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오십 번째 아침을 세고 있는 것은 이수현이 아니라 낡은 수첩이었다.
수현은 몇 화째 같은 질문을 던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자신이 제출한 서류의 종류는 셀 수 있었다. 동의서, 이의서, 보존 신청서, 장부 열람서, 정정 의견서. 어떤 날에는 종이 한 장을 얻기 위해 종이 열 장을 썼다. 오늘 그녀가 서쪽 염전 경계국에 도착해 받은 것도 입구 허가서였다.
“제가 지금까지 한 일을 책으로 쓰면 제목이 뭘까요?”
세드나가 웃었다. “서류를 읽는 사람의 서류 여행?”
“너무 안 팔릴 것 같은데요.”
“‘용사 파티에 노무사가 입사했다’는 어떻습니까?”
수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제목을 누가 믿어요. 게다가 제 계약은 벌써 끝났다고요.”
웃음이 끝나자 바다에서 밀려온 짠 바람이 코끝을 찔렀다. 염전은 넓었고, 경계국의 낮은 돌담은 오래된 소금기에 하얗게 바래 있었다. 수현은 동쪽 산지에서 확인한 결과표의 이관 번호를 들고 있었다. 여기서 찾으려는 것은 기술의 성공담이 아니라 과거 독립 검사에서 왜 중앙 결론과 다른 판단이 나왔는지에 관한 기록이었다.
경계국 관리인 오딘은 낡은 서류를 보자마자 말했다. “원본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여기서 창고 문서를 소금에 젖지 않도록 여러 번 옮겼습니다.”
수현은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보다 먼저 보관 경로부터 볼게요.”
“다들 내용을 보고 싶어 하더니, 별일이군요.”
“저도 빨리 보고 싶긴 해요.”
오딘은 창고의 습기를 확인할 동안 일행에게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루세는 실제 부품을 가져오지 않았다. 종이 탁본과 판독 규격표만 있었다. 그들은 한쪽 창고를 열더라도 옛 장치를 작동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에 서명했다.
보존고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좁은 문을 지나 내려가니 상자들이 바닥에서 한 뼘씩 높게 올려져 있었다. 오딘이 설명했다. “큰 비가 오면 소금물이 들어오거든요. 몇십 년 동안 한 번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수현은 첫 번째 상자의 봉인을 살폈다. 내용물은 관측막사의 원장 사본이었다. 두 번째는 중앙 운용판의 옛 판독표였다. 세 번째는 종이 두께가 다른 묶음이었다. 표지에 ‘독립 검사 의견 차이 및 원본 보존 사유’라는 글씨가 있었다.
“이걸 찾았네요.” 수현이 낮게 말했다.
“내용은 아직 보지 않았어요.” 루세가 상기시켰다.
그들은 보존 담당자의 입회와 내용 열람 허가를 확인했다. 서류가 열리자 수현은 가장 먼저 질문란을 읽었다. 과거 검사는 같은 네 번째 홈을 두 기관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읽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한쪽은 원점 표식, 다른 쪽은 수신 표식이라고 판단했지만, 독립 검사 결과는 둘 다 확정할 수 없었다.
“그럼 독립 검사 결과는 실패였군요.” 수현이 말했다.
루세가 고개를 저었다. “실패라기보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거죠. 이것도 성과입니다.”
수현은 다음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중앙 보고서에 없던 문장이 있었다.
‘원점 표식의 제사 홈은 현장 계열 반향판에서 모사 가능. 외부 원점의 독립적 존재를 인정하지 아니함.’
말하자면 E-17과 닮은 표식 하나가 반드시 외부 세계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수현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서울로 돌아갈 가능성이 한 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루세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자료를 덮으려 했다.
“잠깐 쉬어도 됩니다.”
“아뇨. 계속 볼게요. 그래도 이 내용은 알아야 하니까요.”
수현은 턱을 괴었다. 작은 규격 하나에 너무 많은 희망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분명하지만, 마음이 기술적 증거를 대신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다음 장에는 다른 문제를 지적한 붉은 필기가 있었다. ‘중앙 판독표는 E-17을 실제 집행 완료로 오기하였으나, 분기 경로의 최종 응답값은 별도 보존 대상이다.’
“이건 어떤 뜻이죠?”
루세는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중앙의 요약표는 완료라고 했지만, 원장에서는 분기가 끝까지 응답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완료 기록을 근거로 실제 이동을 확정해선 안 된다고 경고한 거죠.”
“그런 경고가 있었는데 왜 아무도 답을 확인하지 않았죠?”
오딘이 조용히 말했다. “원래 경고와 심사 의견은 서로 다른 부서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 보존국이 폐쇄됐죠. 후임자들은 중앙 요약표만 보고 일을 처리했을 수 있습니다.”
수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사전 동의가 없었다는 기록은 이미 확인됐다. 이제는 실제로 무엇이 작동했는지 구분할 자료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다만 이 자료 역시 누가 이동했는지, 어디로 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독립 검사 의견서의 뒷면에는 초라한 표 하나가 붙어 있었다. 세 가지 종류의 실패를 분류한 표였다. 첫 번째는 신호를 보내지 못한 경우, 두 번째는 신호를 보냈지만 상대가 받지 못한 경우, 세 번째는 상대가 받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였다.
수현은 세 번째 항목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처음 이세계에 도착했던 날도 그랬다. 자신은 누군가의 요청에 따라 이곳에 도착했지만, 누가 자신을 지정했는지, 도착했다는 사실을 어느 기관이 확인했는지 불분명했다. 자신이 눈을 떠서 살아 있다는 사실과 행정 기록의 완료 표시는 다른 것이었다.
“이 표는 옛 기술자들이 남긴 거죠?”
“그렇습니다. 실제로 확신할 수 없는 일을 완료로 처리해 사고가 났을 때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오딘이 대답했다.
“그럼 이 지침은 왜 중앙 보고서에 반영되지 않았어요?”
“기록은 여기 있었고, 보고서는 왕도에서 작성했습니다. 서로 다른 보존기관이었죠. 그 뒤 담당 부서가 통합되면서 일부 부록이 빠졌을 수 있습니다.”
수현은 말을 아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말하면 마음은 편해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럴 근거는 없었다. 서류가 여러 기관을 오가다가 사라지는 일은 특별한 악인이 없어도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루세는 표를 읽으며 작은 실험안을 떠올렸다. 구형 표식을 사람이 아닌 종이 모형에 새기고 각 기관의 판독자가 독립적으로 분류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시험을 하지 않았다. 보존고 침수 위험이 가라앉지 않았고, 직원들은 밤새 배수로를 지키느라 지쳐 있었다.
“오늘은 멈추죠.” 루세가 말했다.
수현이 놀랐다. “기술자 쪽에서 먼저요?”
“네. 우리가 안전을 말하면서 여기 직원들을 밤새 세울 수는 없으니까요.”
오딘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번 폭우가 지나면 보존고의 높이를 더 올리고 누수 기록을 제대로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원본만 안전하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원본을 지키는 사람들이 먼저 버텨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수현은 배수로 옆에서 장갑을 벗는 직원들에게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었다. 어떤 직원은 자기가 지킨 종이의 내용을 모른다고 했다. 그가 하는 일은 물이 들어오는지 살피고, 문을 잠그고, 열쇠를 다음 당직에게 넘기는 것뿐이었다. 수현은 그 말에 답했다.
“오늘 그 일이 없었으면 저희는 이 문서를 볼 수 없었어요.”
직원은 쑥스럽게 웃었다. 남들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연구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자료를 지키고 있었다. 수현은 그 사람의 업무시간과 휴게시간도 기록될 수 있기를 바랐다.
오딘은 임시 보존 기록에 직원들의 이름을 정확히 적었다. 예전 같으면 열쇠 보관자의 이름 하나만 남겼을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실제로 물을 퍼냈고, 누가 입구를 지켰으며, 누가 원본을 옮겼는지 분리했다. 과거의 실패를 다루는 기관이 현재의 같은 실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그 일에도 의미가 있었다.
밤에 수현은 보존국의 종이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젖지 않도록 기름종이를 덧댄 창 너머로 달빛이 어렸다. 멀리 보이는 바다의 끝은 어두웠다. 그 끝 너머에는 자신이 모르는 나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울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웃었다. 처음 이세계에 온 날이었다면 누군가가 바다 끝에 돌아가는 문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배를 탔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말을 듣고 먼저 묻고 싶었다. 누가 확인했는가, 언제 확인했는가, 돌아온 사람은 있는가, 참여자가 중간에 그만둘 수 있는가.
그 질문들이 발목을 붙잡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질문 없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수현은 자신의 남은 은화를 세고, 돌아갈 방법을 찾는 데 쓴 비용을 기록했다. 원정대의 돈과 섞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내역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자기 삶의 일은 자기 장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었다.
마지막 봉투에는 ‘대조 대상 원장’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세드나가 읽을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하자 오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 안에는 중앙이 아닌 별도 종점에서 작성했다는 기록 목록이 있었다. 그 목록의 끝에 작게 ‘제0종점 수리일지, 정지 후 시험 재개 여부 별도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종점 수리일지.” 루세가 말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이름을 들었는데요.” 수현이 대꾸했다.
“네. 다만 이것은 제2차단함의 운용판과 달리 실제 종점 설비를 정비한 사람들의 기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 그날 무엇이 켜졌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확답할 수는 없어요.”
수현은 빈 종이에 그 말을 적었다. 가능성과 확답. 어느새 자신의 직업보다 더 오래 붙잡게 된 두 단어였다.
그때 경계국 위층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폭우로 배수로가 막혀 소금물이 창고로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전령이었다. 오딘은 자료를 당장 들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존 원본을 아무렇게나 품에 안고 뛰는 건 안전하지 않았다. 루세는 하르나가 쓰던 방법을 떠올렸다. 원본은 밀봉된 상자에, 열람 기록은 별도로 보관하고, 인계 전후에 수량을 확인한다.
수현은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무거운 상자를 옮기는 건 힘들었고, 오래된 종이를 물에서 빼내는 전문가도 아니었다. 오딘은 그녀에게 대피자 명부를 확인해 달라고 했다. 누구든 문서에 정신이 팔려 창고 아래에 남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계단 위에서 사람들을 한 명씩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젊은 직원은 인계 도장을 찍어야 한다며 내려가려고 했다. 수현은 말했다. “도장 없이 옮겼다는 사유를 나중에 적을 수 있어요. 사람은 놓치면 그럴 수 없잖아요.”
직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올라왔다. 그들은 우선 인원을 확인하고 이후에 보존물 인계 기록을 작성했다. 밤이 돼서야 배수로가 뚫렸고, 원본 손상은 최소화됐다는 통보가 나왔다.
수현은 숙소로 돌아가며 세드나와 나란히 걸었다. 오늘은 낡은 의견서 하나가 중앙의 단정적인 결론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서울행 문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껏 기대했던 표식이 현장 장치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망하셨습니까?” 세드나가 물었다.
“많이요. 그런데 모르고 가는 것보다 낫겠죠.”
“어째서요?”
“문인 줄 알고 뛰어들었는데 벽이면 저는 다칠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다치게 할 수 있겠죠.”
세드나는 말을 고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꺼진 화면에는 얼굴만 흐릿하게 비쳤다. 전원을 켜지 못해도 계속 가지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이 세계에 온 날 마지막으로 들었던 서울의 차 소리가 아직 기억났다. 그녀는 기계가 아닌 기억을 손에 쥔 듯 휴대전화를 다시 넣었다.
“그렇다고 돌아가는 걸 포기하지는 않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아야 하고, 나중에는 어떻게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해요. 그 둘을 같은 문제라고 속이지 않으려고요.”
세드나는 미소 지었다. “그래서 또 다른 장부를 찾으실 겁니까?”
“네. 이번에는 수리일지네요.”
여관에 도착하자 메이와 카이렌의 편지가 함께 놓여 있었다. 메이는 개인 청구 일부의 증빙 심사가 계속된다고 썼고, 카이렌은 휴가를 끝내고도 원정대가 정상적으로 움직인다고 알려 왔다. 북방에서는 라비엔의 정산을 위한 추가 서면 심사가 잡혔다고 했다. 아무 사건도 마법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 자기 이름으로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수현은 답장을 적었다. ‘저는 아직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늘 하나는 알았습니다. 옛 기록의 완료 표시는 실제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편지를 접은 뒤 그녀는 별도의 신청서를 꺼냈다. 제0종점 수리일지의 현 소장처와 열람 권한을 조회하는 문서였다. 결코 낭만적인 문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쓰는 자신의 이름은 점점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비가 잦아들 무렵 수현은 신청서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조사의 목적은 실제 작동 경위의 확인이며, 인체 시험이나 무단 개인 정보 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서명을 오래 바라봤다. 남이 만든 문장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고른 문장이었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릴 생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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