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고에 기록자가 두 명 있었군요.”
수현은 관리실 앞의 벤치에 앉아 오늘 아침 도착한 문서 목록을 보았다. 관측대가 현장을 확인한 기록과 제0종점 사후 점검반이 흔적 인계를 요청한 기록. 서로 다른 두 기관이 같은 시간대의 흔적을 따로 보았다.
“둘이 있었다고 해서 둘이 독립적으로 본 건 아닙니다.” 루세가 말했다. “한 사람이 보고한 내용을 다른 사람이 옮겨 적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원본이 필요한 거죠.”
세드나가 두 사람 사이에 종이 한 장을 놓았다. “하지만 사후 점검반은 기술관리청 소속이고 관측대는 경계 관리실 소속입니다. 공식 대조 심사를 신청하면 행정적으로는 각각 다른 원장을 보존하도록 요구할 수 있어요.”
수현은 서류를 보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수십 번의 기록 조회 끝에 어느새 자신이 수사관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사관이 아니었다. 검증할 방법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보존함을 강제로 열게 만들 권한은 없었다.
“각 기관이 자기 기록의 원본인지 증명하게 하면 되겠네요.”
“그 정도는 신청할 수 있습니다.”
***
두 번째 기록의 작성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기술관리청은 개인 이름 대신 당시 직책과 소속만 제공했다. ‘제0종점 사후 점검반 부기록원.’ 수현은 그 사람이 남긴 문서가 현재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일부 원본은 기술관리청 보관, 일부 현장 수기는 유족에게 반환. 유족이라는 단어에 수현은 잠시 멈췄다. 지난번 정비반장 손녀 마리엘을 만났을 때처럼, 살아 있는 가족에게 오래전 사건은 기록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유족에게 처음부터 찾아가진 맙시다.”
세드나가 물었다. “공식 원본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당장 저희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가족의 물건을 열어 달라고 할 순 없어요. 먼저 행정 문서에서 사실이 확인되는지 보죠.”
루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 기록끼리도 대조할 게 많습니다.”
그날 오후 그들은 사후 점검반의 장부 표지를 열람했다. 보존 등록 때 찍힌 원본 인장은 관측대 것과 달랐다. 하지만 본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은 아직 없었다. 수현은 범위를 좁혀 ‘현장 확인 여부와 보존물 인수 여부’만 조회했다.
기다리는 동안 기술청 복도에는 교대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단 한 사람만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서류 더미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인 젊은 서기였다.
“퇴근 안 하세요?” 수현이 물었다.
“내일 위원회 심사라서 준비 중입니다.”
“대신할 사람은 없나요?”
“제 담당이라 제가 해야죠.”
수현은 낯익은 대답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한국에서도 그런 말이 있었다. ‘이건 네가 제일 잘 아니까.’ 잘한다는 말이 오래도록 집에 못 가도 된다는 허가증으로 쓰였다.
“준비 자료 목록을 나누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업무도 있지 않겠어요?”
서기는 처음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외부인이 왜 내 일을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수현은 물러났다. “제가 참견할 권한은 없어요. 그냥 지난번에 복원실 직원이 쓰러지는 걸 봐서요.”
그 말을 듣자 서기는 잠시 표정을 바꿨다. “그 사람 이야기 들었어요. 우리도 서명 목록을 작성하는 사람이 저 혼자입니다. 다른 직원은 절차를 몰라요.”
“그럼 절차가 문서로 없는 거네요.”
“있긴 한데 알아보기 어려워요.”
“그건 없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만들 때가 있죠.”
서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부서장에게 업무 분담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수현은 그 부탁이 실제로 통할지 몰랐다. 다만 서기가 다시 앉을 때 어깨를 조금 펴는 것을 보았다.
***
저녁에 공개된 첫 조회 결과는 기대보다 짧았다.
‘현장 답사 실시: 예. 실물 수거: 부. 현장 위험 표식 설치: 예.’
수현은 관측대 기록과 나란히 놓았다. 둘 다 그곳에 누군가 갔다는 기록이 있었다. 실물 수거는 없었지만 두 원장 모두 위험 표식을 설치했다고 되어 있었다.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였다.
“같은 현장을 봤다고 말할 수는 있을까요?”
“아직은요.” 루세가 답했다. “관측대가 남긴 표식을 기술청이 확인했을 수도 있고 기술청이 먼저 세운 표식을 관측대가 봤을 수도 있습니다.”
세드나가 정리했다. “독립적인 현장 확인이라고 주장하려면 두 기관이 서로의 정보를 받기 전에 각각 무엇을 관찰했는지를 알아야겠네요.”
“그렇습니다.”
수현은 이번에는 다급하지 않았다. 질문을 하나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진전이었다.
***
그날 오후 수현은 왕도 옛 경계석을 설치했던 장인 조합의 작업 규정을 확인했다. 오래된 책방 주인이었다는 조합원 하나가 아직 기억하는 내용이 있다고 해 찾아가기로 했다. 담당자가 허가한 것은 일반 작업 방식에 대한 면담이었다. 특정 사건의 증인을 만나러 가는 것과는 달랐다.
장인은 작은 마당에서 굽은 쇠자를 닦고 있었다. 이름은 히르만이었다. 그는 누군가 표식을 묻자 곧바로 대답했다. “말뚝을 땅에 박은 사람과 그 위치를 기록한 사람은 달랐어요. 돌이 무너질 때 책임을 서로 떠넘기지 못하게 하려고요.”
“그러면 설치자 두 사람이 모두 표식에 서명했나요?”
“대개는 그랬지만 급할 땐 책임자가 확인서를 대신 냈죠. 그 확인서를 누가 실제로 받아 적었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수현은 그 말을 곱씹었다. 에린의 이름이 문서에 남아 있어도 실제 서류 작성자가 다를 수 있는 것처럼, 표식의 설치자 이름과 인계 확인자도 다를 수 있었다. 히르만은 더 묻는 것을 피했다. 실제 사건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고, 수현 역시 억지로 기억을 끌어내려 하지 않았다.
“표식을 두 개 세울 때는 어떤 규칙을 썼나요?”
히르만은 마당의 젖은 흙에 두 개의 선을 그었다. “하나는 위험 구역의 시작, 하나는 관찰 가능한 지점. 멀리서 보면 같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할이 달라요. 관측대와 수리조가 서로 다른 말을 쓴 건 그 때문일 수도 있죠.”
“그럼 문장 하나만으로 같은 사건인지 단정하면 안 되겠네요.”
“그런 걸 문서 담당자가 잘 알아야지.”
수현은 웃었다. “그래서 배우러 왔습니다.”
면담 뒤 히르만의 며느리가 따뜻한 수프를 내왔다. 그는 허리가 아파 무거운 장비를 옮기지 못한다고 했다. 손주들이 일을 대신하고 있지만 날씨가 좋지 않으면 일감이 줄어들어 임금이 적다는 사정도 들었다. 수현은 자신의 조사 때문에 가족의 시간을 빼앗지 않으려고 오래 머물지 않았다. 면담을 한 시간으로 제한하고 정해 둔 사례비를 지급했다.
“이런 이야기에도 값을 받는 게 어색하군.” 히르만이 말했다.
“기억을 꺼내는 데도 시간이 들잖아요. 그리고 공방 일을 멈추셨으니까요.”
장인은 금속 동전을 잠시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넣었다. 수현은 이 세계에서 차츰 돈의 단위를 익혀 가고 있었지만 값의 의미는 여전히 자신이 살던 세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세드나는 수현이 개인 조사 비용을 별도로 기록하는 방식을 칭찬했다. 수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는 원정대가 모든 걸 부담하는 것처럼 계산됐잖아요. 제가 집에 돌아갈 길을 찾는다고 누군가의 보급비를 빼앗을 수는 없어요.”
루세가 물었다. “그러면 돈이 부족해지면 조사를 멈출 건가요?”
“그럴 수도 있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고요. 그렇다고 남의 노동을 공짜로 쓸 수는 없으니까.”
세드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길드 계약관리실 직원으로서 오랫동안 비용 규정을 지켜 왔다. 이제는 비용이 어느 사람에게 붙는지까지 확인해야 한다는 수현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여관으로 돌아와 그들은 히르만의 설명을 목록에 적었다. ‘일반 설치 관행. 사건 직접 증언 아님.’ 수현은 그 문구를 굵게 표시했다. 언젠가 누군가 이 자료를 검토하더라도 장인의 말이 그날의 직접 목격담으로 바뀌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었다.
기록을 닫으려는 순간 세드나가 물었다. “그런데 수현 씨는 왜 매번 이렇게 마지막 문구까지 고칩니까?”
수현은 잠시 고민했다. “사람은 말로도 다쳐요. 틀린 이야기 하나가 오래 남으면 나중에 바로잡기가 더 어렵거든요.”
창밖에서는 밤 종이 울렸다. 수현은 오늘 작성한 면담 확인서에 자신의 이름과 열람 날짜를 적었다. 이번에는 그 서명이 그저 오늘의 책임을 뜻했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먼 세계로 보내는 승인이 아니었다.
***
그날 밤, 그녀는 기록을 보다가 기묘한 차이를 발견했다. 관측대의 현장 표식은 ‘흙 위의 얇은 판 윤곽’이라고 되어 있었다. 기술청 점검반의 표식에는 ‘마른 땅 위의 평평한 사각 압흔’이라고 적혀 있었다. 표현만 다르게 같은 보고를 베낀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위치 표기가 달라요.” 수현이 말했다.
루세는 창가에 붙여 둔 두 장의 작은 지도를 내려다봤다. 관측대는 북쪽 담장 바깥을 가리켰고, 점검반은 남서쪽 배수로 근처였다.
“거리상으로는 꽤 멀어요. 표준 지도에서 한 칸이 대략 서른 걸음 정도니까.”
“그러면 흔적이 두 군데였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말하기 전에 기준점을 봐야죠. 담장 기준과 배수로 기준이 같은 좌표계를 쓰는지도 확인해야 해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익숙한 절차였다. 같은 숫자가 다른 일을 뜻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숫자가 같은 장소를 가리킬 수도 있었다.
곧이어 하웬에게서 작은 꾸러미가 도착했다. 당시 현장 표식 규정의 부록이었다. 부록에는 특정 위험 구역에서 나무 말뚝을 남쪽이 아니라 북쪽을 바라보게 꽂도록 했다는 문장이 있었다. 관리실과 기술청은 같은 구역에 서로 다른 방향 기준을 적용해 왔다.
“아.” 루세가 낮게 탄식했다. “두 장소가 겹칠 수도 있겠네요.”
“확인할 방법은요?”
“경계 관리실의 기준점 원장을 하나 더 봐야 합니다. 현재 현장에 가서 측량하는 건 도움이 안 될 수 있어요. 담장이 몇 번이나 옮겨졌으니까.”
***
수현은 그날 기록 제목을 바꿨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증언’이라고 적었던 초안을 지우고 ‘서로 다른 두 기관에 남은 현장 기록’이라고 고쳤다. 말은 비슷해도 의미는 크게 달랐다.
바로 그때 기술관리청에서 추가 회신이 왔다. 사후 점검반은 현장 출동 전에 관측대의 통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따라서 두 기관의 관찰은 최초 출발 단계부터 독립적이지 않았다.
수현은 아쉬움에 어깨가 내려갔다. 그러나 루세는 새로운 줄을 짚었다.
‘통지 내용: 경계 변동 한 건. 현장 물체 관련 설명 없음.’
“물건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는 뜻이겠네요.”
“적어도 공문에 물건 설명은 없었다는 거죠.”
수현은 잠시 창문 밖을 보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생각보다 더 천천히, 기록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 조회에서 확인할 것은 분명해졌다. 기술청 점검반이 현장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문서에 적힌 사각형의 정체가 아니라, 그것을 발견한 시점과 방법이었다.
그리고 통지서의 끝에는 한 문장이 있었다.
‘당시 두 기관의 현장 표식 원본은 낡은 북측 경계석 보존실로 이관.’
***
수현은 히르만의 진술을 정리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려 했다. 그런데 문득 장인이 현장에서 표식을 세울 때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는지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다시 찾아가지는 않았다. 질문을 덜 했다는 이유로 남의 저녁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대신 다음 면담이 실제로 필요할 때 물어볼 항목에 적었다.
‘표식이 잘못 설치됐을 때 정정 권한과 중단 요청 경로.’
노무 상담에서도 비슷했다. 현장에서 일하던 직원에게 무엇이 불편한지만 물으면 답이 자주 끊겼다. 문제를 보고하고 멈출 수 있는 통로가 있었는지 묻자 훨씬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그 통로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규정을 만들어도 문제가 반복됐다.
수현은 세드나와 다음 날 조사 일정을 검토했다. 기술관리청의 원본 보존 담당, 경계 관리실의 당시 기준점 기록, 중단 요청 수신 대장. 방문해야 할 곳이 셋이었다. 그녀는 그중 직접 가지 않아도 되는 자료는 공식 조회로 요청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조사하면서 제가 가장 많이 바꾼 건 여행 계획인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는 허가서가 뭔지도 모르셨죠.” 세드나가 웃었다.
“그때는 용사한테 두 시간 쉬라고 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은 잠시 카이렌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사건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거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현은 아직 그 첫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잠깐 재우기 위해 시작한 일이 결국 수많은 사람의 서류에 작은 빈칸을 되찾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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