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는 계산서 첫 장에 적힌 숫자부터 지우지 않았다. 대신 그 숫자 옆에 작은 글씨를 썼다.
‘누가 사용했는가.’
이수현이 받은 편지의 첫 줄이었다. 수현은 왕도 여관의 작은 책상에 앉아 편지를 읽었다. 메이는 이번 정산 심사에서 직접 쓴 질문표를 동봉했다. 예비 적립금은 이미 개인 산정에서 제외됐지만, 잔여 치료비 항목은 여전히 제7원정대 치유사의 이름으로 청구되고 있었다.
‘제가 사용한 마석과 환자에게 지급된 마석이 같은 것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원래 구별해야 하는 것인지 알려 달라고 묻기로 했습니다.’
수현은 문장을 읽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가 가르쳐 준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대신 메이는 자신의 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세드나가 편지를 흘끗 보더니 물었다. “메이 씨 소식인가요?”
“네. 이번엔 제 도움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게 좋은 거죠.”
“저도 알아요. 다만 제 역할이 줄어드니까 조금 낯설어서요.”
수현은 답장에 숫자 계산을 대신해 주겠다는 말 대신, 자료를 원본대로 보관하고 심사가 언제 끝날지 물어보라는 말을 적었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서로 다른 비용을 왜 같은 사람에게 청구하는지 질문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
며칠 뒤 수현은 왕도 출장 중인 메이를 만났다. 치유사는 손목에 여전히 금속 고리를 차고 있었다. 붉은 글씨는 이전보다 희미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정산실 근처 찻집에 앉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메이가 지친 얼굴이라는 사실이 수현에게 걸렸다.
“또 밤새 치료하셨어요?”
“아니에요. 어제는 제가 아닌 다른 분이 야간 당번이었어요. 다만 오늘 오느라 일찍 일어났죠.”
“그럼 다행이네요.”
“수현 씨는요? 얼굴이 더 말랐어요.”
“서류에 영양분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메이가 웃었다. 그리고 금속 고리를 손가락으로 돌렸다. “예전에는 이게 울리기만 해도 숨이 막혔어요. 이제는 왜 울리는지 물어봅니다. 그래도 하루빨리 벗고 싶어요.”
“그건 충분히 이해해요.”
“당장 벗을 수 없으면 고리 표시부터 고쳐 달라고 했어요. 제가 확정적으로 빚진 것처럼 쓰인 숫자 옆에 ‘분쟁 중’이라고 표시해 달라고요.”
수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돈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메이가 자신의 상태를 남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의 문제이기도 했다.
“거절했나요?”
“처음에는 안 된대요. 고리 표시를 고치려면 원금 확정이 필요하다면서요. 그러면 원금이 확정되지 않았는데 왜 저한테 빚진 사람 표시를 하느냐고 물었죠.”
수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확하네요.”
“그랬더니 담당자가 회의하자고 하더라고요.”
메이가 으쓱했다. “저 이제 조금 무서운 치유사가 된 것 같아요.”
“무서운 사람보다 질문을 정확히 하는 사람이죠.”
***
심사실에서는 메이의 청구 항목을 세 부분으로 나눴다. 실제 마석 출고, 치유사 개인의 마력 사용 추정량, 치료 대상의 보호 비용. 길드가 보장한 비용과 개인 부담이 무엇인지 구분해 달라는 질문에 담당자 키아는 자료를 다시 가져왔다.
“마석 출고는 확인됩니다. 하지만 그 출고가 어느 환자에게 제공된 것인지 개인별 수령표가 없습니다.”
메이가 말했다. “그날 환자가 여럿이었어요. 제가 쓴 마력은 제가 썼지만 부상자를 위해 쓴 마석을 제 개인 소비로 청구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개인 치료 마석과 현장 응급 마석은 회계 계정이 다릅니다. 당시에는 통합 청구 양식으로 넘어간 흔적이 있어요.”
“그럼 기록을 다시 나눠 보세요. 확인하기 전에는 제 개인 빚이라고 쓰지 말아 주세요.”
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옆에 있었지만 말을 보태지 않았다. 메이의 문장이 더 정확했다. 치료한 사람이 알고 있는 환자의 상태와 실제 작업은 외부 상담인이 추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키아는 심사관에게 건의서를 올렸다. 잔여 금액 가운데 환자별 수령표가 없는 부분의 개인 부담 판정을 한시 유보하고, 확정된 금액과 분쟁 금액을 별도 표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최종 결론은 아직 아니었다. 고리를 떼어 내는 결정을 내릴 권한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메이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그럼 다음 심사 날짜를 문서로 주세요. 누가 책임지고 원본을 찾을지도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순간 수현은 예전 한국의 분쟁조정 회의를 떠올렸다. 질문 하나에 담당자가 대답하면 회의가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일을 움직이는 건 대답보다 그다음 일정이었다.
***
심사회의에 들어가기 전, 메이는 한동안 회의실 앞에서 기다렸다. 손목 고리는 여전히 반짝였고 길드 직원이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서류를 품에 안은 채 앉아 있던 수현이 말을 걸었다.
“조금 떨리세요?”
“많이요.”
“그럼 오늘 꼭 해야 할 말을 세 가지만 남겨 봐요. 나머지는 자료가 말하게 하면 되니까요.”
메이는 메모장에 적기 시작했다. 첫째, 자신이 인수하지 않은 약재는 개인 청구에 넣지 말 것. 둘째, 환자 응급 치료에 쓰인 물품은 누가 지급했는지 다시 확인할 것. 셋째, 분쟁 중인 금액을 확정된 빚처럼 표시하지 말 것.
“더 있어요.” 메이가 말했다.
“그럼 네 번째는요?”
“다음 회의 날짜요. 지난번에는 돌아오라고만 했는데 몇 주가 지나도 아무도 연락을 안 했잖아요.”
“좋네요.” 수현이 대답했다. “다만 이번엔 먼저 메이 씨가 말씀하세요.”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된 첫날 수현은 자신의 대신 말해 줄 것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메이는 수현이 없을 때도 자기 일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기실에는 다른 환자 가족도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노인은 비용 청구서를 들고 손을 떨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고지서가 왔다고 했다. 수현은 그 말을 듣고 당장 옆에 앉아 처리 방법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정산 담당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원한다면 안내 창구에서 본인의 기록 열람을 신청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인은 고마워했지만 수현은 목이 메었다. 낯선 세계에서 돌아갈 길을 찾는 동안에도 이곳 사람들은 매일 이런 문제로 살고 있었다. 소생 비용이 계약에 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불편했지만, 죽은 사람에게 도착하는 고지서를 보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메이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저런 청구서를 받고 겁부터 났어요. 그런데 무슨 돈인지 확인할 권리가 있다는 건 수현 씨가 알려 줬죠.”
“메이 씨가 직접 확인하셨잖아요.”
“네. 이제 다른 분한테도 그 말을 해 주려고요.”
그들이 회의실로 들어가기 전 메이는 노인의 손을 잠시 잡아 주었다. 어떤 치료는 마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회의 시작 직후 키아는 수현이 아닌 메이에게 직접 질문했다. “해당 날짜에 누가 현장 약재를 수령하셨습니까?”
“제7원정대 수령 기록에는 제 이름이 있지만 그 시각에는 제가 카이렌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젠과 데런이 같은 장소에 있었고 이미 사실확인서를 제출했습니다.”
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은 검토 중입니다. 물품 지급 기록과 현장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그렇다면 확인되지 않은 수령분은 개인 채무로 확정하지 말아 주세요.”
심사관이 잠깐 말을 멈췄다. 메이는 내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수현은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필요한 문서가 빠진 곳에 표시하고 회의록 사본의 접수 절차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회의 뒤 메이는 자신이 거의 울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예전에는 길드 직원이 서류를 내밀면 무조건 서명했고, 그 서명이 무슨 뜻인지 묻는 일을 두려워했다. 지금은 결론이 늦어져도 질문할 수 있었다.
“고리를 벗는 데는 아직 시간이 걸리겠죠.” 메이가 말했다.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래도 이번에는 그 시간이 어떤 일을 위한 시간인지 압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가끔 문제를 당장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날 메이는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심사 결과를 정확히 적었다. ‘잔여 금액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강제 징수는 계속 보류이고 손목 고리도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한 문장 더 적었다. ‘다음 회의에서는 제가 제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
회의가 끝난 후 메이는 갑자기 시장에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이 한동안 함께 걸을 일이 없었다. 수현은 기록관에 갈 시간이 남았는지 계산하다가 결국 따라갔다. 시장에는 훈제 생선 냄새가 가득했고 낮은 처마에 빨간 천 조각이 걸려 있었다.
“이거 하나만 사면 돼요.” 메이가 가리킨 것은 새 가죽 손목 보호대였다.
“고리 위에 찰 거예요?”
“네. 금속이 계속 피부를 긁어요. 고리 해제를 신청하긴 했지만 언제 될지 모르니까요.”
수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장부를 뒤져도 지금 메이의 손목이 아프다는 사실을 당장 없애 줄 수는 없었다. 메이는 현실적인 문제를 하나씩 처리하고 있었다.
“돈은 내가 낼게요.” 수현이 말했다.
“왜요?”
“선물이에요. 자꾸 제 마음만 받아 줄 순 없잖아요.”
메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돈 있어요. 그리고 수현 씨는 집에 갈 방법 찾느라 여비도 많이 쓰고 있잖아요.”
“그럼 반씩 낼까요?”
“그것도 싫어요. 이건 제가 사야 할 것 같아요.”
메이는 웃으며 동전을 꺼냈다. 수현은 억지로 도와주려는 자신의 손을 거뒀다. 어떤 친절은 상대에게 선택권을 돌려주는 데서 완성되었다.
***
메이가 떠난 뒤 수현은 정산실 복도에 잠시 남았다. 오늘 심사회의 서기였던 젊은 직원이 회의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직원이 물었다. “요즘 신청인들이 원본 수령 확인을 왜 그렇게 많이 요구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어떤 점에서요?”
“고지서를 보내면 끝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못 받았다는 분들께 무작정 다시 보내기만 해서 일이 더 쌓였던 것 같습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낸 것과 받은 것은 다르니까요. 이 세계에서 제일 자주 듣는 말이에요.”
직원은 웃으며 미결 목록을 보여 주었다. 개인정보는 가려진 상태였지만 통지 미수령 사유가 여럿이었다. 주소가 변경된 경우, 전출 처리 뒤 담당자가 바뀐 경우, 심지어 치료실에 누워 있어서 고지서를 직접 받을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럼 각 경우에 재통지 방법이 달라야겠네요.”
“그렇게 구분해 보려고 합니다.”
수현은 서류를 넘겨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을 자신이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곳의 담당자가 문제를 이해하고 개선하겠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었다.
문을 나서기 전 직원이 인사했다. “메이 씨는 다음 회의에도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수현은 웃었다. “네. 그분은 자기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실 거예요.”
***
시장 출구에서 수현은 어깨를 잡아당기는 소년을 만났다. 왕립길드의 작은 우편 가방을 멘 전령 견습이었다. 그는 봉투를 메이에게 건넸다. 원정대에서 온 긴급 소식일까 싶어 두 사람 모두 긴장했다.
안에는 뜻밖의 편지가 있었다. 카이렌이 직접 쓴 원정대의 휴식 운영 일주일 보고였다. 야간 전령을 두 교대로 나눴고, 긴급 출동 시 대체 인원을 먼저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에는 ‘메이의 정산 회의에 필요한 추가 자료는 젠이 정리해 보낼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메이는 봉투를 품에 넣었다. “예전에는 모두 저한테 물었어요. 누가 다치면 어디 있는지, 물약은 얼마나 남았는지, 용사님은 왜 안 자는지.”
“이젠 다른 사람이 답할 수 있네요.”
“네. 이상하죠. 일이 줄었는데 처음엔 서운했어요.”
수현은 웃었다. 자신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저녁에 메이가 숙소로 돌아가기 전, 수현은 짧은 약속을 했다. 잔여 채무 심사가 끝날 때까지 필요한 절차 설명은 도와주겠지만 당사자 의견은 메이가 직접 정한다는 약속이었다.
메이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수현 씨도 집에 갈 방법을 찾는 일에 더 신경 쓰세요. 제 이야기는 제가 이어 갈게요.”
수현이 그 손을 잡았다. 고리의 차가운 금속이 손등에 닿았다.
그날 밤 수현은 자신의 조사 노트에 세 줄을 적었다. ‘예비 적립비 제외 유지. 잔여 미확인 금액 개인 판정 일부 유보 건의. 고리 유지, 최종 결정 대기.’
이야기의 진전은 때로 작은 문장에만 담겼다. 그렇지만 그 문장을 메이 자신이 얻어 냈다는 사실은 어느 법 조문보다 단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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