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기술관리청의 부품 보관창고는 기계 냄새보다 먼지 냄새가 짙었다. 수현은 분명 어제 본 운송함의 봉인 이력을 찾으러 왔는데, 창고 벽에 걸린 지도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빨간 줄은 운반로, 파란 줄은 보수관의 통로, 검은 선은 창고가 폐쇄됐을 때만 사용하는 비상 통행로라고 했다.
“이 길이면 열 걸음인데 왜 창고 둘레를 돌아가죠?” 수현이 물었다.
담당 벨라는 지도 아래를 가리켰다. “가까운 길은 구형 차단실을 통과합니다. 그 방에는 인계받지 않은 마석 접속부가 남아 있어요.”
“짧다고 안전한 길은 아니군요.”
“예전에 누군가 지름길로 갔다가 팔을 다쳤습니다. 그 뒤로 바뀐 거예요.”
수현은 지도 구석에 날짜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규칙을 바꾼 이유가 있어도 새로운 사람이 그 규칙을 언제부터 따라야 하는지 모르면 사고가 다시 난다. 벨라는 아직 정식 지침서가 수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수현은 안전담당에게 현행 안내문 갱신 요청을 보내도 되는지 물었다. 벨라가 직접 보내겠다고 답했다.
운송함을 열람할 때에는 두 사람의 입회가 필요했다. 함은 비어 있었다. 대체 결합핀을 보냈다는 표식만 남아 있었고 실제 핀은 다른 부서가 인수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인계 목적란은 '교정용 부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느 기계에 넣었다는 뜻은 아니군요.”
“네.” 루세가 대답했다. “규격이 맞는 부품을 부서에 보냈다는 뜻뿐이죠.”
그들은 부품 형식도를 펼쳤다. 제0종점의 구동축에는 길이가 다른 결합핀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마력 전달축을 잇고, 다른 하나는 신호만 시험하는 소형 연결핀이다. 운송함의 표시에는 두 유형을 구별하는 마지막 획이 닳아 있었다.
수현은 반사적으로 애매한 글자를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 읽고 싶어졌다. 실제 장치가 다시 켜졌다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할 무언가가 나올지 몰랐다. 그러나 '그랬으면 좋겠다'는 감정은 닳은 획을 복구하지 못했다.
***
부품 원본을 확인하려면 항구의 옛 주물 공방 기록을 봐야 했다. 세드나는 그 공방이 현재 개인사업장이라는 점을 다시 알려 주었다. 수현은 미리 방문 가능 시간을 물었다. 공방의 주인 나겔은 오전 작업이 끝난 뒤에만 손님을 받는다고 했다.
나겔은 노년의 대장장이였다. 문이 열리자 따뜻한 쇠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가 내민 의자에 앉은 수현은 자신의 목적을 짧게 설명했다. E-17 당시 대체핀의 형식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으며, 귀환 가능성이나 책임자를 단정하려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나겔은 두 장의 도면을 꺼냈다. “이건 운용축용이고 이건 경보판 검사에 쓰는 겁니다. 모양은 비슷하지만 서로 바꿔 끼울 수는 없어요. 바꿔 끼우면 겉으로는 맞는 것처럼 보여도 홈이 씹혀서 멈춥니다.”
“사람들은 왜 두 개를 같은 이름으로 불렀을까요?”
“관리하는 사람들은 쓰임새를 다 알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나겔은 예전 대체핀 공급 요청서를 찾았다. 주문 수량은 네 개였고, 두 종류가 각각 두 개씩 들어 있었다. 수령처는 기술관리청 공용창고였다. 그가 누구에게 건넸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납품 서류만으로 제0종점에서 쓰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때 공방 뒤편에서 비명이 났다. 젊은 도제가 물통을 옮기다가 뜨거운 바닥에 물을 쏟았다. 증기가 한꺼번에 솟았고 사람들은 잠깐 몸을 피했다. 도제는 자신 때문에 일이 늦어졌다며 바로 걸레를 찾았다.
“잠깐.” 나겔이 그를 불렀다. “손부터 보여.”
도제는 괜찮다고 했지만 손등이 붉었다. 나겔은 의원에 다녀오라며 작업을 중단시켰다. 도제는 오늘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당을 덜 받느냐고 물었다. 나겔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생각보다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수현은 나겔에게 계산을 대신 결정할 생각이 없다고 전제한 뒤, 사고 때문에 즉시 중단한 시간과 원래 예정된 업무를 분리 기록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도제의 치료를 먼저 마치고, 급여나 보상 문제는 양쪽이 계약을 확인한 뒤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나겔은 도제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도 노무사 같은 일을 하시는군.” 나겔이 말했다.
“사람이 일하는 곳이면 비슷한 질문이 생기는 것 같아요. 다만 여기 규정은 저도 배우는 중입니다.”
그날 오후 나겔은 공방 바닥에 길고 짧은 결합핀을 차례로 놓아 보였다. 젊은 도제가 의원에서 돌아오기 전이라 큰 작업은 하지 않았다. 대신 수현과 루세에게 부품이 실제로 끼워지는 과정을 나무 모형으로 설명했다. 무거운 기계를 켤 필요도 없었다.
“보시다시피 이 핀은 구멍이 깊고, 저건 옆면에 홈이 하나 더 있어요.”
수현은 손끝으로 홈을 따라갔다. “오래된 장부에서는 왜 마지막 획 하나로만 구분했을까요?”
“글자를 아끼려 했겠지. 칼 한 자루에 검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편하지만 손잡이 길이나 재질까지 알 순 없잖소.”
루세는 장치 운용판에 적힌 점과 선을 모형의 위치와 비교했다. 결합핀 하나가 바뀌면 내부의 신호 경로는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변화가 실제 송신 성공을 뜻하지는 않았다. 장치 안에 물리적으로 맞는 부품이 있어도 다른 차단기가 열려 있으면 에너지는 흐르지 않을 수 있었다.
수현은 이 설명이 익숙했다. 계약서에 '지급'이라고만 써도 실제 급여가 통장에 들어왔는지, 현물로 제공됐는지, 중간에 공제됐는지는 다시 확인해야 한다. '작동'이라는 말도 그랬다. 버튼을 눌렀는지, 축이 돌았는지, 신호가 나갔는지, 목적지에서 결과가 생겼는지 차례로 나눠야 했다.
나겔은 수현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자네는 기계 수리공은 아니어도 이름을 바로 붙이는 사람이군.”
“이름부터 제대로 붙여야 비용도 책임도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수리조합이 쓰던 구형 부품 대장 견본을 펼쳤다. 대장에는 '재고', '차출', '반납', '시험용 대여'가 다른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해산 당시 작성한 통합 목록에서는 네 칸이 '이동'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합쳐져 있었다.
“또 똑같은 실수네요.” 수현이 말했다.
“아마 이관 담당자는 부품이 없어지지 않도록 세는 게 더 급했겠죠.” 루세가 답했다. “어느 기계에 사용했는지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 결정이 수십 년 뒤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었고요.”
수현은 담당자를 비난하는 문장을 쓰지 않았다. 업무 목적이 달라지며 정보가 줄어든 경위를 조사해야 했다. 구형 원장이 통합될 때 빠진 열을 되살릴 수 있는 다른 문서가 있을지 확인 요청만 남겼다.
잠시 후 의원에서 돌아온 도제가 문 앞에 나타났다.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는 오늘 할당된 일을 마치지 못했다며 눈치를 봤다. 나겔은 자리에 앉으라고 했지만 도제는 앉으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제가 손을 쓰면 더 다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도제가 말했다. “그래도 주인이 시키면 해야 하는 건가요?”
나겔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현도 그를 대신해 답하지 않았다. 이 공방의 계약 조건과 의사의 소견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권리를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다만 안전 문제는 지금 당장 고려해야 했다.
나겔이 결국 말했다. “오늘은 쉬어. 네가 만들다 만 부품은 내가 목록만 정리할 테니.”
“그럼 임금은요?”
“그건 내일 계약을 놓고 같이 확인하자. 네 손을 악화시키면서 오늘 밤 결정할 문제는 아니야.”
도제는 처음으로 어깨를 폈다. 수현은 그 모습이 반가웠다. 쉴 수 있다는 허락과 자신의 보수를 물을 수 있다는 권한이 동시에 주어진 셈이었다.
오후에는 나겔이 작업장 앞 낡은 게시판을 정리했다. 뜨거운 쇠를 다루는 두 사람이 같은 위치에 서지 않도록 바닥 선을 다시 그었다. 젊은 직원들이 그 선의 위치가 실제 동선과 맞지 않는다고 말하자, 나겔은 분필을 건네 직접 그어 보라고 했다. 위험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는 사람들이 참여한 안전 선이었다.
수현은 그것을 보며 제7원정대에서 첫날 메이가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물품을 받지 않았는데도 받은 사람으로 기록돼 있었다. 부품 대장과 사람의 업무 기록은 다르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단순히 편한 칸에 넣어 버리는 문제는 닮아 있었다.
나겔은 헤어질 때 한 가지 정보를 더 알려 주었다. 사건 무렵 경보판 검사용 연결핀을 별도로 재가공한 장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장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납품 장부가 북쪽 공방연합 창고에 남았을 수 있다고 했다. 수현은 적어 놓고도 바로 쫓아가지 않았다. 오늘 확보한 자료만으로도 재고 확인 절차가 더 필요했다.
“또 한 곳이 늘었군요.” 세드나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무 데나 찾으러 가는 건 아니죠.” 수현이 답했다. “이번에는 어떤 기록이 우리에게 답을 줄지 분명해요.”
바닷바람이 공방 앞의 분필가루를 조금 날렸다. 수현은 도제가 휴식 의자에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마차에 올랐다. 자신이 찾는 기계가 한 번이라도 움직였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오늘 적어도 한 사람은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얻었다.
공방 앞에서 나겔은 대체핀을 보관할 새 서랍을 만들겠다고 했다. 두 형식의 핀을 같은 서랍에 넣으면 다음 직원도 같은 혼동을 겪을 수 있었다. 그는 도제에게 나무판에 규격의 이름과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도제는 다친 손 대신 멀쩡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선을 그었다. 수현은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먼저 도제에게 그 일이 괜찮은지 물었다. 도제는 짧게 일한 뒤 쉬기로 했다고 답했다. 이 작은 공방의 변화는 왕국 전체를 뒤집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헷갈리던 부품 두 개가 다른 칸에 놓이는 것만으로도 다음 작업자의 손가락을 지킬 수 있었다. 수현은 그 사실이 좋았다.
그날의 안전점검 기록은 다음 작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출입구 옆에 붙었다.
***
오후에는 루세가 기술관리청에 보낼 대조 의견서를 정리했다. 대체핀 주문 기록과 운송함 표식을 비교했지만 어느 핀이 실제로 어느 장치에 들어갔는지 판단할 근거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수현은 '재가동 불가능'이라는 단정을 쓰지 말자고 했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사실과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르기 때문이었다.
나겔은 헤어지기 전 낡은 수리 견본 하나를 보여 줬다. 핀이 빠진 구동축은 손으로 돌리면 헛도는 소리가 난다. 접점이 살아 있어도 큰 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수현은 실제로 손잡이를 천천히 돌려 보고 그 차이를 느꼈다.
“이걸 보니 장치가 잠깐 신호를 보냈다는 기록과 사람을 이동시켰다는 주장 사이가 얼마나 먼지 알겠어요.”
“맞소. 쇳덩이가 우는 것과 마차가 길을 달리는 건 다르지.”
수현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기계를 아는 사람의 비유는 문서 열 장보다 명확했다.
숙소에 돌아오자 세드나가 보낸 기술관리청 회신이 도착했다. 제0종점의 운용축 결합핀은 사건 전후 재고 대장에서 한 개가 결산되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었다. 단순 분실, 재검사실 보관, 장치에 남아 있음 모두 가능한 상태였다.
“분실이요?” 수현이 물었다.
“장부상 미정리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죠.”
“오늘 확인한 건 빠진 부품 하나가 아니라 빠진 인계 절차네요.”
세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이름이 적힌 장부에서 가장 위험한 건 누락된 한 줄일 때가 많습니다.”
수현은 침대에 앉아 도제가 공방을 나가던 모습을 떠올렸다. 다친 사람은 의원으로 향했고, 작업장에 남은 사람들은 중단된 일의 비용을 확인하기로 했다. 사고가 해결된 건 아니지만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분위기에서 한 발 벗어난 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록을 정리했다. ‘대체핀 운송함 인수, 실사용 기종 미확인. 주물 공방 주문 기록 양형 공존. 운용축 결합핀 1개 장부상 미정리.’ 그리고 가장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부품이 없어졌다고 해서 사람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창밖으로 운반 마차의 바퀴 소리가 지나갔다. 수현은 원래 세계의 도로를 떠올렸다. 서울에 있을 때도 통신 장애가 났다고 사람까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세계의 마법이 신비롭다는 이유로 자신의 추론만 느슨해져서는 안 됐다.
그날 밤 루세에게 보낼 쪽지에 그녀는 물었다. ‘제0종점 수리일지에 실제 구동축 점검 당시의 소음 기록은 있습니까?’ 기계가 어떤 소리를 냈는지 확인한다면 적어도 핀이 빠진 상태와 연결된 상태를 구별할 힌트가 있을지 몰랐다.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다음 날 확인해야 할 질문 하나가 또 생겼다.
제15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