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다음 날 아침, 이수현은 여관 계산대에서 두 장의 영수증을 받아 들었다. 하나는 숙박비였고 다른 하나는 어젯밤 경계국 창고에서 대피하는 데 쓰인 마차 운임이었다. 두 장에 찍힌 날짜가 달랐다.
“어젯밤엔 이미 자정이 지났거든요.” 여관 주인이 설명했다.
“경계국 물시계는 아직 전날이었는데요?”
“그쪽은 밀물 시간을 기준으로 날을 넘기니까요.”
수현은 영수증을 나란히 놓았다. 어젯밤 중요한 일을 하나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침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게 생겼다. 이 세계에서 날짜를 제대로 읽는 건 어쩌면 마법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세드나가 식탁으로 다가왔다. “제0종점 수리일지 소장처 조회에 회신이 왔습니다.”
“빠르네요.”
“좋은 소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회신은 짧았다. ‘수리일지는 해안 수리조합 해산 시 분할 이관. 표지 및 색인 원본은 항만서고, 본문 제1권은 구 수리소 유족 보관, 장치 정비 별지는 왕도 기술관리청으로 재이관.’
수현은 한참 종이를 보았다. “일지가 세 군데로 찢어졌다는 거네요.”
“책을 실제로 찢었다기보다 관리 권한이 갈라진 겁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선 비슷하죠.”
루세가 창가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 기록의 날짜 표준과 작성자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장점은 있어요. 어느 한쪽이 나중에 고친 부분이 있으면 다른 쪽과 대조할 수 있죠.”
수현은 여관 주인에게 계산을 마치고 마차를 부를 수 있는 시간을 물었다. 세드나가 먼저 오늘 열람 일정이 아니라 이동 허가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해안 수리조합의 옛 부두는 현재 목재 창고와 어민 공동작업장이 나눠 쓰고 있었다. 기록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남의 작업장에 아무 때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 제가 가장 자주 쓰는 문장이 있네요.”
“어떤 문장이죠?”
“들어가도 됩니까.”
세드나는 웃었지만 루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질문을 잊는 사람이 사고를 냅니다.”
***
항만서고는 창고처럼 보였다. 창문 대신 높은 환기구가 있었고, 출입문 옆에는 ‘젖은 신발 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앞에서 마른 신발을 따로 빌려 준다는 점이 이곳만의 특징이었다.
기록 담당 프리온은 선반 아래에서 나무상자를 꺼냈다. “찾으시는 표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지 본문은 저희가 보유하지 않습니다. 이관 목록도 손으로 베낀 사본뿐입니다.”
수현은 자신의 공식 이의 신청 접수증과 제한 열람 허가를 보여 주었다. 프리온이 범위를 확인하는 동안 세드나는 개인 정보가 포함된 부분은 가리지 않아도 되는지 먼저 묻지 말고, 가려야 하는지를 담당자가 판단하도록 했다.
프리온은 한 장의 표지를 펼쳤다. 표지는 바닷소금 때문에 가장자리가 하얗게 부풀어 있었다. ‘제0종점 수리일지, 장치 수리와 운용은 별개로 기록할 것.’
수현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좋은 규칙이네요. 그런데 왜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요?”
“사람이 부족했으니까요.” 프리온이 무심하게 말했다. “예전에는 운용 담당이 수리 담당에게 대신 도장을 맡겼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다 그랬다는 건 아닙니다.”
목록에는 세 개의 표식이 있었다. 수리 요청, 수리 완료, 운용 승인. 셋은 모양이 비슷했지만 하단의 작은 점 위치가 달랐다. 훗날 복사된 양식에서는 그 점이 검게 뭉개질 수 있었다.
루세가 돋보기를 꺼냈다. “특정한 날에 같은 기계가 수리됐다고 적혀 있어도 시험이 수행됐다고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반대로 시험 기록이 없다 해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거죠.”
“맞아요. 그래서 작동 전류와 차단기의 물리적 흔적을 찾으려는 겁니다.”
수현은 표지 뒤의 작은 봉투를 발견했다. 프리온은 그 봉투를 직접 열지 말라고 했다. 뒷면에 유족에게 돌려주라는 분리 보관 메모가 있었다. 수현은 손을 떼었다. 발견한 사람이 소유자까지 되는 법은 없었다.
“유족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먼저 편지를 보내십시오. 연락이 오면 제가 중간에서 방문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직접 찾아가면 빨라질 텐데요.”
“그분들은 이 일 때문에 오랫동안 낯선 방문객을 겪었습니다.”
수현은 대답을 삼켰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누군가의 집 앞을 허락 없이 찾아갈 권리는 되지 않았다.
***
점심때 창고 밖에서 작은 소동이 났다. 부두 목재 운반인 둘이 마차에 걸린 장목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예정된 하역조가 늦었는데 감독은 오늘 물량만큼은 반드시 비우라고 명령했다. 한 사람이 들어 올린 끝부분이 흔들리면서 다른 사람의 어깨를 스쳤다.
수현은 반사적으로 뛰어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목재를 받쳐 줄 힘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짐에서 떨어지세요! 받치지 말고 내려놓으세요!”
데런이 말고삐를 잡아 마차가 앞으로 움직이지 않게 했다. 창고 감독은 물량이 밀리면 벌금을 낸다고 항의했지만, 목재 운반인은 어깨를 움켜쥔 채 더는 작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벌금은 누가 내죠?” 수현이 물었다.
감독은 수현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여긴 용사길드가 아닌데.”
“알고 있어요. 계약 당사자도 아닙니다. 그래서 묻는 거예요. 작업을 멈추면 생기는 비용을 지금 아픈 사람에게 떠넘기시려는 건지요.”
운반인 중 나이 많은 사람이 턱으로 낮은 창고를 가리켰다. “보조 도르래가 안에 있는데 수리비가 아까워서 안 쓰는 거요.”
그 말에 감독의 얼굴이 굳었다. 수현은 누가 잘못했다고 바로 결론 내리는 대신 도르래 검사표를 확인해 보자고 제안했다. 데런은 직접 살펴보더니 축이 조금 휘어져 있다고 했다. 무리해서 사용하면 오히려 다칠 수 있었다.
“그럼 대안이요?” 감독이 묻자 데런이 말했다. “하역조 두 명이 올 때까지 묶음을 그대로 두고 말은 풀어 놓으십시오. 무게 중심이 높은 마차를 이렇게 오래 세워 두는 것도 위험합니다.”
수현은 운반인에게 의료 진료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깨를 돌려 보려다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이 무언가 말하려 하자 그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의원에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맡긴 일은 다른 조랑 조정해 주세요.”
그 한마디를 들으며 수현은 조금 안심했다. 사람을 돕는 일과 그 사람 대신 결정하는 일은 달랐다.
창고 작업을 멈춘 뒤 수현은 치료를 받으러 간 운반인의 이름부터 물었다. 감독은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 보고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수현은 당사자의 말을 나중에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장을 본 동료가 사고 경위를 증언하는 일과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는 일은 서로 다른 기록이었다.
운반 동료는 벽에 기대 앉아 손을 비볐다. 그는 오래전 같은 장목을 싣다가 다친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수현은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 뒤로 도르래에 두꺼운 끈을 감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 끈이 오늘은 없었나요?”
“있었어요. 하지만 축이 비틀려서 걸리지 않았죠. 관리자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관리자가 알고 있었다는 건 직접 들으셨어요?”
“아뇨. 지난주에 수리 부탁한 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요.”
수현은 마지막 문장을 고쳐 적었다. 관리자가 위험을 인지했다는 결론과 동료가 그런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진술은 다르다. 운반인은 자신의 말을 다시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담당 감독이 고장 난 도르래의 접수표를 가져왔다. 접수표에는 '수리 요청' 도장이 있었지만 '수리 완료'란은 비어 있었다. 그는 그동안 대체 도르래를 빌릴 수 있는 곳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데런은 부두 반대편 창고에 쓸 수 있는 장비가 있는지 물었다. 감독은 그 장비는 다른 조의 소유라고 답했다. 수현은 누가 부두를 소유하는지보다 누가 빌려 줄 수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결국 감독이 해당 조합에 연락했고, 다음 날 오전 공동 하역이 가능하다는 답이 왔다.
“그럼 오늘 일을 다 못 끝낸 건 누구 책임입니까?” 감독이 다시 물었다.
“그건 지금 저 혼자 판단할 문제가 아니에요. 계약서와 안전 기록을 함께 봐야 하죠. 다만 다친 사람이 치료받는 걸 벌로 취급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감독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작업장에는 자신이 평생 처리해 온 문제를 낯선 사람이 새롭게 이름 붙여 주는 순간이 있었다. 당연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질문이 되면 사람은 불편해졌다.
의원에서 돌아온 운반인은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큰 골절은 아니지만 며칠 무거운 짐을 피하라는 소견을 들었다. 동료는 부두에 임시로 가벼운 운반 일이 있다는 말을 전했다. 환자는 그 일을 선택할지 다음 날 결정하겠다고 했다. 수현은 그 결정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프리온은 창고 작업자들의 이야기와 오래된 수리조합 문서를 비교해 보자고 제안했다. 옛 수리조합에도 작업을 멈추는 동안의 대기 시간을 따로 기록하는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공적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않고 구두로만 대기시킨 경우에는 지급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옛날에도 그랬나요?” 수현이 물었다.
“옛날에도 사람이 일했으니까요.”
수현은 작은 웃음을 참았다. 자기가 쫓는 마법 장치는 세상이 다르다는 걸 끝없이 상기시켰다. 반대로 창고의 고장 난 도르래는 어쩌면 세상이 달라도 사람의 일은 닮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
해 질 무렵 프리온이 보존실에서 다시 나왔다. 이관 목록과 별도로, 수리조합이 해산하던 날의 포장 명세가 남아 있다고 했다. 명세에는 제0종점 수리일지 제1권 옆에 작은 표식이 찍혀 있었다. 붉은 원 세 개와 가로줄 한 개였다.
루세가 표식을 보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건 수리 완료가 아니라 장치 일시 격리 표식입니다. 오래된 규격이지만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러면 기계가 꺼져 있었다는 거예요?” 수현이 물었다.
“포장하는 시점에는 운용 대상에서 떼어 놓았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언제부터 격리됐는지는 제1권이나 별지를 확인해야죠.”
프리온은 별도의 문서를 하나 내밀었다. '종점 분리 보존 사유: 일지 제1권에 당일 정비자 개인 메모 포함. 비공개 부분을 본문과 일괄 이송하지 않을 것.'
수현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개인 메모라면 사건 기록일 수도 있고 단순한 생활 기록일 수도 있었다. 그 어느 쪽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메모 때문에 나머지 책 전체가 유족에게 간 거군요.”
“그렇습니다. 본문과 개인 수첩을 한 뭉치로 묶어 놔서 구분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세드나가 소유권과 공개 범위가 겹치지 않도록 신청서를 작성했다. 수현은 유족에게 전달할 짧은 편지를 직접 썼다. 자신은 한국에서 온 사람이고 비자발적 이동의 경위를 조사하고 있으며, 수리 기록이 당시 장치 상태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읽을 의무도 답할 의무도 없다고 썼다.
글을 쓰다 멈춘 수현에게 세드나가 물었다. “왜 마지막 문장을 지우셨습니까?”
“'제게는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썼거든요. 사실이긴 한데 상대에게 죄책감을 줄 것 같아서요.”
“그 사실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제 사정이 누군가를 강제로 움직일 근거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수현은 편지 끝에 답장을 보내기 쉬운 항만서고 주소만 남겼다. 자신의 출신 세계에 관한 상세한 위치도 쓰지 않았다.
밤에는 루세와 기록 세 장을 비교했다. 포장 명세의 장치 격리 표식, 기술관리청 별지 이관란, 중앙 보고서의 '집행 완료'. 모두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왔고 뜻도 달랐다.
“만약 실제로 기계가 움직였다면?” 수현이 물었다.
“운용판에 흔적이 남았을 겁니다. 정상 작동했을 수도, 고장 나며 잠깐 에너지가 흘렀을 수도 있죠.”
“그럼 그 흔적이 제가 여기에 온 일과 관계있는지 다시 확인해야겠네요.”
“네. 다만 수리일지가 우리에게 전부 알려 줄 거라고 기대하진 마세요.”
수현은 잠시 휴대전화를 쥐었다. 꺼진 화면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예전 같으면 찾을 서류가 더 있다는 것만으로 지쳤을 텐데요.”
“지금은요?”
“적어도 오늘은 어떤 서류를 왜 찾아야 하는지 알아요. 그리고 하역장에서 다친 사람도 자기 입으로 진료받겠다고 말했죠. 그게 꽤 큰 차이예요.”
수현은 그날 수첩 첫 줄을 고쳤다. ‘제0종점 일지 분실’이 아니라 ‘제0종점 일지 분할 보존. 표지와 포장 명세 확보. 제1권 유족 동의 대기, 운용 별지 기술관리청.’ 처음 적었던 문장은 편리하지만 사실과 달랐다.
그녀는 마지막에 덧붙였다. ‘오늘 어떤 기계도 켜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도 대신 동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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