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엔이 받았던 가장 이상한 급여명세서는 한 달치 임금이 모두 숙식비로 사라진 종이였다.
그녀는 북방 회복소의 작은 책상 앞에 앉아 그 종이를 다시 펼쳤다. 한때는 자기에게 치료가 필요했으니 비용을 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록 협력 업무를 시작한 뒤에도 별도의 계약과 공제 항목을 제대로 설명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제가 먹은 식사는 계산하셔도 돼요. 그런데 일하면서 밤새 머무른 대기실 비용을 제 숙박으로 적은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베라 행정실장은 명세서를 살피며 말했다. “그때는 회복 대상자와 기록 협력자를 같은 장부에 넣는 방식이었습니다.”
“방식이 그랬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방식이 맞다는 뜻인가요?”
베라는 잠깐 말이 없었다. 라비엔은 더는 상대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 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자신의 근무와 치료에 대한 정확한 구분이었다.
오르카는 옆에 앉아 있었지만 먼저 끼어들지 않았다. 라비엔이 요청해서 참석한 면담이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옛 동료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르카에겐 큰 기쁨이었지만, 그 기쁨이 라비엔의 계약을 대신 정리할 권리를 주지는 않았다.
“밤 열한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 기록을 정리한 날도 있습니다.” 라비엔이 계속했다. “그런 날에는 숙식비를 공제하면서 동시에 업무 대기 수당을 주지 않았어요. 그 둘을 분리해 주세요.”
베라가 한 장을 더 꺼냈다. 기록 협력 업무의 시간표였다. 일부 날짜에는 업무량이 남아 있었지만 근무 종료 확인이 없었다. 라비엔은 자신이 적어 둔 메모를 보여 줬다. 매일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몇 주 동안의 야간 기록이 있었다.
“이 기록은 원본인가요?”
“제가 쓴 겁니다.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회복소 장부와 대조해 달라는 뜻입니다.”
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양쪽 자료로 가능한 근무 시간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직 최종 지급액은 결정할 수 없고요.”
“알겠습니다.”
라비엔은 예상보다 쉽게 대답했다. 불확실한 상태로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모든 걸 한꺼번에 끝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한 번에 모든 명예를 되찾는 일이 아니었다. 자기 이름으로 남은 일을 자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자리였다.
***
면담이 끝난 뒤 오르카는 회복소 정원에서 라비엔과 나란히 걸었다. 라비엔은 다리가 불편해 오래 걷지 못했고, 오르카는 왼팔에 아직 무거운 방패를 들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두 사람 다 그런 모습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이상하지?” 라비엔이 말했다. “방패를 들던 사람이 이제 종이만 들고 있어.”
“나는 아직도 방패가 무겁다.”
“그걸 누군가 들었다가 ‘너한테는 무리야’라고 하면 화나지?”
“응.”
“나도 그래. 내가 다시 원정대에 돌아갈지 여기에 남을지는 내가 정하고 싶어.”
오르카는 그녀를 보았다. “알아. 그래서 묻지 않잖아.”
라비엔이 웃었다. “옛날엔 넌 내게 묻지도 않고 마차부터 불렀을 거야.”
“그땐 그랬을 수도 있지.”
그들은 벤치에 앉았다. 라비엔은 옛날 일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라고 털어놓았다. 부상을 입은 뒤 회복소에 오게 된 경위 중 일부는 문서로만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특별 전출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보호 대상이라 적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실제로 선택한 부분과 다른 사람이 선택한 부분은 분리되어야 했다.
“여기 남는 건 네가 바라는 일이야?” 오르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그래. 아직 몸이 회복 중이고 이곳의 기록을 정리하는 일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해. 다만 계약을 새로 쓴다면 대가를 정확히 알고 서명하고 싶어.”
“그럼 나도 그 결정을 존중할게.”
“네가 종종 와 주면 좋겠어.”
“그건 내 결정으로 할 수 있지.”
둘은 웃었다. 오르카는 돌아갈 때 라비엔의 옛 방패를 다시 가져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함께 걸을 수 있는 거리만큼 천천히 걸었다.
***
회복소 계약을 다시 쓰기 전 라비엔은 제7원정대에 보낼 인사말을 적었다. 처음에는 ‘돌아갈 수 없어 죄송하다’고 썼다가 그 문장을 지웠다. 왜 죄송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원정대가 그녀의 집이었던 시절은 소중했지만 지금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르카가 곁에서 말했다. “왜 자꾸 지우는 거야?”
“그냥, 누군가 기다렸을까 봐.”
“기다렸어. 그런데 기다린 사람의 마음이 네 결정을 대신하진 못하지.”
라비엔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뭐라고 시작해야 할까?”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부터 말해 줘.”
라비엔은 한참 생각한 뒤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저는 지금 북방 회복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몸은 조금씩 나아지고, 기록 정리 업무도 제가 정한 시간 안에서 맡고 있습니다.’
그 문장을 쓰자 어깨에 있던 짐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튿날 그녀는 회복소 기록실에서 자신의 첫 출근 기록을 다시 확인했다. 기록에는 ‘협력 인원’이라고 적혀 있었고 지급 금액은 ‘보존 지원’으로 표시돼 있었다. 베라가 그 뜻을 설명했다.
“당시엔 의료 회복 대상에게 별도 임금을 지급할 규칙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원금 명목으로 예산을 잡았죠.”
“그럼 제게 지급된 것이 임금이었는지 지원금이었는지부터 정해야겠네요.”
“그렇습니다. 그 돈이 치료비에 자동 충당된 이유도 검토해야 합니다.”
라비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보았던 급여명세서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자신이 일을 못 해서인지, 일을 했지만 돈이 다른 항목으로 넘어갔기 때문인지 이제 구분할 수 있었다.
옆에서 듣던 노엘 간호사가 말했다. “저도 비슷한 적 있어요. 야간에 추가로 환자를 봤는데 나중에 교육 참석으로 처리됐어요.”
“왜요?”
“어떤 장부를 써야 하는지 몰랐대요. 그랬더니 교육 수당만 지급됐죠.”
라비엔은 노엘과 마주봤다. 문서가 다르다는 이유로 일한 사실이 사라지는 문제는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도 정정할 수 있는지 물어보세요. 그날 누구를 치료했는지는 개인 정보 때문에 공개하지 않더라도 근무 시간은 따로 확인할 수 있잖아요.”
노엘이 웃었다. “라비엔 씨가 이제 저희에게 서류를 가르쳐 주네요.”
“여기 와서 배운 게 많으니까요. 다만 제 업무도 아직 다 해결된 건 아니지만요.”
그들은 기록실에서 함께 오래된 교대 문서를 찾았다. 무릎이 아파 오래 서 있기 힘든 라비엔은 의자에 앉아서 목록을 읽었고, 노엘은 높은 선반에서 서류를 꺼냈다.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 할 수 있는 일을 나눴다.
***
그날 저녁 회복소 정원에서는 작은 차 모임이 열렸다. 퇴직을 앞둔 행정 직원이 다과를 가져왔고, 몇몇 환자가 바깥 공기를 쐬러 나왔다. 라비엔은 처음엔 어색하게 서 있다가 오르카에게 자리를 권했다.
“예전엔 부대 안에서 이런 자리에 있으면 항상 다음 출정을 걱정했어.”
“나도 그랬지.”
“지금은 내일 근무가 있으면 내일 근무가 있는 거고, 쉬는 날이면 쉴 수 있다는 걸 배우는 중이야.”
오르카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카이렌도 비슷한 걸 배우고 있대.”
“용사가 휴가를 쓴다고?”
“응. 처음엔 본인이 가장 놀랐대.”
라비엔은 소리 내어 웃었다. 전쟁터를 떠올리면 아직 마음이 저릴 때가 있었지만,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기뻤다.
“수현 씨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라비엔이 문득 물었다.
“아직 몰라.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것 같아.”
“우리는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 있잖아. 그분은 고향을 떠나온 채로 계속 기다리는 거네.”
오르카는 대답하지 못했다. 라비엔은 잠시 찻잔을 내려다봤다. 자신도 한때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밤마다 잠을 설쳤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과 그 사람을 붙잡는 마음이 서로 얼마나 쉽게 헷갈리는지 알았다.
“그분이 돌아가더라도 여기서 배운 걸 잊지 않을 거야.” 라비엔이 말했다.
“우리도 잊지 않겠지.”
라비엔은 편지를 마무리했다. ‘저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제 이름으로 계약서를 읽고 제 선택으로 여기에 남겠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서명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 오래전에 남이 대신 적어 둔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쓴 이름이었다. 라비엔은 천천히 글씨를 남겼다.
서명한 종이를 접을 때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라비엔은 정원의 벤치에서 잠시 자기 다리를 내려다봤다. 예전의 속도로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이 때로는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움직임이 느려졌다고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르카가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말했다. “길이 너무 멀었나?”
“아니. 그냥 예전엔 어디든 먼저 뛰어갔는데.”
“그럼 앞으로는 내가 네 걸음에 맞출게.”
“항상 그럴 필요 없어. 네가 가야 할 곳이 있으면 먼저 가도 돼.”
오르카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너랑 걷기로 내가 정했어.”
라비엔은 웃음을 터뜨렸다. 상대가 불쌍해서 속도를 줄이는 것과 함께 걷고 싶어서 속도를 맞추는 건 달랐다. 그 차이가 고마웠다.
그녀는 자신의 보행 속도보다 계약서를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사실에 조금 위안을 얻었다. 지금은 스스로 선택한 곳에 머물 수 있었다.
북방에서 왕도로 보내는 편지에는 늘 통신 지연이 있었다. 라비엔은 수현에게 자신이 검토 중인 계약의 요지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개인 의료정보나 자세한 주소는 쓰지 않았다. ‘기록 협력 업무시간 일부가 인정됐고, 숙식 공제는 재심사 중입니다. 북방에 남겠다는 선택은 제가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었다.
‘저를 찾으러 온 분들이 많았지만, 찾아냈다는 이유로 데려가려 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게 고마웠습니다.’
편지를 봉투에 넣으면서 라비엔은 예전에 원정대로 보내다 반송됐던 편지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자기 소식이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고 느꼈다. 지금은 연락받을 사람이 있었다. 문서의 도착과 사람의 수령이 다르다는 말을 수현에게 들은 뒤로, 그녀는 편지에도 확인란을 하나 더 붙였다.
‘수령하셨다면 답장 한 줄만 부탁합니다.’
그 작은 요청이 라비엔에게는 커다란 변화였다.
그날 오후 회복소에서는 야간 근무표를 다시 만들었다. 젊은 간호사 노엘이 무리한 교대를 버티다가 손이 떨린다고 고백했고, 주디 간호 총괄은 한밤중 긴급 호출 담당을 두 명으로 나누었다. 라비엔은 기록 보조를 맡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치료 일정에 맞는 시간 안에서만 하겠다고 조건을 달았다.
“예전엔 무조건 하겠습니다, 라고 먼저 말했을 텐데요.” 주디가 웃었다.
“그런 말을 했던 제가 결국 여기서 쓰러졌으니까요.”
“그럼 오늘은 교대 두 번만 맡아 주세요. 쉬는 시간도 반드시 넣겠습니다.”
라비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한계를 말하는 게 누군가에게 일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왕도의 수현이 그 편지를 받은 건 며칠 뒤였다. 그녀는 남부 관제실에서 E-17 후속 기록을 읽다 말고 봉투를 열었다. 익숙한 라비엔의 글씨가 보이자 표정이 밝아졌다.
“좋은 소식인가요?” 세드나가 물었다.
“네. 돈 문제는 아직 안 끝났지만,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수현 씨가 대신 찾아갈 일은 아니겠네요.”
“맞아요. 그래도 그분이 스스로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기쁘네요.”
수현은 짧은 답장을 적었다. ‘수령했습니다. 라비엔 씨가 원하는 방식으로 정산받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기록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당사자의 선택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녀는 잠깐 펜을 멈췄다. 원래 세계에선 의뢰인에게 사건 종료 통지를 보낼 때가 있었다.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은 계속 자기 삶을 살아간다. 라비엔에게도 그런 순간이 왔다. 수현이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아도 되는 시간.
수현은 창밖을 보았다. 자신 역시 언젠가 떠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떠나도 남아 있는 이들이 자기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처음 여기서 했던 약속과 같았다.
그때 루세가 기록실 문을 열었다. “수현 씨, 남부 관제실에서 새로운 원장이 왔습니다. 정지 확인의 **최종 출력 표식**에 관한 거예요.”
수현은 라비엔의 편지를 조심히 접었다. 한 사람의 계약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고 있었고, 다른 사람의 귀환 문제는 아직 멀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는 모든 일이 한꺼번에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죠.”
수현은 원장 앞에 앉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출력했다’는 말이 뭘 뜻하는지부터 묻겠습니다.”
제17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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