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렌은 휴가 신청서를 다섯 번째로 읽었다.
문제가 있는 건 내용이 아니라 자기 손이었다. 자신의 이름 뒤에 ‘휴식’이라는 말을 적을 때마다 손이 굳었다. 마물과 싸우는 건 익숙한데 하루를 쉬겠다는 서류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대장, 거기 뭐 쓰세요?”
데런이 마구간 문턱에 기대 물었다. 카이렌은 황급히 종이를 뒤집었다.
“별거 아니다.”
“또 휴가 계획서예요?”
“또라니.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는 세 번이나 고쳐 쓰셨잖아요.”
카이렌은 반박하지 못했다. 데런은 웃으며 말먹이를 확인했다.
“이번엔 낙타처럼 오래 버티는 계획 세우지 마세요. 쉬는 날이면 쉬어야죠.”
카이렌이 억울하게 말했다. “나는 쉬는 날도 순찰로 마을이 안전한지….”
“그걸 저랑 젠이 맡는다고 이미 정했잖아요.”
카이렌은 종이를 다시 펼쳤다. ‘휴식 시간 중 원정대 소집 시 즉시 복귀.’ 그 문장을 지웠다. 정말로 긴급한 상황이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지만, 모든 일을 자신이 맡겠다고 적어 놓으면 휴가는 이름뿐이었다.
그때 상급 감독관 브레그의 전령이 찾아왔다. 북쪽 협곡에서 마물 흔적이 발견됐으니 용사가 직접 정찰하라는 명령이었다. 카이렌은 예전 같았으면 갑옷부터 집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질문부터 했다.
“흔적의 규모는?”
“아직… 확인 중입니다.”
“마을에 피해는?”
“없습니다.”
“현장 정찰을 맡은 인원은?”
“그게 대장님으로….”
카이렌은 전령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 잠시 듣고 나서 원정대의 새 정찰 기준표를 꺼냈다. 위험 단계에 따라 궁수 두 명이 원거리 흔적을 확인하고, 주민 대피가 필요한 경우에만 전원이 움직이도록 정한 규칙이었다.
“먼저 젠에게 이 표대로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저는 의료 휴식 중입니다. 위험이 바뀌면 새 판단을 하겠습니다.”
전령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를 봤다.
“용사님이 명령을 거절하신 겁니까?”
“명령의 목적을 수행할 방법을 확인한 겁니다.”
“브레그 감독관님이 화내실 텐데요.”
“그럼 감독관님과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에도 카이렌의 가슴은 빠르게 뛰었다. 싸움 앞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긴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 된 건 아닌지 순간적으로 의심했다. 그런데 데런이 마구간 안쪽에서 손뼉을 한 번 쳤다.
“잘하셨어요.”
“그 말은 왜 하는데?”
“처음으로 대장님이 우리한테 일을 믿고 맡기셨으니까요.”
***
젠은 그날 오후 두 명의 궁수와 협곡 끝에 다녀왔다. 마물의 흔적은 최근 것이 아니라 며칠 전에 남은 자국일 가능성이 높았고, 마을과는 반대쪽으로 이어졌다. 정찰 기록에는 관찰 위치와 시각, 직접 본 것과 추정한 것을 따로 적었다.
브레그가 보고를 받고도 카이렌을 불렀다.
“네가 직접 갔으면 더 빨랐을 텐데.”
카이렌은 고개를 들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현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으니 다른 대원들이 맡았습니다.”
“용사가 앞에 서야 사기가 올라간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일까지 제가 전부 하면, 제가 없는 날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브레그는 잠시 굳었다. 카이렌도 자신이 이런 말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가르쳤나?”
“이수현 씨가 질문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꼭 저만 해야 하냐고.”
“그 여자는 이미 계약이 끝났잖아.”
“그래서 지금은 제가 생각합니다.”
카이렌은 괜히 웃음이 났다. 수현이 있었다면 ‘그 말은 참 잘하셨네요’ 하고 놀렸을 것이다. 브레그도 더는 출정 명령을 강행하지 않았다. 대신 정찰 기준을 다음 평가회의에서 검토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카이렌은 리벨 의사를 찾아갔다. 자신이 열람해 왔던 K형 안정 장치 기록 가운데 개인 진료기록과 장비 재고표가 뒤섞인 부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리벨이 신중하게 말했다. “아직도 궁금한 게 많겠죠.”
“네. 그런데 이번엔 어디까지 볼지 먼저 정하려고 합니다.”
“좋습니다. 오늘은 첫째 날의 체온표와 둘째 날의 치료실 대기 기록까지만 보죠. 세 번째 날의 봉인 자료는 나중에 결정하세요.”
카이렌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풀리는 걸 느꼈다. 이전에는 모르는 걸 모두 알아야만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떤 기록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오래된 상처를 다시 만들 수도 있었다.
첫째 날의 체온표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낮았다. 장비 관리표에는 K형 고리 한 개가 ‘대기 상태’로 적혀 있었다. 리벨은 장비 대기가 실제 착용을 뜻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설명했다.
“그럼 제 손등의 흰 자국과도 관련이 없습니까?”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피부 상태만으로 당시 장치의 사용을 판단하기는 어려워요.”
카이렌은 천천히 끄덕였다.
“제 기억은 사흘이 비어 있습니다. 그 안에 중요한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아팠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리벨은 준비해 둔 봉인 기록을 다시 닫았다. 누군가에게서 그 결정권을 빼앗지 않았다.
***
야영지로 돌아오는 길에 카이렌은 신병 두 명이 훈련장을 정리하는 모습을 봤다. 그중 한 명은 발을 절고 있었다. 카이렌은 다가가 이름을 물었다. 신병은 벌떡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대장님! 괜찮습니다.”
카이렌은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 자신도 똑같은 말을 했다.
“괜찮으면 걸어 봐.”
신병이 두 걸음 걷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픈데?”
“조금만….”
“조금 아픈 게 쉬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아니지.”
카이렌은 신병을 진료소로 보냈다. 그리고 정리 업무는 다른 대원에게 넘기도록 했다. 그는 자기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게 여전히 어색했다.
휴가를 신청한 다음 날 카이렌은 정찰 보고서의 빈칸 하나를 발견했다. 협곡에서 돌아온 궁수의 보고서에 마물 흔적 위치는 적혀 있는데 안전 철수 기준이 없었다. 이전 같았으면 ‘마물은 내가 처리하겠다’고 적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젠을 불렀다.
“철수 기준을 왜 안 썼어?”
젠은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한 건 줄 알았습니다. 위험하면 돌아오는 거죠.”
“얼마나 위험할 때?”
“음, 적이 셋 이상이면요?”
“정찰하러 간 사람은 그 셋을 어떻게 세지? 그림자만 보여도 공격할 수 있잖아.”
젠은 잠깐 말이 없었다. 카이렌이 옆에 앉아 보고서를 함께 고쳤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구간에서는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동료의 부상 또는 통신 두절이 발생하면 즉시 귀환한다. 현장에서 판단하기 어려운 사항은 거짓으로 확정하지 않고 ‘미확인’으로 기록한다.
“대장님, 이건 전투보다 쓰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겠어요.”
“그래도 다음에 정찰하는 사람에겐 도움이 되겠지.”
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때 카이렌만큼 무모하게 앞장서는 사람이 좋은 전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엔 누군가 위험을 정확히 적어 주는 일이 남의 목숨을 지키는 또 다른 방법이라는 걸 배웠다.
두 사람이 기록을 마치기도 전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훈련장 지붕의 낡은 밧줄이 끊어져 목재가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아무도 그 아래에 없었다. 하지만 훈련병 하나가 목재를 치우려다가 손을 다쳤다.
카이렌은 반사적으로 뛰어갔다. 예전 습관대로 직접 나무를 들어 올리려다 멈췄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도 안전한 방법인지부터 살펴야 했다.
“사람들부터 밖으로 빼. 데런, 목재가 더 떨어질 수 있는지 확인해 줘. 젠, 진료소에 부상자를 보내고.”
대원들이 각각 움직였다. 카이렌은 상황을 정리한 뒤에야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부수지 않고도 사고를 처리했다는 걸 깨달았다.
데런이 말했다. “대장님, 이번엔 검 안 뽑으셨네요.”
“나무랑 싸울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이제 아셨다니 감동입니다.”
카이렌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러고는 책임자에게 훈련장 지붕의 보수 예산을 요청했다. 지난번에도 같은 밧줄이 닳았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수리 일정에서 밀린 상태였다.
“훈련은 계속해야 합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안전한 장소로 옮겨서 하죠.”
“예산을 받기 전엔 마땅한 곳이 없습니다.”
“그럼 오늘은 교실 훈련을 합시다. 현장 판단과 철수 신호를 배우면 됩니다.”
담당자는 황당해했지만 막을 이유가 없었다.
***
카이렌은 그날 오후 자신이 늘 맡았던 ‘용사의 전투 시범’ 대신 정찰 실패 사례를 이야기했다. 젊은 대원들은 처음엔 실망한 얼굴이었다. 영웅의 검술을 보러 왔는데 서류와 철수 이야기를 듣게 됐으니까.
카이렌은 훈련생들에게 물었다. “정찰 중 동료가 다쳤다. 마물은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나?”
한 대원이 주저 없이 말했다. “마물을 찾아 죽이겠습니다.”
“그동안 다친 동료는?”
“다른 사람이….”
“누가?”
대원은 말을 잃었다. 카이렌은 화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자신도 예전에는 같은 답을 했을 것이다.
다른 훈련생이 손을 들었다. “부상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마물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보고하겠습니다.”
“좋은 답이다. 그리고 그 일을 몇 명이 맡을지도 정해야겠지.”
카이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화려하지 않은 전투 기술을 가르쳤다. 안전하게 돌아오는 방법이었다.
훈련이 끝나자 신병 하나가 물었다. “용사님은 정말 두렵지 않으세요?”
카이렌은 잠시 생각했다.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런데 전에는 두려운 걸 숨겨야 용사인 줄 알았어. 지금은 그걸 숨기면 동료들이 내 판단을 믿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신병의 표정이 바뀌었다. 멋있다고 감탄하는 얼굴이 아니라 이해하려 애쓰는 얼굴이었다. 카이렌은 그쪽이 더 기뻤다.
그날 밤 그는 수현에게 편지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대신 일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건, 제 일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더군요. 제 일이 무엇인지 조금 더 정확하게 알게 됐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날 밤 원정대는 당번표를 다시 만들었다. 야간 경비가 길어지면 다음 날 아침 훈련을 조정하고, 긴급 출정 기준은 두 명 이상이 확인하기로 했다. 메이는 치료 인력 교대 계획을 들고 와 수정할 부분을 직접 말했다. 데런은 말 돌보는 시간이 출정 전 준비 시간에도 포함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에는 누군가 하나를 끌어안고 감당하던 일들이 이제 작은 논쟁 속에서 나뉘었다.
브레그가 찾아와 말했다. “운영이 복잡해졌군.”
카이렌이 대답했다. “예전에도 복잡했습니다. 다만 제가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독관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는 당번표에 자신의 확인을 남겼다.
밤 훈련이 끝난 뒤 젠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대장님, 다음 정찰도 제가 맡아도 됩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러면 위험한 상황에서 철수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제가 정하겠습니다.”
카이렌은 잠시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는 것과 그 사람의 판단을 믿는 것은 달랐다. 자신에게 불리해 보여도 젠의 현장 판단을 우선할 수 있을지 스스로 물었다.
“좋다. 다만 네가 본 정보와 철수 사유는 보고해 줘. 내가 네 판단을 이해할 수 있게.”
“그 정도면 됩니다.”
젠이 웃었다. “솔직히 대장님이 ‘끝까지 싸워라’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 말만 하던 때가 있었지.”
카이렌은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자신이 옛날보다 덜 위대한 사람이 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들이 더 믿음직해졌다.
숙소로 돌아온 카이렌은 첫 번째 휴가 신청서와 두 번째 신청서를 나란히 놓았다. 처음 문서에는 ‘원정대 필요 시 언제든 복귀’가 남아 있었지만 새 문서에는 ‘응급 소집 기준 적용, 일반 업무 대체자 확인’이 적혀 있었다. 그 차이가 전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카이렌은 수현에게 보낼 짧은 편지를 썼다.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쉬려고 합니다. 정찰도 젠이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원정대가 저 없이도 잘 굴러가서 조금 서운했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쓰다가 그는 멈췄다. 수현이 돌아갈 세계에는 자기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가 떠난 뒤에도 원정대가 살아 움직여야 했다.
그는 편지 마지막에 덧붙였다.
‘수현 씨가 저희 대신 지켜 줄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직접 지킬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종이를 접고 나자 길고 낯선 밤이 시작됐다. 아무 명령도 없고 누가 깨우지도 않는 밤. 카이렌은 갑옷을 벗고 잠자리에 누웠다. 잠들기 전 문득 흰 고리 흉터가 보였지만 이번엔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내일 확인할 것은 내일 확인해도 됐다. 오늘은 충분히 쉬는 것이 할 일이었다.
제1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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