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종점 수리일지 제1권을 가지고 있다는 유족의 답장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도착했다. 편지가 아니라 사람을 보냈다. 항만서고에 나타난 젊은 여자는 낡은 갈색 가방을 놓고 자신을 노아의 조카가 아니라 전 정비반장의 손녀, 마리엘이라고 소개했다. 수현은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저희 집에 책이 있는 건 맞습니다.” 마리엘이 말했다. “하지만 제가 그걸 전부 보여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조부가 죽기 전에 몇 장을 봉해 두셨거든요.”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여 주지 않으셔도 이유를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마리엘이 놀란 듯 수현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책이 왕국의 재산이라며 가져가겠다고 했는데요.”
“장치의 공적 정비 기록과 가족에게 남긴 개인 글이 함께 들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둘을 구분하려는 겁니다.”
세드나가 공적 기록에 대한 제한 열람 신청서와 가정의 개인 기록을 보호하는 절차를 설명했다. 마리엘은 잠시 생각한 뒤 다음 날 항만서고의 보존관 입회 아래 공적 장부 부분만 먼저 확인하도록 허락했다. 가족 이야기가 적힌 부분은 가리기로 했다.
수현은 감사 인사를 했다. 돌아갈 길을 찾는 일에 처음으로 누군가의 가족이 자신의 의지로 문을 열어 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문은 기계의 문이 아니라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작은 허락이었다.
***
다음 날 보존관 입회 아래 책이 펼쳐졌다. 제1권의 종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일부 페이지에는 물이 번져 글자가 흐렸지만, 장치 구동축의 점검 시간과 교대 직원 이름은 남아 있었다. 수현은 먼저 자신이 확인하고 싶은 세 항목을 소리 내어 말했다. 결합핀 실물 상태, 장치에 마력이 흐른 흔적, 중단 요청을 언제 처리했는지.
보존관은 서두르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 문장 사이에는 마리엘의 조부가 남긴 개인 기록도 있었다. 가족 이름이 나오면 종이를 덮었고, 수현은 그 부분을 보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건 당일 정비란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인체 접속 축과 독립 신호 축 분리'라고 적혀 있었다. 수현의 숨이 잠깐 멎었다.
“인체 접속 축이 분리되어 있었다면 사람을 이동시킬 수 없었던 건가요?”
루세가 문장을 오래 읽었다. “그렇게 단정하면 안 됩니다. 이 장치가 사람의 실제 이동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직 모르니까요. 하지만 당시 적어도 이 종점에서는 축을 분리하라는 작업 지시가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 줄에는 다른 필체로 '분리 완료 확인 서명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시만 있고 확인이 없다는 거네요.” 수현이 말했다.
“맞아요.”
수현은 속으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누군가 멈추라고 했고, 누군가 나누라고 했으며, 끝내 누가 그 일을 했는지 확실히 적지 않았다는 기록. 자신이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그 공백의 한쪽에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
이어진 장에는 세 가지 색의 잉크가 있었다. 검은색은 정비 지시, 붉은색은 긴급 반응, 푸른색은 나중에 대조한 결과라고 했다. 푸른색으로 적힌 날짜를 사건 당시 기록인 것처럼 읽으면 안 된다는 표시도 있었다.
수현은 중요한 문장을 발견했다. '비상 분기 E-17, 종점 반응 한 차례 감지. 지속 구동 없음. 제2차단함 경로 확인 요청.'
“반응은 실제로 있었다는 거죠?”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언제 측정했고 어떤 계기로 생겼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지속 구동 없음이라는 건요?”
“설정된 운용 상태가 유지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증명하지는 않죠.”
책을 더 넘기자 다음 장의 일부가 찢어져 있었다. 마리엘은 그 페이지가 자기 가족이 가져갈 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보존관은 손상 상태를 먼저 촬영하고 남은 부분의 표기를 판독했다. 가장자리에는 ‘경계 유입의 불명 대상 접수’라는 말이 남아 있었다.
수현의 손이 떨렸다. 루세가 곧 말했다. “유입이라는 기술 용어가 꼭 사람의 도착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외부 신호나 물품의 반입을 가리키기도 해요.”
“알아요.”
“그런데 떨고 계십니다.”
“제가 이 세계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자꾸 저 문장이 저를 말해 주길 바라게 돼요.”
루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그녀가 그런 마음을 품는 것까지 금지할 수는 없었다.
***
오후에는 보존관이 찢어진 장의 대응 번호를 찾았다. 종점 수리일지 본문에서 빠진 문서가 기술관리청 별지와 동일한 인계 번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세드나가 그 번호를 이전에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제0종점에 붙어 있던 경계 유입 감지판이었다.
그들은 기술관리청 기록과 대조했다. 마력 반응이 한 번 있었다는 사실은 두 자료에 모두 존재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자료는 첫 번째에서 복사했을 수도 있었다. 서로 다른 기계가 각각 측정했다는 증명은 되지 않았다.
수현은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이 사건의 실제 기술 기록으로서 최소한 무엇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루세는 종이에 네 줄을 썼다. 제0종점에서 비상 분기 E-17 반응이 한 차례 기록됐다. 인체 접속 축 분리 지시는 존재한다. 분리 완료 확인은 없다. 반응 지속과 실제 사람의 이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세드나가 마지막에 한 줄을 더했다. '중단 요청과 비상 분기 처리의 선후 시각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수현은 그 문장을 읽고 펜을 내려놓았다. 자신을 이 세계에 데려온 기술을 밝혀냈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 보고서의 '집행 완료'라는 단어가 실제로 어떤 근거 위에 서 있는지는 한층 선명해졌다. 완료라고 적힌 사건에도 완료를 증명할 서명이 없었다.
마리엘은 문서를 다시 포장하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날 이야기를 가족에게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멈춘 기계는 다시 켤 수 있지만 떠난 사람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하셨죠.”
수현은 그 말을 자신의 이야기로 해석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마리엘의 가족에게는 또 다른 사고와 후회가 있었을 수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감사하다고 말했다.
마리엘은 보존실 면담이 끝난 뒤 수현을 밖으로 불렀다. 그녀는 가방에서 한 장의 낡은 사진을 꺼냈다. 실제 사진은 아니었다. 작은 마석으로 순간의 모습을 얇은 금속판에 새긴 그림이었다. 수리반 직원들이 낡은 장치 앞에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마리엘의 조부였다.
“할아버지는 늘 맨 뒤에 서 계셨어요.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위험한 곳에 먼저 들어갔다고 하셨죠.”
수현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보았다. 작업복에 붙은 이름표는 너무 작아 읽을 수 없었다. 장치의 외형도 옛 도면과 닮았지만 동일 장치인지 확정하기 어려웠다.
“이 사진을 증거로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뇨. 제가 왜 이 일을 오랫동안 싫어했는지 설명하고 싶어서요.”
마리엘은 조부가 돌아온 날마다 말수가 적어졌다고 했다. 조부는 한 번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장치를 멈췄다고 말했고, 다른 날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무엇이 늦었다는 건지 끝내 묻지 못했다.
수현은 그 이야기를 자신의 E-17 사건과 연결해 쓰지 않았다. 가족의 기억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특정 기계의 작동 원리를 증명하는 자료는 아니었다. 마리엘이 들려준 말을 듣고 나서도 수현은 조부의 말을 그대로 사용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가족에게 하신 말씀으로만 남겨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금속판을 다시 넣었다.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수현은 자신이 찾는 답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외면하고 싶은 기억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자신이 집에 돌아가는 것만큼, 이 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꺼낼지 말지 결정하는 일도 소중했다.
보존실로 돌아오자 루세가 종점의 구동축 분리 지시와 완료 확인 누락을 요약해 놓았다. 그는 또 다른 자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중단 요청이 수신됐는지 기록한 판과 실제 차단기의 상태를 남긴 판을 독립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현은 지금까지 모은 문서를 세 묶음으로 나눴다. 사람의 동의에 관한 행정 자료, 장치의 작동 흔적, 실제 도착이나 유입 여부를 판단할 접수 자료. 세 묶음 중 첫 번째에는 꽤 분명한 결론이 있었다. 자신의 사전 동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고, 메이의 최초 민원은 강제 소환을 승인하지 않았다. 둘째 묶음에는 한 차례의 기술 반응 흔적이 있었다. 셋째 묶음은 아직 거의 비어 있었다.
“이제 세 번째를 찾아야겠군요.” 세드나가 말했다.
“네. 그리고 둘째에서 보지 못한 부분도 계속 확인해야죠.”
수현은 한 가지를 더 강조했다. “실제 도착 기록을 찾았다고 제 개인정보를 전부 공개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 이름을 모르던 사람이 적은 기록이라면 그 표현을 그대로 확인하고 싶어요.”
루세는 동의했다. 조사 대상이 당사자인 수현이라고 해서 모든 기관이 그녀의 출신 주소를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두 사람은 경계 유입 관리실 원장을 열람할 경우 식별 가능한 부분을 단계적으로 대조하자는 원칙을 정했다.
그날 저녁 왕도 기록실의 젊은 직원이 편지를 가져왔다. 기술서고에서 실시한 비파괴 시험의 결과를 공개하려면 담당자에게 추가 업무가 발생한다고 했다. 직원은 야간까지 일하게 될까 봐 걱정했다.
수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물었다. “정해진 근무 시간에 처리할 수 있는 작업과 긴급하게 필요한 작업을 구분해 주실 수 있나요?”
“대부분은 긴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위에서 빨리 내라고 하니까요.”
“그럼 이 신청은 일반 검토 일정으로 처리해 주세요. 제가 빨리 보고 싶다는 이유로 당신이 밤새 일할 필요는 없어요.”
직원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수현은 자신이 그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급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의 휴식 위에 자신이 돌아갈 길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수현은 저녁을 먹고 나서 오래된 수첩을 펼쳤다. 첫날엔 겨우 두 시간의 휴식을 얻어 내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그 휴식을 지키기 위해 함께 기록하고 있었다. 자신이 떠나도 남을 변화와, 자신이 떠나기 위해 꼭 찾아야 할 증거. 둘은 이제 같은 장면에 겹쳐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
저녁에 메이와 카이렌, 라비엔의 편지가 한꺼번에 도착했다. 메이는 남은 청구 중 수령 불명 약재가 추가 검토 대상으로 분리됐다고 했다. 카이렌은 자신의 의료기록을 조금 더 읽되 당장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라비엔은 북방에서 근무 시간 일부를 정산받기로 했으며 최종 금액은 아직 계산 중이라고 썼다.
수현은 편지 세 통을 펼쳐 놓았다. 누구도 그녀가 원할 때까지 기다리는 인형처럼 멈춰 있지 않았다. 다들 자기 삶을 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세드나가 물었다. “오늘 소득이 있었습니까?”
“있었죠. 기계가 실제로 반응한 기록과, 그 반응이 사람의 이동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란히 확인했어요.”
“그런데 표정이 많이 복잡합니다.”
“제가 원하는 답에 조금 가까워진 것 같으면서, 답이 훨씬 조심스러워졌거든요.”
루세는 마지막으로 읽지 못한 손상 장의 뒷면을 확인하기 위한 비파괴 복원 신청서를 내밀었다. 그 장에는 종점이 아닌 '경계 유입 관리실'의 인계 도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제0종점과 다른 부서의 원본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다.
“다음은 어디입니까?” 수현이 물었다.
“경계 유입 관리실입니다. 현재는 폐지됐고 기록은 왕도 중앙 회복·안전 서고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수현은 입술을 깨물다가 웃었다. “또 서고네요.”
“이제 놀랍지도 않으시죠?”
“조금은요. 그래도 이번에는 왜 가야 하는지 알아요. 반응을 기록한 쪽 말고, 실제로 무엇이 들어왔다고 접수한 쪽의 원장을 확인해야 하니까요.”
숙소로 돌아가며 그녀는 꺼진 휴대전화를 한 번 쥐었다. 서울에서 자신이 사라진 날 누군가 보고서를 썼을까. 사람의 실종과 기계의 기록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없어진 사실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이곳에도 그런 기록이 있기를 바랐다.
수현은 마지막 신청서에 자신의 서명을 했다. '경계 유입 관리실의 비식별 접수 원장 존재 여부 확인 및 E-17 대응 표식 대조 요청.' 그리고 그 아래, 이제는 익숙해진 문장을 적었다. '본 신청은 장치의 재가동 또는 인체 이동 실험에 대한 동의가 아닙니다.'
서명 위로 등불이 흔들렸다. 돌아갈 문은 아직 없었다. 다만 문을 찾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가 이전보다 조금 또렷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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