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렌은 의무실에 들어서기 전에 두 번 숨을 골랐다. 괴물 앞에서 검을 뽑을 때보다 손에 든 한 장의 열람 동의서가 더 무거웠다. 서류에는 자신이 열람할 수 있는 범위가 적혀 있었다. 사건 당시의 체온과 맥박, K형 장치의 출고 기록, 그리고 의식을 잃었던 사흘 중 둘째 날의 치료 기록.
“나머지는 오늘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담당 의사 리벨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중단하고 싶으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카이렌은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었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의무실에서 멈추고 싶다는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왕국의 용사가 치료 기록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시대가 올 줄은 몰랐다.
메이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기록의 내용을 미리 확인하지 않았다. 카이렌이 필요하다면 동행해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었다. 치료사라고 환자의 모든 비밀을 볼 권리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첫 기록은 평범했다. 고열, 탈수, 맥박 불규칙. 그 다음 장에 '저온 유지'라는 말이 나왔다. 카이렌의 시선이 멈췄다.
“왜 차갑게 했습니까?”
리벨은 문장을 읽고 말했다. “이 문서만으로 방법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과열된 신체를 식혔을 수도 있고, 치료실의 온도를 낮게 유지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카이렌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의 흰 고리 흉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그 표식이 추위와 관계있는지 생각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감각이 이상하다는 기억과 원인에 관한 지식은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물 냄새는 기억납니다.”
메이가 그를 보았다. “그때요?”
“모르겠어요. 제가 아팠을 때인지, 그 전에 강을 건넜을 때인지.”
리벨은 기록하지 않았다. 카이렌이 묻자 의사는 설명했다. “원하시면 진술란에 적겠습니다. 다만 시기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말도 함께 써야 해요.”
카이렌은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적어 주십시오.”
***
두 번째 장에는 K형 안정 장치 사용 대기 표식이 있었다. 의료 창고에서 장치 하나를 출고했지만 환자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리벨은 재고 출고와 환자에게 실제 부착했다는 기록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 장치가 저에게 쓰였다는 기록은 없군요.”
“현재 열람된 범위에는 없습니다.”
“그럼 제가 소생했다는 소문도 증명되지 않는 거고요.”
“네. 게다가 소생 자체를 전제로 질문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의식이 없었다는 사실과 사망했다는 사실은 별개입니다.”
카이렌은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 빠지는 걸 느꼈다. 자신이 죽었다 살아났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영웅답게 들린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믿기 시작한 뒤로 몸이 아플 때마다 생명을 빚졌다는 생각이 따라붙었다. 누군가가 지불했다는 비용을 갚기 위해 계속 싸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기록을 천천히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메이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모르는 걸 안다고 할 필요도 없겠네요.”
리벨은 카이렌에게 열람 종료 시간과 다음 예약 가능일을 알려 줬다. 담당 의사는 통증이 심해질 때의 대처 방법도 다시 확인했다. 카이렌은 종이에 직접 적고 소리 내어 읽었다. 치료를 받는 일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이 아직도 낯설었다.
***
오후에는 제7원정대의 훈련이 있었다. 카이렌은 훈련장을 둘러보다가 젠이 궁수 둘에게 쉬는 시간을 안내하는 모습을 봤다. 예전에는 실력 좋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연습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누구든 몸이 굳으면 마무리 사격 전에 쉬어야 했다.
“저도 한 번 쏴 볼까요?” 카이렌이 물었다.
젠이 활을 내려놓았다. “의사 선생님이 허락하셨습니까?”
“검이 아니라 활인데.”
“그 말씀, 감독관님이 들으시면 기뻐하시겠네요. 활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신다고.”
카이렌은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오늘은 구경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후 훈련표를 봤다. 휴가 대체 인력이 실제로 적혀 있었고, 각자 쉬는 시간에 현장을 떠날 수 있는지도 표기되어 있었다. 메이는 응급 치료 대기와 일반 약재 정리를 분리해 새로운 치유사 보조에게 일부 업무를 넘기기 시작했다.
브레그 감독관은 문 앞에서 얼굴을 찌푸렸다. “서류가 늘어서 일하는 시간이 더 든다.”
“대신 다친 사람 때문에 급히 바꾸는 일정은 줄었잖습니까.” 데런이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브레그는 쉽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반대할 자료도 없었다. 젠이 한 달 동안의 지연 출정 건수와 부상 복귀 시간을 정리해 보여 줬기 때문이다. 카이렌은 수현이 있었다면 이 장면을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그 생각을 고쳤다. 수현이 없어도 이들은 지금 할 일을 정하고 있었다.
***
그날 저녁 오르카가 북방에서 온 편지를 가져왔다. 라비엔이 정산 회의 날짜를 확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카이렌은 편지를 접으며 말했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돌아오라고 더 많이 말했더라면 오히려 더 멀어졌을지도 모르겠군요.”
오르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싸우던 시절에는 라비엔의 체력을 믿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믿어야죠.”
카이렌은 자기 책상에 놓인 미완료 의료 열람 신청서를 보았다. 남은 정보는 언젠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당장 보지 않는 선택도 자신의 것이었다.
그는 작은 종이에 수현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둘째 날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제가 차가운 치료실에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소생됐다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다음 열람은 제 몸 상태를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원정대는 제가 쉬는 날에도 잘 돌아갑니다.’
마지막 한 줄에서 카이렌은 손을 멈췄다. 영웅이 없는 동안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를 만드는 것. 수현이 처음 원정대에 왔을 때 말한 '쉬는 중입니다'가 이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원칙처럼 느껴졌다.
메이가 작은 컵을 가져왔다. 뜨거운 차였다. 카이렌은 컵을 받다가 손등의 흰 고리를 다시 보았다. 그 흉터가 무엇을 뜻하든 지금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오늘은 훈련 안 하셨어요?” 메이가 물었다.
“구경만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발전이네요.”
“치료사가 칭찬하니까 괜히 더 뿌듯하군요.”
두 사람은 웃었다. 창밖에서는 늦은 훈련을 마친 궁수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카이렌은 누구에게도 남아서 보고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다들 잘 먹고 잘 쉬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데 검도 마법도 필요하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카이렌은 혼자 작은 식당에 갔다. 예전에는 식사하는 동안에도 출정 보고를 읽곤 했다. 오늘은 의사가 정해 준 식사 시간을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수저를 들자마자 전령이 들어왔다. 북쪽 수로에서 마물 흔적이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카이렌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젠이 그보다 먼저 전령에게 질문했다. “실제 침입이 확인됐습니까, 아니면 흔적만 있습니까?”
“흔적입니다. 정찰대가 확인 중입니다.”
“그럼 현재 비상 단계는 아닙니다. 정찰 보고가 오면 계획대로 교대 인력에게 전달하세요.”
전령은 카이렌을 바라봤다. 카이렌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앉았다. “젠의 말대로 하세요. 확인되지 않은 일 때문에 모든 사람이 뛰어가면 정작 필요할 때 쓸 힘이 남지 않습니다.”
메이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장면을 봤다.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첫날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용사와 지금 아침 식사를 계속하는 용사는 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행동의 순서가 달라졌다.
그날 낮 젠은 새로 들어온 정찰병들에게 보고서를 쓰는 방법을 알려 줬다. '마물 있음' 대신 '발자국 두 개 확인, 시각과 위치 기록, 종류 미확인'이라고 적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카이렌은 그 옆에서 질문을 받았다.
“용사님이 바로 나가지 않으셔도 됩니까?” 신입이 물었다.
“그럴 수 있도록 교대 인력을 만드는 거예요.”
“그럼 위험이 커지면요?”
“그때는 위험 단계에 맞게 움직이죠. 지금의 휴식을 전부 없애는 게 용기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신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젠은 훈련표에 실무 예시를 추가했다. 자신이 쉬는 날에도 사용할 수 있는 표준 문구여야 했다.
오후에는 카이렌이 다시 의무실에 갔다. 기록을 새로 열람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제 느낀 불안에 관해 의사와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리벨은 사흘의 공백 자체가 신체적인 문제인지 기억 문제인지 현재 기록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필요한 검사를 제안하되 카이렌이 동의하는 범위를 먼저 확인했다.
카이렌은 손등의 흰 흉터를 보여 줬다. 의사는 오래된 피부 변화라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카이렌은 잠깐 얼굴이 어두워졌다. 많은 사람이 그 흉터를 영웅의 증거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부활한 용사에게만 나타나는 표식이라고도 했다.
“그 말들이 다 틀렸다는 겁니까?”
“옳다고 확인할 근거가 없다는 겁니다.”
카이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그 말이 모욕처럼 들렸다. 자신이 겪은 고통이 부정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벨은 그 고통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원인을 모른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럼 저는 그 공백을 갖고 계속 살아야 하겠군요.”
“어쩌면 추후에 더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이 오늘 살아가는 일까지 멈출 필요는 없죠.”
카이렌은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수현이 들었다면 또 기록할 문장이라고 했을 것이다.
저녁 훈련이 끝난 뒤 오르카가 카이렌에게 물었다. “예전 같으면 오늘 정찰에 먼저 나갔을 텐데, 안 나가니까 불안하지 않았습니까?”
“불안했습니다.”
“그런데도요?”
“정찰대 보고가 왔을 때 젠이 정확히 처리했고, 마물이 아니라 큰 야생동물 흔적이었다는 걸 알았죠. 제가 무작정 뛰어갔다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이 생겨도 대응할 사람이 줄었을 겁니다.”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이 쉬는 것도 훈련이군요.”
“그러게요. 제가 가장 못하던 훈련입니다.”
카이렌은 밤에 메이에게 환자 기록을 읽다가 불안해질 때 어떻게 견디느냐고 물었다. 메이는 모르는 사실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답했다. 카이렌은 그 답을 오래 생각했다.
다음 날의 훈련표에는 카이렌 이름 옆에 ‘정기 휴무’가 적혀 있었다. 그는 예전처럼 그 글씨를 지우지 않았다. 자기 이름이 적힌 기록에서 빠져나와도 제7원정대는 유지될 것이다. 그것이 이제 카이렌이 지키고 싶은 진짜 변화였다.
카이렌은 자신의 다음 의료 열람을 한 주 뒤로 잡았다. 그 사이에 몸 상태를 기록하는 수첩을 따로 만들기로 했다. 수첩에는 아침과 저녁의 통증 정도, 잠을 잔 시간, 훈련에 참여했는지 여부를 적었다. 그는 처음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이 희미한 과거 때문에 현재의 몸을 소홀히 다뤄 온 자신을 떠올리자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메이는 하루치 기록을 보고 말했다. “지금 통증을 적는다고 옛날 일이 바로 밝혀지진 않아요. 그래도 앞으로 치료하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카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다쳤다는 걸 적으면 출정에서 빠질까 봐 숨겼습니다.”
“지금은요?”
“아픈 걸 숨겼다가 더 오래 쉬어야 하면 그게 더 큰 문제라는 걸 알았죠.”
두 사람은 잠시 웃었다. 그날 제7원정대 게시판에는 휴가 대체 업무의 순서와 응급 출정 기준이 새로 붙었다. 대원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번거롭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실제 출정이 필요해졌을 때 누구에게 먼저 연락해야 하는지 찾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카이렌은 당일 보고를 마치고 휴게실에 앉았다. 신입 대원 둘이 체력 훈련을 더 하고 싶다며 다가왔다. 그는 먼저 오늘 훈련량과 몸 상태를 물었다. 무조건 더 하라고도, 무조건 쉬라고도 하지 않았다. 대원들이 자신의 상태를 보고 결정할 수 있도록 기준을 설명했다. 용사의 책임이란 남보다 오래 달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래 달릴 수 있는 원정대를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저녁에는 데런이 돌아와 마차 수리 비용을 보고했다. 카이렌은 비용보다 먼저 담당자의 부상 여부를 물었다. 데런은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오늘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바퀴 하나를 교체했습니다.”
“잘됐군요.”
“예전엔 바퀴값 때문에 혼났을 텐데요.”
카이렌은 잠깐 생각했다. “고장 난 바퀴를 그대로 썼다가 마차가 뒤집히면 더 큰 비용이 들겠죠. 사람도 다치고요.”
그는 휴가 신청서를 눈앞에 놓았다. 영웅인 자신이 하루 쉰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검을 휘두르는 기술보다 오래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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