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 잠정 중지’라는 말은 문장만 보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 달 기다리면 풀릴 수도 있고, 담당자가 바뀌면 재개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수현의 임시 계약이 열흘뿐이라는 점이었다. 잠정 중지가 열하루 이어지면 조사는 계약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수현은 통지문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세드나 씨, 중앙감사로 넘겨진 이유를 알려 주세요.”
“비정상 예치 계정이 확인돼서일 수도 있고, 너희가 재조사를 요청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
“누가 요청했는지는요?”
“문서에는 특별 회복 관리국 담당자라고만 적혀 있어. 이의 신청은 가능하지만 승인이 나올지는 장담 못 해.”
“그럼 신청해 보죠.”
세드나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봤던 장부를 계속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원본은 왕도로 이송됐어.”
“원본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복사본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수현은 자신이 적어 둔 지급일과 금액, 함께 확인했던 담당자 이름을 정리했다. 원본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무단 반출이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아도 됐다.
세드나가 서류 한 장을 밀어 주었다.
“다른 방법도 있어. 옛 계약의 효력 확인은 ‘소환 서고’에서 담당한다. 개인 계약에 대한 정당한 이해관계가 있으면 열람 신청을 할 수 있지.”
“왕도 보관 서고와 다른 곳인가요?”
“계약 원본은 왕도에, 마법적으로 발송되거나 확인된 문서의 경로는 소환 서고에 남아. 네가 여기 온 것도 그쪽 기록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수현의 손이 멈췄다.
“잠깐만요. 그럼 민원 봉투 기록도요?”
“없을 수도 있다. 소환 사고는 기록 자체가 남지 않기도 하니까.”
가능성이 전부였다. 그런데 수현에게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방법’과 연결된 공식 절차였다.
***
소환 서고는 길드 본부에서 한참 떨어진 옛 종탑 아래에 있었다. 실내에는 책 대신 검은 봉투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작은 봉투는 손바닥만 했고, 가장 큰 것은 관짝처럼 길었다.
“민원실이라기보다는 분실물 보관소 같네요.”
수현의 말에 안내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실물이긴 합니다. 보내는 곳을 잃어버린 문서들이니까요.”
안내인 이름은 유벨이었다. 은빛 머리를 묶은 늙은 서고지기는 수현의 계약 사본과 메이의 위임장을 차례대로 확인했다.
“이방인 본인에 관한 기록과 직접 관련된 민원의 발신 경로는 신청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봉투는 열람할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소환된 시각과 출발지는 자동 기록되지 않습니다. 봉투에 연결된 회신 표식이 있어야 하죠.”
수현은 탄식했다.
“공짜 우편인 줄 알았는데 송장번호도 없네요.”
유벨은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대충 불평이라는 건 알아들은 듯했다.
“보여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보여 드리죠.”
그는 긴 막대를 들어 천장에 걸린 투명한 수정판을 건드렸다. 수현의 손바닥 위에 잠깐 흰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현장 확인 요청: 미결 상태.]
“미결이요?”
“보낸 민원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 세계에 있는 동안만요?”
“그건 기록에 없습니다.”
수현은 답답해서 웃음이 났다. 세상의 행정은 어느 차원이든 필요한 곳만 공란이었다.
***
다음 수정판에는 낯익은 문장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도 진실을 보낼 수 있다.]
메이가 읽었다던 문구였다. 유벨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 오래된 구제 절차입니다.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는 서고마다 전해지는 이야기가 달라요.”
“서고마다요? 다른 곳도 있나요?”
“왕도와 세 개 성역에요. 다만 정상적인 민원 전달에는 생명체를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한테 일어난 일은 정상 절차가 아니군요.”
“그렇게 판단할 근거는 있습니다.”
유벨은 수현을 똑바로 쳐다봤다.
“혹시 봉투의 회신 표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봉투는 메이 씨가 닫자마자 사라졌대요.”
“그럼 수신인의 이름이나 물건이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수현은 가방을 뒤졌다. 휴대폰, 빈 지갑, 펜 몇 개, 그리고 이세계로 오기 전에 확인하던 진정서의 찢어진 끝부분. 사무실에서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종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렸다.
“이거일까요?”
유벨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종이에는 서울 사무실의 접수번호 끝자리 몇 개가 남아 있었다.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를 읽지 못하는 유벨은 종이를 바닥의 마법진 위에 올려놓았다.
수정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결된 문서 있음. 수신자 확인 필요.]
그다음 문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연결됐네요?”
수현이 물었다.
“완전히 연결되진 않았습니다.”
“뭘 더 해야 하죠?”
“원문을 확인해야 합니다. 또, 원문에 담긴 신청의 처리 상태를 알아야 하고요.”
수현은 메이를 떠올렸다. 메이의 민원은 단순히 서류 한 장이 아니었다. 사람이 쉬지 못하고 돈까지 뜯기는 현실에서 겨우 보낸 신호였다.
“그럼 문제를 다 해결해야 돌아가는 건가요?”
“그런 규칙은 없습니다.”
유벨은 단호하게 말했다.
“문서 경로 확인과 귀환 방법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단서를 너무 쉽게 하나로 묶지 마세요.”
수현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어설픈 희망을 팔지 않는 사람이었다.
***
소환 서고를 나오는 길, 세드나는 별도의 기록을 찾아왔다. 오래된 계약 접수 문서는 서고에서 직접 열람할 수 없지만, ‘열람 거절 사유’에 대해서는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걸 신청해 보는 건 어때?”
“거절 이유를 달라고요?”
“맞아. 이유를 알면 다음 신청의 범위를 정할 수 있어.”
수현은 손뼉을 쳤다.
“세드나 씨, 생각보다 제법 좋은 동료인데요?”
“생각보다가 거슬리는군.”
“칭찬입니다.”
세드나가 고개를 돌렸지만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둘은 소환 서고 입구에 있는 조그만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수현은 여기에 온 뒤 처음으로 고향의 맛을 떠올렸다. 뜨끈한 국물만 있으면 좋은데, 이곳의 수프는 이상하게 늘 미지근했다.
“너는 원래 어디서 왔지?”
세드나가 물었다.
“서울이라는 곳이요.”
“왕도보다 크나?”
“엄청요. 밤에도 불빛이 꺼지지 않죠.”
“그러면 사람들은 밤에도 일하겠군.”
수현이 빵을 씹던 입을 멈췄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정확하게 들리죠.”
세드나는 웃었다.
“불이 꺼지지 않으면 관리자들은 일을 시키고 싶어 할 테니까.”
“세드나 씨도 관리자예요.”
“그래서 더 잘 알지.”
수현은 웃다가 마음이 묵직해졌다. 서울에 두고 온 사무실, 아직 끝나지 않았을 업무들. 누군가 자기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 사람들을 돕는 일과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굳이 서로 미워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
서고를 떠나기 전에 수현은 유벨에게 하나를 더 물었다.
“제가 돌아갈 수 있는 절차가 있다면, 그 절차에도 계약서가 필요할까요?”
유벨은 잠시 생각했다.
“귀환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소환은 주문이 풀리면 끝나고, 어떤 경우는 통로를 다시 열어야 하지요. 나는 후자에 관한 기록을 다룬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저처럼 온 사람도 있었나요?”
“문서에 끌려온 사람에 관한 전승은 있습니다. 하지만 전승을 사실로 말씀드릴 수는 없군요.”
수현은 웃었다.
“이 세계에도 괴담이 있네요.”
“물론이지요. 우리는 책을 보관하지만, 책에 적힌 모든 일을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유벨은 종탑의 벽에 걸린 오래된 그림을 가리켰다. 밝은 문틈과 그 앞에 선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림 속 인물은 두 팔에 종이를 안고 있었다.
“수신인이 돌아갈 때 원문이 길이 되어 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처럼 종이를 품고 걷는다고 문이 열리는 건 아닙니다.”
“제가 해 볼까 했는데요.”
유벨이 껄껄 웃었다.
“위험한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 종탑 아래 통로는 오래전에 무너졌습니다.”
수현은 웃다가 그림 아래 적힌 글귀를 읽었다.
[구제를 청한 이의 목소리를 누가 대신 가질 수 있겠는가.]
순간 메이가 떠올랐다. 수현에게 진정서를 보낸 사람. 수현이 이곳에 떨어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메이의 문제는 메이의 것이었다. 이 세계에 온 지 며칠 만에 자신이 멋대로 구원자 행세를 하게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됐다.
“민원을 취소하는 건 발신인만 가능한가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다만 수신인이 관련 사실을 보고할 수는 있지요.”
“좋네요.”
“무엇이 좋다는 겁니까?”
“저 혼자 사건을 끝냈다고 선언할 수 없으니까요.”
유벨은 수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간혹 문서를 다루는 사람은 문서의 주인을 잊습니다. 당신은 그러지 않길 바랍니다.”
밖으로 나오는 길, 수현은 세드나에게 물었다.
“혹시 제 계약도 여기 기록될까요?”
“길드 외부 자문 계약은 계약관리실 소관이야. 그래도 마법 서명이 남으니 추적 가능할 거야.”
“그럼 임시 계약이 끝나더라도 제 활동 기록이 사라지진 않겠네요.”
“그럴 확률이 높아. 단, 정당한 이유 없이 누가 없애지 않는다면.”
수현은 그녀의 마지막 말을 기억해 두었다.
길을 건널 때 두 사람은 병사들이 물탱크를 밀고 가는 모습을 봤다. 바퀴가 돌에 걸리자 수현이 본능적으로 다가갔다. 세드나가 그녀를 붙잡았다.
“위험한 일을 직접 하지 않기로 했잖아.”
“아, 맞다.”
수현이 멈췄다.
“이것도 직업병인가요?”
“그냥 네가 모든 일에 끼어들고 싶어 하는 병이겠지.”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요. 저도 고쳐야 할 게 많네요.”
병사들은 데런을 불러 바퀴를 안전하게 밀었다. 수현은 멀찍이 서서 길을 비켜 주었다. 자신이 없어도 사람들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연습이었다.
오후에 도착한 열람 거절 통지에는 뜻밖의 정보가 있었다.
[R-0: 일반 인사 계약으로 분류되지 않음. 최초 편성 이전의 회복 관련 임시 계약. 원문 보호 대상.]
“회복 관련 계약?”
수현이 읽었다.
세드나도 놀란 표정이었다.
“제7원정대의 다섯 번째 계약자를 인사 명부에서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이건가.”
“아직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일반 채용이 아니라면 계약 당사자가 누구였는지 더 중요해지죠.”
수현은 편지의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보다 하루 먼저 계약된 이름. 이제는 ‘사람보다 먼저’라는 표현이 날짜만 뜻하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날 수현의 귀환 조사에는 새 항목이 더해졌다. 소환의 수신자가 된 과정, 원문 확인 조건, 발신인의 민원 상태. 아직 길을 찾은 건 아니지만 누군가가 수현의 질문을 공식 기록으로 받아 적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처음보다 나았다.
원정대 천막에 돌아오자 카이렌이 한쪽 벽에 작은 표를 붙여 두었다. ‘오늘 담당’, ‘쉬는 사람’, ‘비상 연락’이 적힌 종이였다.
“어떤가요?”
그가 물었다.
“잘 만드셨네요.”
“수현 씨가 없어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혹시… 돌아가게 되시면요.”
수현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제가 사라지길 바라세요?”
“아닙니다.”
카이렌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다만 여기 계시는 동안 우리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셨잖아요.”
“그건 누구의 잘못인지 아직 몰라요.”
“그래도 돌아갈 길을 찾는 건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수현은 종이에 적힌 비상 연락 담당자의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누구도 혼자 모든 일을 떠맡지 않도록 만든 작은 목록이었다.
“고마워요. 그럼 내일은 이 표를 실제로 써 봅시다.”
카이렌이 웃었다. 수현은 그 웃음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저렸다. 이곳에서 일할수록 돌아갈 곳과 남겨 둘 사람 모두가 선명해졌다.
그날 밤 그녀는 휴대폰을 켰다. 배터리는 17퍼센트였다. 남은 전력은 거의 없었지만 사진 몇 장 정도는 찍을 수 있었다. 수현은 찢어진 접수번호 종이와 서고에서 받은 확인표를 나란히 놓고 찍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통신망이 없었다.
“언젠가는 돌아가겠죠.”
수현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
“하지만 돌아가더라도 이 일을 없던 일로 할 순 없어요.”
창밖에선 젠이 동료들과 식기를 씻고 있었다. 작은 평화였다.
그리고 문 아래로 두 번째 종이가 들어왔다.
[정식 기록을 찾으려면 라비엔의 전출 날짜를 확인하시오. ‘왕도행’이라고 적힌 날의 목적지는 왕도가 아니었다.]
이번 종이에는 발신인의 이름 대신 작은 방패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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