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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167화
PAYLUA ORIGINAL · 제167화

167화. 에린이라는 서명이 가진 무게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 · 6,215자

오프라인 책장
왕도 중앙 기록원의 서명 대조실에는 놀랍게도 거울이 많았다. 종이 위의 압인 흔적을 비추고, 잉크가 번진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각도가 다른 거울들을 벽에 걸어 둔 것이었다. “마법이 아니라 빛으로 확인하는 거군요.” 수현이 말했다. “마법으로 보존물을 투시하면 화학 반응이 일어날 수 있어요. 보존자들은 그런 검사부터 금지합니다.” 세드나가 설명했다. 수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 아래에 나란히 놓인 문서는 에린이라는 이름이 적힌 두 개의 사본이었다. 하나는 오래전 회신 심사 의견서, 다른 하나는 R-0 보호 신고 당시의 최초 기록 담당자 표기였다. “글씨가 닮았나요?” 기록 감정관이 고개를 저었다. “닮아 보이는 것은 있습니다. 하지만 앞 문서는 후대에 베껴 쓴 사본이고 뒤 문서는 이름을 활자로 찍은 색인입니다. 필적을 비교할 원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역시 이름만 같은 거군요.” “이름만 같다고도 아직 못 합니다. 공통의 부서명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이름을 썼을 수도 있어요. 원본 신원 확인이 필요합니다.” 수현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어느새 ‘아직 확정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 데 익숙해졌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 불확실함을 아껴 둘 여유가 있었다. *** 감정관은 옛 회신 의견서의 원본이 이미 사라졌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알려 주었다. 원본은 누군가의 개인 서신과 함께 봉인돼 있었고 신원 확인을 위한 제한적 대조 심사를 신청할 수 있었다. 다만 봉인된 사적 부분까지 공개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이름과 담당 기간이 맞는지만 검증해 주세요.” 수현이 말했다. “담당 기간이라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록 담당자의 임용 원장이 따로 있거든요.” 세드나는 그 신청을 서식에 옮겼다. 수현이 신청 사유를 쓰는 동안 그녀는 법률적인 표현을 제안했지만 마지막 문장을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 수현은 ‘이 사건의 가해자를 특정하기 위해’라는 문구를 지웠다. 아직 가해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두 에린이 같은 사람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대신 ‘서명 경로 및 서식 권한의 혼동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해’라고 고쳐 썼다. 그날 저녁 보존소는 담당 기간 조회 결과를 돌려주었다. 구형 회신 심사반의 에린 소렐은 수현이 소환되기 훨씬 전의 시기에 재직했던 기록이 있었다. 처음 구조 신고에 등장하는 ‘에린’의 문서 작성 시기와는 차이가 났다. “같은 사람이 오랫동안 일했을 수도 있잖아요.” 수현이 말했다. “그렇죠. 하지만 바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신분 기록은 공개 범위 밖입니다.” 세드나가 말했다. 루세가 덧붙였다. “또 누군가 옛 이름을 장치나 서식의 담당명으로 남겼다면 실제 작성자와 다를 수도 있고요.” 수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만큼은 빨리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 감정실에서 나오는 길에 수현은 복도 끝 작은 우편 창구를 보았다. 우편 구분 담당자가 세 명이나 달려들어 두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하나에는 ‘수신지 미상’이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수신인 확인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예전에는 두 상자가 같은 뜻인 줄 알았을 것이다. “주소가 틀리면 왼쪽이고 사람이 누군지 모르면 오른쪽인가요?” 수현이 물었다. 늙은 창구 직원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대체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인지 모를 때는 분류를 미뤄야 합니다. 서둘러 잘못 보냈다가 편지가 돌아오지 않는 일도 있거든요.” 수현은 자신의 사건과 너무 닮은 대답이라 잠시 말이 없었다. 그때 젊은 우편 기사가 서류를 한 장 들고 왔다. ‘에린 소렐’ 이름이 적힌 오래된 편지의 수신증이었다. 수현은 우연의 일치에 눈썹을 올렸지만 직원은 곧바로 설명했다. “옛날 문서를 이관할 때 수취인란 이름이 남아 있어요. 본인에게 전달됐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 시대 담당 부서 명칭이 함께 찍힌 겁니다.” “우리가 조사하던 그 이름이네요.” 루세가 낮게 말했다. 수현은 원본을 만지지 않았다.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편지를 읽을 권한이 생기지는 않았다. 대신 그 수신증이 어느 기록군에 속하는지 목록만 확인했다. “그러면 이 편지가 보존된 경로가 서명 대조에 도움이 될 수 있겠죠?”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문까지 읽어야 한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직원이 웃었다. “이 정도로 조심해서 묻는 분이면 저희도 도울 수 있죠.” *** 다음 날 오전 수현은 에린이라는 이름이 적힌 두 문서를 하나의 봉투에 넣지 않았다. 왕도 기록원은 서로 다른 소장처에서 나온 자료를 임의로 합치면 원래 보존 경위를 잃을 수 있다고 했다. 수현은 각 사본에 별도의 종이띠를 둘렀다. 루세가 물었다. “구분해 두는 데 시간이 꽤 드네요.” “합치면 편해질지 몰라도 나중에 구분하려면 더 어려워져요.” 그 말은 기록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될 것 같았다. 수현이 처음 이세계에 왔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감사관이나 마법사로 생각했다. 어느 쪽도 아니라고 설명할 때마다 상대는 조금 실망했다. 어떤 이름을 붙이면 상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편리함이 있었다. 왕도 기록원은 구형 직원 명부에 있던 에린 소렐의 근무 기간을 확인해 주었다. 명부의 한쪽 모서리에는 수기 메모가 있었다. ‘장기 휴가로 임시 담당 교체.’ 수현은 그 한 줄에 새로운 관심이 생겼다. “휴가를 갔다는 사람이 어떤 서류에 서명했다면 이상한 일이겠네요.” 세드나가 고개를 들었다. “반드시 그렇진 않습니다. 휴가 전에 작성하고 나중에 등록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서명한 시각과 등록된 시각을 구분해야 하겠죠.” “맞습니다.” 그들은 정식으로 옛 인계 날짜와 등록 날짜를 대조할 수 있는지 신청했다. 잠시 뒤 보존 담당자는 외형 등록 표기는 공개 가능하지만 개인의 휴가 사유는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수현은 당연히 동의했다. 에린이 왜 쉬었는지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그때 수현은 마리엘을 떠올렸다. 수리일지의 제1권을 보여 주면서 조부의 개인 기억을 함부로 사건의 증거로 사용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손녀였다. 남겨진 가족에게 한 사람의 이름은 온갖 추억을 불러오는 표식일 것이다. 수현은 언젠가 에린의 가족과 마주친다 해도 처음부터 의심부터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후에는 구형 서식의 인장을 제조하던 공방에서 견본 표를 가져왔다. 왕도 행정실은 직원의 성명이 적힌 인장과 부서 직책명이 적힌 인장을 구분했다. 에린 소렐의 문서에는 개인 서명처럼 보이는 글씨 아래 아주 작은 부서 인장이 함께 있었다. “이름을 적은 사람이 꼭 그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그래요.” 감정관이 말했다. “대리 기재가 허용되던 시대라면 더 그렇죠. 다만 대리 서명의 경우에는 별도 대장에 기재했어야 합니다.” 수현은 곧바로 대리 기재 원장을 열람할 수 있는지 물었다. 감정관은 전체는 안 되지만 관련 날짜의 대리 기재 존재 여부는 답할 수 있다고 했다. 수현은 요청했다. 다음 날 회신이 왔다. 해당 시기의 대리 기재 원장은 일부 훼손돼 존재 여부가 불완전했다. 한 걸음 다가간 듯하면 다른 구멍이 나타났다. 그래도 수현은 화를 내지 않았다. 분노는 사건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될 때도 있었지만 판단을 흐리게 할 때도 있었다. 오후 늦게 수현은 인장 제조 공방을 나왔다. 길 건너편에서 장인들이 무거운 판을 옮기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손가락을 다쳐 천으로 감고 있었다. 수현은 함부로 치료하겠다고 나서지 않고 근처 진료소 위치를 알려 주었다. 장인은 고맙다고 했다. 작은 인장이 사람의 운명을 뒤바꾸는 나라에서도, 인장을 만드는 사람의 손가락은 여느 사람과 같이 아팠다. 여관으로 돌아오며 수현은 자신의 자격증을 떠올렸다. 한국 공인노무사라는 이름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시험을 통과한 결과였다. 여기서는 단지 자신이 어떤 일을 해 왔는지 설명해 주는 단서일 뿐이었다. 그녀는 왕국의 법을 모르는 부분에서는 언제나 담당자에게 물어야 했다. 그 불편함을 견딜 줄 알아야 더 정확히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밤에 세드나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혹시 에린이라는 이름을 추적하는 걸 이제 그만두고 싶으신가요?” 수현은 잠깐 생각했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죠. 하지만 이름만으로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록이 있다면 그걸 정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귀환을 위한 조사에서 너무 멀어지는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래서 사건과 직접 관계없는 개인정보는 여기서 멈출 거예요. 기술 기록과 승인 경로에 필요한 부분만 확인하죠.” 그날 수현은 서류 맨 앞에 작은 메모를 붙였다. ‘에린의 삶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에린의 이름이 사용된 서류의 권한을 조사한다.’ 문장을 읽자 머릿속이 조금 선명해졌다. 누군가를 찾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모든 비밀을 열 권리는 없었다. 수현은 마지막으로 원본 목록을 정돈하고 등불을 껐다. *** 저녁 무렵 수현은 한참 동안 여관 창문을 바라보았다. 서울에 두고 온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그들도 어느 어딘가에 서류를 제출했을까. 실종된 사람을 찾는 신고서, 연락 두절 기록, 마지막 위치 확인. 자신이 여기서 사건번호를 붙여 가며 조사하듯 고향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을 찾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상상에 갇히는 대신 수현은 머리맡 노트를 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리했다. 지금 당장 서울로 연락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귀환 의사를 철회한 것은 아니었다. 기술 실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결정도 마찬가지였다. 루세가 다음 날 가져온 작은 표에는 에린 소렐 관련 문서 세 건의 이름과 보존 위치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수현은 각 칸 옆에 ‘원본’, ‘후대 사본’, ‘색인’이라는 표시를 붙였다. 이름은 하나여도 자료의 무게는 달랐다. “이걸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세요?” 루세가 물었다. “이름이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요.” 수현은 카이렌과 라비엔의 기록을 떠올렸다. 카이렌의 이름이 출정 장부에 있다고 해서 그가 의식을 잃은 날 전투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라비엔의 이름이 전출 명부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그가 죽은 것도 아니었다. “에린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겠죠.” 세드나는 다음 제한 심사의 날짜를 적어 주었다. 자료 원본의 봉인이 열린다는 뜻이 아니었다. 옛 임용표와 서명 권한표의 일치 여부를 보겠다는 심사였다. 수현은 그 일정만 받아 들었다. *** 서명 대조실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수현은 낡은 직원 인사표를 보다가 이름이 지워진 칸을 발견했다. 은퇴나 전출이 아니라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비공개 표시였다. 예전에는 그 표시를 보면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지금은 먼저 왜 가렸는지 묻게 됐다. “이 기록은 당사자가 공개를 원하지 않은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진료 정보가 포함됐을 수도 있습니다.” 감정관이 답했다. “그럼 필요한 부분만 확인하면 되겠네요.” 수현은 두 에린 문서의 신원 대조를 위해 전체 명부가 아니라 해당 직책의 재직 여부와 대리 기재 규칙만 확인해 달라고 했다. 세드나는 그 신청이 훨씬 간단히 처리될 거라고 말했다. 다음 날 간단한 회신이 왔다. 에린 소렐의 실제 재직은 확인됐지만 두 기록의 담당 권한과 시기가 달랐다. 그 차이는 동일인을 배제하는 증거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려면 추가 자료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해졌다. 수현은 회신을 봉투에 넣었다. “좋아요. 오늘은 모르는 걸 제대로 알았네요.” 루세가 웃었다. “기술자에게도 그건 꽤 중요한 성과죠.” 그날 수현은 귀환 조사가 단지 돌아갈 문을 찾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이 됐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 그날 밤 늦게 기술청에서 회신 한 장이 도착했다. 옛 회신 의견서의 에린 소렐은 실제로 당시 심사반에 ‘기록 검토 담당’으로 재직한 사실이 확인됐다. 하지만 그 직책의 권한에는 현장 이동 장치 가동 승인이나 타인 소환 지시가 없었다. 수현은 긴장이 풀리는 동시에 새로운 질문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반대 의견서를 남긴 사람이 실제로 권한 없는 조치를 승인할 수 없었다면, 누가 그 서류를 집행 명령처럼 취급했을까. 답은 아직 없었다. 그래도 적어도 한 사람을 이름만으로 범인으로 만드는 실수는 피했다. 수현은 기록의 맨 끝에 적었다. ‘에린 소렐의 재직 및 검토 권한 확인. R-0 신고 에린 동일인 여부 미확정. E-17 실제 가동 책임자 미확정.’ 문장을 마무리하자 방문 밖에서 복도 종이 울렸다. 또 하루가 끝났다. 어쩌면 진실을 찾는 일은 화려한 폭로보다 이런 문장들을 틀리지 않게 적는 과정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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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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