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경계석 보존함을 열람하는 날, 수현은 일부러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정확히는 두 사람이 번갈아 입회해야 해서 첫 교대가 시작되는 시각에 맞춘 것이었다. 보존함은 침수 사고 당시 위층으로 옮겨졌고 이제 새 담당자인 하웬과 보존 감독관이 함께 관리하고 있었다.
“오늘 볼 수 있는 건 두 장의 표식 원본과 설치 대조표입니다.” 하웬이 말했다. “개인 이름은 가리고, 장소와 기술 규격만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걸 요청했어요.”
수현이 의자를 당겼다. 옆에는 루세가 작은 모형 틀을 놓았다. 실제 장치를 가동하지 않고 낡은 표식의 방향을 비교하는 도구였다. 모형은 종이로 만든 것이었고 작동 능력은 없었다.
첫 번째 표식은 관측대가 사용한 나무 말뚝의 청사진이었다. 말뚝은 한쪽 끝에 작고 깊은 홈이 두 개 있었다. 두 번째는 사후 점검반의 철제 표식 윤곽이었다. 비슷한 홈이 있었지만 방향이 반대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곳에 설치했을 수도 있겠어요.” 수현이 말했다.
루세가 종이 틀을 한 번 뒤집었다. “반대 방향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같은 면에서 본 건지부터 봐야 합니다.”
그는 관측대 도면의 기준점을 남쪽으로 놓고 기술청 도면의 기준점을 북쪽으로 회전했다. 갑자기 두 표식의 윤곽이 거의 겹쳤다. 수현은 숨을 멈췄다.
“같은 자리였나요?”
“모형에서는요. 실제 설치 위치는 대조표에 있는 거리로 확인해야 합니다.”
세드나가 기록을 옮겨 적었다. 작은 오차가 있었다. 두 표식 모두 북측 경계석에서 서른두 걸음이라는 거리를 가리켰지만 그 기준석은 사건 뒤 두 차례 이동했다. 수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움직이지 않는 기준이 없는 걸까.
***
대조표의 옛 판본을 찾아내자 상황이 달라졌다. 사건 당일의 기준석은 지금 위치보다 서쪽으로 아홉 걸음 떨어져 있었다. 두 표식의 현장 기원 좌표는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같은 위험 구역 안에 들어왔다.
“최초 현장 관찰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았고, 두 기관의 위치 표시는 같은 구역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루세가 말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사각 압흔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개의 서로 다른 흔적이 가까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결론은 ‘경계 구역이 겹친다’까지만요.”
그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었다. 오랫동안 서로 다른 부서가 작성한 기록이 서로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같은 장소를 다른 방향에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생겼다.
그때 하웬이 종이 끝의 접힌 자국을 가리켰다. “이 부분은 보존 당시부터 손상돼 있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날짜가 적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요.”
수현은 멈춰 섰다. 날짜가 없다는 것은 또다시 선후 관계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원본을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누군가의 요약에서 ‘현장 미확인’이라는 말로 사라진 흔적이 실제로는 지도와 표식으로 남아 있었다.
***
점심을 먹으러 나왔을 때, 수현은 뒷마당에서 작업자 둘이 언쟁하는 것을 들었다. 침수 피해 때문에 배수로를 다시 파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젊은 인부는 새로 깐 돌판을 들어 올려야 한다고 했고 감독자는 오늘 안에 끝내야 한다며 곧장 일을 시켰다.
“장비를 꺼내려면 적어도 네 명은 있어야 해요.” 인부가 말했다.
“두 명이면 충분해. 어제도 그랬다니까.”
“어제는 물이 없었잖아요.”
수현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개입할 수 있는 위치인지부터 생각했다. 공식 감독 권한은 없었다. 다만 작업이 관리실 출입 통로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방문객도 위험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하웬에게 상황을 알렸다. 하웬이 시설 책임자에게 연락했고, 책임자는 작업 계약에 적힌 최소 인력 기준을 확인했다. 구형 작업 방식은 두 명이었지만 최근 침수 이후 추가 안전조치가 통과된 상태였다. 현장 감독자가 개정 공문을 받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같은 일이네요.” 세드나가 중얼거렸다. “명령은 작성됐는데 현장에는 전달되지 않았군요.”
수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E-17 안전 차단 경고도 비슷했다. 상급 부서가 문서를 만들었다고 현장의 누군가가 그것을 받거나 이해했다고 보장할 수는 없었다.
감독자는 뒤늦게 새 규정을 확인하고 작업을 멈췄다. 인부는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수현은 손을 저었다. “필요 인원이 몇 명인지 말씀한 건 인부님이에요. 저는 그 말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그날 현장은 오후 작업을 취소했다. 돌판은 그대로 남았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
관리실로 돌아오자 루세가 원본의 작은 기호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홈 아래에 희미한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관측대 표식에는 없고 기술청 표식에만 있었다. 수현은 새 발견에 반가워지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별도의 표식인가요?”
“가능성은 있죠. 하지만 찍힌 점이 운송 중 생긴 흠집일 수도 있습니다.”
루세는 감정관에게 보존 시점의 사진과 그림을 비교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진이 없던 시대에는 등록 그림과 부식 상태 기록이 가장 오래된 자료였다. 잠시 뒤 답이 왔다. 해당 점은 적어도 보존 등록 당시부터 있었으며, 기능적 의미는 미확정이었다.
“그럼 뭐가 다르죠?”
“나중에 누가 찍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적어도 등록 당시엔 있었다는 뜻이죠.”
수현은 웃음이 났다. 며칠 전에는 숫자 세 개 때문에 싸웠고 오늘은 점 하나 때문에 시간을 쓰고 있었다. 그래도 점 하나가 우연인지 기술 표식인지는 나중에 중요할 수 있었다.
***
마지막 대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기술청 원본 표식의 뒷면에 오래된 분류 번호가 하나 있었다. ‘E-17’이 아니라 ‘현장 차단 경고 2’였다. 수현은 순간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루세는 말없이 구형 분류표를 펼쳤다. 차단 경고는 사람의 이동 명령과 전혀 다른 계열이었다. 기술청이 현장에 설치한 표식은 위험 구역을 보존하라는 표시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표식의 존재만으로 장치가 물체를 전송했다거나 인체가 나타났다고 할 수 없었다.
수현은 실망을 삼켰다. 그러자 하웬이 부록 한 장을 보여 주었다. ‘현장 차단 경고 2’가 설치될 때에는 반드시 별도의 인계 수령자가 이름을 적도록 하는 규칙이었다. 그런데 그 수령자란에는 이름이 아니라 ‘중앙 야간 인계’라는 기관 표기가 있었다.
“사람이 직접 받지 않았을 수도 있네요.” 수현이 말했다.
“그 가능성을 조사해야 합니다.” 세드나가 대답했다.
원본에는 옛 담당자의 이름 대신 관리 인장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 번호가 어느 개인에게 배정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인계 원장이 따로 있었다.
수현은 마지막으로 기록을 확인했다. 같은 구역에 대한 두 기관의 조사, 위험 표식, 인계된 것처럼 보이는 경고. 아직 한 사람이 어떻게 이세계에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밤 누군가 위험을 경고했고, 그 경고를 실제로 누가 받았는지는 남아 있었다.
새로운 조회서는 ‘중앙 야간 인계 인장 사용 대장’을 향했다.
***
다음 날 수현은 기술청의 표시 기준 교육 자료를 한 장 더 얻었다. 자료를 펼치자 같은 형태의 표식이 서로 다른 목적에 쓰인 예가 나왔다. 하나는 ‘위험 구역 출입 금지’, 다른 하나는 ‘신호 기원 미확인’. 홈의 개수는 같았고 방향만 조금 달랐다.
“이 정도 차이를 현장에서 구분할 수 있겠어요?” 수현이 물었다.
루세가 대답했다. “제대로 교육받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고 어두운 밤이라면 실수할 가능성도 있죠. 특히 교정판이 바뀌었다면 더 그렇습니다.”
수현은 사건 당일 비가 많이 왔다는 자료를 떠올렸다. 젖은 표식을 보는 사람, 서로 다른 시계, 도착하지 않은 음형 변경 공문. 하나하나는 작은 문제였지만 한밤중에 겹치면 사람의 인식이 달라질 수 있었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요?”
“고의가 아니었다는 증거도 아직 없어요.” 루세가 답했다. “그러니 먼저 작동 기록과 실제 확인자를 찾아야 합니다.”
수현은 끄덕였다. 가정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일과 사건의 사실을 입증하는 일은 달랐다. 그녀는 공책에 여러 가능성을 나란히 썼다. 첫 번째는 현장 표식의 오독. 두 번째는 중단 통지 미도달. 세 번째는 도달했으나 담당자가 확인하지 못함. 네 번째는 확인하고도 실제 장치가 멈추지 못함.
어느 것도 아직 확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각을 확인할 자료와 담당 부서는 달랐다. 덕분에 다음 조사에서 무엇부터 요청해야 하는지는 더 분명해졌다.
마침 보존실의 기록 담당자가 고문서 한 장을 가져왔다. 같은 시기의 다른 경계 사고에서 표식의 방향을 잘못 읽어 구조대가 위험 구역 반대로 이동한 사례였다. 다행히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담당자는 사건 뒤 사과문을 남겼다고 했다.
“이 사고는 정정이 잘된 편이에요.” 담당자가 말했다. “담당자가 자신이 본 방향을 그대로 기록했거든요. 그래서 어느 단계에서 혼동했는지 알아낼 수 있었죠.”
수현은 사과문을 읽지 않았다. 내용까지 볼 권한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대신 정정 절차 설명을 받았다. 정정 전의 기록과 정정 후의 기록을 둘 다 보존하고, 변경한 사람과 날짜를 남겼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기록을 틀리게 썼다고 그걸 지워 버리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되겠네요.”
“맞습니다. 틀렸던 흔적도 사건의 일부니까요.”
루세는 수현이 들고 있던 모형을 살폈다. 표식의 점 하나가 기능 표시인지 단순한 손상인지 확인하려면 원본 금속에 남은 압력 자국을 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원본을 만지려면 또 다른 보존 허가가 필요했다. 수현은 즉시 신청하지 않고 보존 담당자에게 위험을 물었다.
“금속을 긁거나 가열하지 않고 확인할 수 있나요?”
“어두운 빛을 비춰 그림자를 비교하는 정도면 가능합니다.”
“그럼 그 방법만 검토해 주세요.”
수현은 서류에 범위를 적었다. 실제 기계를 작동하지 않고, 원본을 훼손하지 않으며, 개인 물품이나 생체 정보를 연결하지 않는다. 그녀가 늘 반복하는 조건이었지만 이번에는 반복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었다. 과거 누군가 안전 조건을 간단히 넘어갔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저녁에는 작은 시연이 허용됐다. 원본을 닫힌 보호 상자에 둔 채 빛의 각도만 바꿔 봤다. 점 하나가 찍힌 흔적의 깊이는 주변 부식보다 조금 깊었다. 그러나 그 깊이만으로 제작 당시의 표식인지 보존 중 생긴 상처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결론이 없네요.” 수현이 중얼거렸다.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루세가 말했다. “처음 표식이 무엇이었는지를 모르면 이후 장부의 해석도 한정돼야 한다는 점이죠.”
그 말은 수현에게 위로가 됐다. 실패한 실험도 제대로 기록하면 누군가 다음 실험을 위험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수현은 돌아오는 길에 기술청 직원들의 교대 일정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비파괴 검사에 참여한 담당자는 두 사람이었다. 둘은 각각 무엇을 보았는지 따로 적었고 마지막에 결과를 나란히 놓았다. 서로의 말을 베끼지 않기 위한 절차였다.
수현은 그 방식이 좋았다. 누군가의 말은 다른 사람의 말과 비교할 수 있어야 했다. 그 비교가 바로 누군가를 의심하는 행위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잘못된 비난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방법일 수도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조사 원장에 적었다. ‘두 현장 표식은 같은 위험 구역을 가리켰을 가능성. 인장 경고의 실제 수신 및 장치 정지 여부는 계속 미확정.’ 종이에 쓰인 말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한 줄이 수현의 다음 발걸음을 정확한 방향으로 돌려 주었다.
***
수현은 경계석의 옛 방향표와 현재 출입문 사이의 거리를 걸어 보았다. 현장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보존실 안에서 지도와 모형만 비교하는 작은 연습이었다. 열 걸음이 조금 넘는 차이가 종이 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현장에선 저 차이를 놓치기 쉽겠어요.”
“특히 비가 오면 그렇죠.” 루세가 답했다.
수현은 오래전 자신이 노무 상담을 할 때 업무 위치 하나 때문에 의견이 갈렸던 사건들을 떠올렸다. 같은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서 모두 같은 위험에 노출된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은 뜨거운 기계 옆에 있었고 다른 사람은 문밖에서 기다렸다. 자리를 정확히 묻지 않으면 모두가 같은 일을 겪었다고 기록해 버리기 쉬웠다.
그녀는 오늘 확인한 좌표 대조 결과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현장 표식의 설치 구역 일부 중첩 가능. 기준석 이동 전후와 도면 관찰 방향을 반영한 잠정 결과.’
“확정할 수 없는 말이 너무 많네요.”
세드나가 답했다. “그래도 확인된 게 아예 없는 것과는 다르죠.”
수현은 웃었다. 그렇다. 오늘 확인된 것은 어떤 좌표계를 기준으로 보아야 하는지였다. 위험 표식의 실제 기능을 알기 전에 방향부터 잘못 읽었다면 이후 모든 결론이 틀렸을 것이다.
그녀는 노트를 닫았다. 다음에 필요한 건 마지막 수신 인장 사용 대장이다. 이번에는 그 이름을 찾아내더라도 먼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16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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