 필요 없으니까요.”
“오르카가 조금 아쉬워하겠군요.”
“아쉬워할 수 있죠. 그래도 선택은 라비엔 씨 거예요.”
오르카에게서도 편지가 왔다. 그는 라비엔의 거취가 결정된 뒤에야 마음을 편하게 놓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금은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기 편지를 받는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살지 고를 수 있다는 사실. 그 셋으로 충분한 날이 있다는 말이었다.
한편 제7원정대에서는 처음으로 카이렌이 없는 날 장비 점검을 끝냈다. 데런과 젠은 말 관리와 훈련 인원을 나누어 맡았다. 메이는 진료소의 야간 교대표를 승인받았다. 브레그는 원정대가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도 크게 칭찬하지 않았다. 다만 다음 달 보급 지원 예산에서 대체 인력 항목을 남겨 두었다. 그것이 그에게 가능한 방식의 인정이었는지도 몰랐다.
수현은 이 소식들을 읽다가 자기 방 창문을 열었다. 왕도의 저녁 공기는 여름비를 앞둔 듯 눅눅했다. 멀리 거리의 학생들이 흙탕물을 뛰어넘으며 웃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그런 광경이 모두 낯설었다. 이제는 사소한 날씨가 익숙했다. 그래서 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사실과 이 세계를 아끼게 되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했다.
“수현 씨.” 세드나가 문을 두드렸다. “북방 편지에 첨부된 계약서의 인장 중 하나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원본은 라비엔 씨가 가지고 있으니 우리에게 보낸 사본만으로 효력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확인했다는 사실과 유효하다는 결론을 나누죠.”
“언제부터 이렇게 쉽게 답하시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어렵게 답해도 일이 빨리 끝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두 사람은 웃었다. 그때 창밖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현은 편지 한 장이 젖지 않도록 책 속에 끼웠다. 라비엔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다. 비가 와도 글자가 지워지지 않도록 보관해 주는 것,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할 수 있는 길을 남기는 것, 원하지 않는 곳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지 않는 것.
다음 날 세드나가 돌아온 회신을 전해 줬다. 회복소의 담당자는 야간 기록 협력 시간 일부를 인정하겠다는 중간 결정을 당사자에게 직접 전달했다. 라비엔은 내용의 일부에 동의하고 나머지 숙식 공제 내역은 계속 이의 제기하기로 했다. 그는 편지 끝에 오르카에게 전해 달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
'네 방패는 내가 보관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앞으로 지켜야 할 사람들과 함께 써라.'
수현은 그 말을 보고 손을 멈췄다. 두 사람이 언젠가 다시 만날지 몰라도, 그들 사이의 약속은 이미 새로운 형태로 살아 있었다.
***
라비엔의 새 중간 합의는 북방 회복소에서 작은 논쟁을 낳았다. 기록 협력 업무를 맡는 사람이 원래 환자 신분으로 들어왔으니 숙식을 제공받은 만큼 보수를 줄여도 된다고 주장하는 직원이 있었다. 라비엔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계약서 첫 페이지와 실제 근무표를 나란히 놓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환자였죠. 하지만 기록실에서 야간 인계를 맡기 시작한 날짜는 다릅니다. 그때부터는 제가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치료도 제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치료 비용을 계산하는 일은 필요하겠죠. 하지만 치료받았다는 이유로 제가 일한 시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행정실장 베라는 그 말을 듣고 회의를 잠시 멈췄다. 회복소는 오래전부터 같은 방식을 써 왔다. 환자 가운데 몸이 회복된 사람에게 자잘한 일을 부탁하고, 그 대가로 식사나 침대를 계속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악의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업무가 길어지면 문제가 되었다.
라비엔은 자신이 원정대로 강제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인지도 분명히 확인하고 싶었다. 전출 계약의 정식 종료 통지와 회복소 기록 협력 계약이 서로 별개였다는 점이 이제야 조금씩 드러났다. 그는 회복소에서 계속 살고 싶었지만, 원정대에서 자신을 아직 대원으로 적어 놓았다면 언젠가 갑작스러운 출정 명령이 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베라가 말했다. “본인이 선택한 체류라는 점을 기록하겠습니다. 그러나 옛 전출 계약의 법적 효력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느 기관에서 확인해 줍니까?”
“왕립길드의 계약관리실입니다. 우리가 보낼 자료와 본인이 제출할 의견을 분리해 처리하죠.”
라비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담당자가 알아서 적어 주길 기다렸을 것이다. 이번에는 스스로 의견서에 서명했다. 자신이 북방에 머무르기로 한 이유, 근무 시간을 정산받고 싶다는 요구, 예전 전출 통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각각 적었다.
그날 오후 오르카에게 편지가 왔다. 편지에는 오래전에 같이 훈련했던 부대의 소식이 있었다. 젠이 새 정찰 계획을 만들고 카이렌이 정식으로 쉬는 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도 있었다. 라비엔은 그 편지를 읽다가 웃었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돌아오라고 하던가요?” 베라가 물었다.
“아뇨. 잘 지내느냐고 물었어요.”
“그러면 답장은 뭐라고 쓰실 겁니까?”
“여기서 잘 지낸다고요. 그리고 숙식비 공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쓸 겁니다.”
베라는 웃었다. 기록 협력 업무가 길드 전체의 문제처럼 복잡해지는 게 달갑지는 않았겠지만, 당사자가 분명히 말해 주는 덕에 정리할 길도 생기고 있었다.
며칠 뒤 회복소의 야간 기록실에서는 교대 방식에 관한 모임이 열렸다. 라비엔은 환자로 지내는 사람에게 업무를 부탁할 때는 먼저 그 사람이 치료 중인지, 원해서 하는지 확인하는 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디 간호 총괄은 환자에게 일을 강요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서도 현실에서 그 경계가 흐려질 수 있음을 인정했다.
“갑자기 기록 인력이 부족하면 부탁할 사람이 한정됩니다.” 주디가 말했다.
“그래도 부탁을 거절했다고 치료를 못 받게 해서는 안 되죠.” 라비엔이 답했다.
주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병실 앞에는 기록실 업무 지원이 자발적인지 확인하는 짧은 안내문이 붙었다. 정식 근무를 시작하는 사람은 숙식 제공과 보수를 분리해 설명받기로 했다. 제도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과거의 관행을 무조건 옳다고 여기지는 않게 되었다.
왕도에서 이 소식을 들은 수현은 라비엔이 더 이상 자신을 피해자로만 설명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는 피해를 겪었을 수 있었고, 동시에 현재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두 사실은 모순되지 않았다.
수현은 오르카에게 편지를 보냈다. 라비엔의 정산 심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북방 체류도 본인의 뜻이라는 점을 알렸다. 오르카는 답장에서 말했다. '라비엔이 어디에 있든, 이제 그의 이름으로 된 편지가 도착한다는 사실이 좋습니다.'
수현은 종이를 읽고 마음속으로 답했다. 자신도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곳에 남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결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
라비엔은 새 계약의 시안을 받아 들고 처음으로 자신에게 휴일이 몇 번 있는지 세어 봤다. 북방의 겨울은 길었다. 눈이 막히면 일터를 떠날 수 없다는 이유로 휴일이 사라지곤 했다. 이번 시안에는 악천후로 이동하지 못하는 날의 업무와 대기 시간을 어떻게 구분할지 적혀 있었다. 그는 무턱대고 서명하지 않았다. 베라에게 이해하지 못한 문장의 뜻을 물었고, 필요한 수정을 요청했다. 회복소는 모든 요구를 즉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대신 다음 심사 날짜를 정해 답하겠다고 했다. 라비엔은 서류를 접어 자기 가방에 넣었다. 손에 쥔 것은 아직 완성된 계약이 아니었지만, 자신이 읽고 선택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오르카에게 보내는 답장에는 조용한 농담을 적었다. '너도 다음번 계약서는 끝까지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북방에서 내려가서 읽어 줄 수밖에 없다.' 오르카는 그 편지를 받고 한참 웃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날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이제 같은 서류의 다른 칸에 갇혀 있지 않았다.
수현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을 놓았다. 라비엔의 임금과 숙식 공제는 여전히 심사 중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일할 조건을 스스로 검토할 수 있게 된 것은 별도의 성과였다. 그가 어디에 있든 그 권리를 잃지 않았으면 했다.
***
북방에서 라비엔은 저녁 종이 울린 뒤 기록실 문을 닫았다. 예전 같았으면 누군가 급하다고 부르면 다시 들어가 일했을 것이다. 오늘은 야간 담당자가 따로 있었고, 자신의 업무 종료가 장부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난로 앞 의자에 앉았다. 다친 다리를 뻗자 오래된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계약 협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일하지 않는 시간도 기록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베라는 그에게 말했다. “다음 계약에는 밤 근무의 시작과 종료를 구체적으로 적겠습니다.” 라비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가 아플 때 일을 못한다고 벌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넣어 주세요.” 베라는 당황한 얼굴로 웃다가 메모했다. 라비엔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안심했다. 예전에는 자기 몸의 아픔마저 계약서 밖에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그 역시 이야기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그는 오르카에게 새 편지를 썼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만 반복하지 않았다. 북방의 작은 시장과 겨울 난로, 새로 배운 장부 정리 방법을 적었다.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문장이 계약 종료 통지보다 길어지는 것이 기뻤다.
***
다음 날 라비엔의 새 업무표에 작은 변화가 하나 더 생겼다. 비상 연락을 받을 사람과 평소 업무 담당자가 구분된 것이다. 단순한 두 칸이었지만 그는 오래 바라보았다. 예전엔 누군가 자신을 부르면 무조건 가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은 누가 왜 부르는지 묻고 자신의 상태를 말할 수 있었다. 회복소는 여전히 추웠고 서류는 복잡했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는 북방에 남겠다는 선택을 다시 한 번 조용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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