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을 열람하는 날, 남부 회선 관제실의 시계가 멈췄다.
수현은 계단을 오르다가 바늘이 같은 곳에 붙어 있는 걸 봤다. 전날에는 제대로 움직이던 시계였다. 하필 오래된 수신 시각을 조사하는 날이라니, 타이밍이 지나치게 좋았다.
“설마 또 시계 교정값 문제인가요?”
루세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태엽이 풀렸습니다. 아주 평범하게요.”
“평범한 고장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세드나가 시계를 기록장에 적었다. 오늘 열람 시각을 그 시계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계가 멈췄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멈춘 기계를 기준으로 다른 사건의 시간을 쓰지 않는 일이었다.
금고 앞에는 코르빈과 새벽 당직 책임자 베넬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열쇠를 확인한 뒤 봉인의 표면을 살폈다. 수현은 곁에서 열람 승인 범위를 다시 읽었다. E-17에 관련된 수신·전달·중단 항목. 다른 직원의 의료 기록과 가족 주소는 가림 처리. 원본 필기 금지. 필요한 문장은 감독 아래 별지에 옮겨 적기.
“이렇게까지 하면서 왜 보시는 겁니까?” 베넬이 물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나중에 보고서가 믿을 만해지니까요.”
원장 표지는 가죽이 아니라 얇은 금속판이었다. 종이를 꺼내면서 손이 흔들릴까 봐 수현은 일부러 두 걸음 뒤에 섰다. 루세가 먼지 상태와 온도를 확인하고, 코르빈이 장갑을 끼고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 사이엔 색이 다른 얇은 띠가 끼워져 있었다.
“왜 두 색이죠?”
“붉은색은 긴급 중단, 회색은 자동 이관입니다.”
“그런데 그날 두 개가 붙어 있네요.”
코르빈이 멈칫했다. E-17 항목 바로 위에 붉은 띠와 회색 띠가 한데 묶여 있었다. 당시에는 긴급 상황이면 중단 봉투와 이관 봉투를 한꺼번에 부칠 수 있었다는 설명이 따라왔다.
“잠깐만요.” 세드나가 말했다. “묶어 보관한 것과 함께 수령했다는 것은 다릅니다.”
“맞습니다. 묶음 작업이 나중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어요.”
수현은 낯선 글씨를 한 줄씩 읽었다. ‘E-17. 중앙 야간 인계실 발신. 수신함 S-4. 접수 표식 유.’ 다음 줄은 ‘급행 분기 대기.’ 여기까진 앞서 확보한 기록과 같았다.
그 아래에는 처음 보는 문구가 있었다. ‘수신 대행란: 공석 대체.’
“공석 대체라니요?”
베넬이 설명했다. “정식 수신인이 자리를 비우면 그 직책의 업무를 맡은 사람이 대리로 서명합니다. 담당자의 이름이 아니고 직책만 적힌 거죠.”
수현이 바로 물었다. “그럼 대행자가 누구인지 표시한 다른 기록도 있습니까?”
“인사 배치표에 있을 겁니다.”
“배치표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겠죠?”
베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따로 확인해야죠.”
수현은 숨을 고르며 원장의 오른쪽을 봤다. 작은 사각 도장이 찍혀 있었다. ‘도착’. 그 아래 실제 서명란에는 사람의 이름 대신 획 두 개가 있었다. 글씨가 지워진 것인지, 원래 약호였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도착한 건 봉투입니까, 지시가 이해됐다는 확인입니까?”
코르빈이 말했다. “당시엔 그냥 수신함까지 왔다는 뜻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 도장으로 정지 명령이 실행됐다고 쓴 후대 보고서는 잘못됐을 수 있겠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장의 빈 칸만 보고 실행이 안 됐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수현은 그 말도 받아 적었다. 그녀가 원하는 진실은 어느 방향으로든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오게 된 밤에 실제로 무슨 조치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단계를 하나씩 밟는 일이었다.
***
그날 수신 원장을 읽던 수현은 종이 끝에 아주 작은 점 세 개가 찍힌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오래된 곰팡이 자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페이지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점이 있었다.
“이건 무슨 표시죠?”
코르빈이 돋보기를 들었다. “수신 봉투를 실제로 열었는지를 구분하는 구형 표식일 수 있어요. 그 당시에 사용한 교육서를 확인해야 합니다.”
수현은 먼저 페이지를 넘기지 말자고 했다. 작은 표시를 제대로 대조하기 전에는 그 부분을 문질러서 지울 위험이 있었다. 루세는 비파괴 조명을 비춰 점의 모양을 사진 대신 별도 검사서에 그렸다.
교육서에는 점 두 개와 점 세 개가 서로 다른 뜻으로 나왔다. 두 개는 ‘수신함 봉인 확인’, 세 개는 ‘개봉 대기’. 그러나 자료는 다른 연도 판본이었다. 수현이 실망한 얼굴을 하자 루세가 어깨를 으쓱했다.
“옛 기계를 연구하면 늘 이런 일이 있습니다. 같은 그림이 다른 뜻을 가질 때가 있죠.”
“누가 이런 표준을 만든 거예요?”
“처음 만든 사람이 죽고 나서 세 번쯤 다시 고친 사람들이요.”
수현은 웃음을 참았다. 소프트웨어 버전이 달라진 문서를 확인하던 서울의 기억이 떠올랐다. 프로그램에선 버전 번호가 맞지 않으면 오류라도 났다. 여기선 장부가 조용히 잘못된 뜻으로 읽혔다.
코르빈이 이전 관리자의 인계 교육표를 찾아 왔다. 그 표에는 ‘구판 표식은 신판에 임의 대응하지 말 것’이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신입 교육 자료에는 오래된 표식을 신형 표식으로 바꿔 설명하는 도표가 있었다. 교육 내용을 간단히 만들려다 예외를 지워 버린 셈이었다.
“그때 신입 직원들도 이렇게 배웠을까요?” 수현이 물었다.
“확실하지 않습니다. 당시 실습 기록이 있긴 한데 누가 참석했는지 확인해야 해요.”
세드나가 말했다. “우리가 찾는 건 표식을 잘못 외운 사람 하나가 아니라, 어떤 판본으로 업무를 했는지입니다.”
수현은 그 말에 수긍했다. 특정 직원에게 일생의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싶지 않았다. 같은 규칙을 여러 사람이 다르게 배웠다면 기관도 그 사실을 설명해야 했다.
코르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옛 자료를 새로 정리하는 데는 예산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매번 보류됐죠. 아무 사고가 없으면 문제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무 사고가 없다고 확실히 알 수는 있었나요?”
그 질문에는 아무도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수현은 그 침묵 속에서 오래된 당직 보조가 왜 자신이 했던 일을 기억하기 두려워하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불명확한 절차는 실수하기 쉽게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그 실수를 설명할 증거까지 흐려 놓는다.
결국 세 사람은 E-17 수신 원장의 점 세 개를 ‘의미 미확정’으로 적고, 해당 판본의 교육 자료를 별도로 신청했다.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직 아니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은 점이 이제 질문 목록에 올라왔다.
수현은 종이 위에 쓰며 중얼거렸다. “작은 점 하나 때문에 사건이 뒤집힐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작은 점이라고 함부로 답을 만들면 안 됩니다.” 세드나가 말했다.
“네, 압니다. 저도 좀 들떠서요.”
세드나는 웃었다. “들뜨는 건 괜찮아요. 결론만 천천히 내리면 되죠.”
점심 전에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찾아왔다. 손등에 새 붕대를 감은 니엘이었다. 치료사가 당분간 물건을 들지 말라고 했다는데, 그는 치료서와 업무 인계 요청서를 직접 들고 왔다.
“일은 하지 말고 오라고 했을 텐데요.” 코르빈이 눈썹을 찌푸렸다.
“근무 변경을 제가 확인해야 하잖아요.”
“서명은 내일 해도 됩니다.”
니엘은 수현을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어제 말씀하신 것 때문에요. 제가 이 일을 못 하겠다고 말한 것처럼 적히기 싫어서요.”
수현은 요청서를 읽었다. ‘업무 거부로 인한 임시 배제.’ 누군가 처음 만들어 놓은 문장이었다. 치료를 받기 위해 빠진 직원에게 무슨 업무 거부란 말인가.
“누가 이 표현을 적었어요?”
니엘이 망설였다. “오전 문서 담당자가 예전 서식을 썼어요.”
코르빈은 즉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 사람을 불러오세요. 아니, 지금은 설명보다 먼저 정정부터 하겠습니다.”
수현이 손을 들었다. “원본에 덮어쓰지 마세요. 잘못된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도 남겨야 합니다. 니엘 씨가 동의하는 내용으로 정정 사유를 쓰면 좋겠어요.”
니엘은 잠시 생각한 뒤 자신의 말로 문구를 불러 줬다. ‘근무 중 유리 파편으로 손 부상. 의료 권고에 따라 단기 휴무. 대체 인력 배정 요청.’
그는 비로소 서류를 들고 온 보람을 느끼는 얼굴이 됐다.
“제 말로 적어도 되는 거였네요.”
“누구 일을 적는 문서인데요.”
수현이 묻자 니엘이 작게 웃었다. “제 일이죠.”
그 순간 수현은 E-17 수령 대행란을 떠올렸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업무를 했는데 기록에는 이름 대신 ‘대행’만 남았다. 시간이 흐르면 누가 실제로 받았는지, 무엇을 알았는지 설명할 사람이 사라진다. 그래서 잘못된 문장 하나가 아주 먼 곳까지 굴러갈 수 있다.
“그때도 니엘 씨처럼 대리 근무한 사람이 있었겠네요.”
코르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치표는 가져오겠습니다. 하지만 개인 이름을 공개하는 범위는 심사받아야 합니다.”
“물론이죠.”
***
오후 열람에서 두 번째 원장이 나왔다. 이 책은 ‘인계 후속 처리’라고 적혀 있었다. 코르빈이 먼저 경고했다. 보존 당시 일부 장이 물에 젖어 서로 붙었고, 원본을 억지로 떼면 손상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보이는 부분만 봅시다.”
루세는 미세한 빛을 옆으로 비춰 종이 표면의 눌림을 확인했다. 직접 접촉하지 않는 검사였다. 수현은 보이는 글씨만 옮겨 적었다.
‘중단 지시 수신…’ 그 뒤가 끊겼다.
아래쪽엔 다른 필체로 ‘우선 분기 유지’라는 글씨가 있었다. 수현은 목이 탔다. 중단 지시를 받았는데도 분기를 유지한 걸까? 아니면 분기를 유지하던 동안 중단 지시가 나중에 온 걸까?
“이 두 문장은 같은 사람이 썼나요?”
“모릅니다.”
“그럼 순서도 모르고요?”
“페이지 위아래로 쓰였지만 작성 시점까지 같다고 볼 수는 없죠.”
수현은 괜히 마음이 앞서는 자신을 느꼈다. 분명 중요한 기록인데, 아직 결론에 닿지는 않았다. 오래된 한 줄을 발견할 때마다 고향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듯했다.
세드나가 말했다. “오래된 기록은 읽을수록 새로 물어야 할 게 생깁니다. 그래도 오늘은 수신함까지 무엇이 왔는지는 확인했어요.”
“봉투가 도착한 건 맞죠.”
“네. 담당자에게 전달됐는지는 다음 문제고요.”
수현은 펜을 쥔 손의 힘을 풀었다.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명확하지 않다고 적는 것. 그것을 배우기 위해 지금까지 이렇게 먼 길을 온 것 같았다.
그때 문밖에서 작게 언성이 높아졌다. 기록 보존 직원 하나가 원장 반출 목록에 있는 봉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가져갔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코르빈은 소리를 높이지 않고 작업을 멈췄다.
“문부터 닫지 마세요. 지금 각자 어디에 있었는지 먼저 적겠습니다. 물건이 사라졌다고 단정하지 말고요.”
한동안 창구가 술렁였다. 결국 봉투는 옆 칸의 임시 건조함에서 나왔다. 아침에 축축해진 책 표지를 말리는 동안 직원이 같이 옮겨 두었던 것이다. 그 직원은 자신의 서명도 남겼으나 반출 대장에는 옮길 칸이 없었다.
“양식에 칸이 없으면 안 옮긴 일이 되나요?” 수현이 물었다.
베넬이 씁쓸하게 말했다. “여기는 가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코르빈은 임시 보관 이동란을 추가하겠다고 적었다. 수현은 그것이 오래된 장부 한 권보다 쉬운 문제라는 점에 오히려 안도했다. 오늘 당장 바꿀 수 있는 일도 있었다.
***
열람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노을이 물들었다. 낮 동안 멈췄던 시계는 수리공이 태엽을 감아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수현은 새 시간을 보고 안심할 수 없었다. 같은 시계라도 언제 멈췄고 누가 다시 맞췄는지 알지 못하면 어제의 사건은 제대로 비교할 수 없었다.
“오늘 찾은 건 뭡니까?” 루세가 물었다.
수현은 수첩을 보며 답했다. “E-17 관련 봉투가 남부 회선 관제실 수신함에 도착한 기록. 대행자가 이름 대신 직책으로 남은 기록. 그리고 분기 유지 문구가 있지만 작성 순서는 모른다는 사실.”
“중단이 실행됐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실행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어요.”
세드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래도 내일이 조금 더 구체적이겠네요.”
수현은 걸음을 멈췄다. 한국에 있을 때는 종종 이런 일에 짜증을 냈다. 여러 회사의 월급 명세서가 서로 다르고 출퇴근 기록은 흐릿한데 정작 당사자는 급료를 받지 못했다고 울먹이는 상황. 그때도 정말 중요한 건 사람들이 매일 움직였다는 사실보다 그들이 어떻게 대우받았는지였다.
“이곳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이름을 지워 놓았을까요?”
“일을 빨리 처리하려고 했겠죠.” 세드나가 말했다.
“그러면 나중에는 일을 책임질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그 이름을 찾는 겁니다.”
그날 밤 수현은 코르빈에게 공식 질의를 하나 보냈다. ‘E-17 수신 대행자의 신원과 실제 수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범위 심사 요청.’ 마지막에는 당사자 개인의 의료·가족 정보는 필요하지 않다고 따로 적었다.
대답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이름 공개는 아직 불허하지만, 당시 대행자가 작성한 **교대 종료 확인서가 별도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수현은 접수 번호를 동그라미 쳤다. 다음에는 사람을 대신해 찍힌 도장이 아니라 그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직접 남긴 기록을 읽을 차례였다.
제17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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