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엔의 편지는 아침과 저녁 사이에 도착했다. 이수현은 봉투를 받자마자 북방 회복소에서 쓰는 종이 특유의 거친 표면을 알아봤다. 편지는 오르카 앞으로 보내졌지만, 그 안에 수현에게 전할 별도의 동의서가 들어 있었다.
‘본인은 아래의 근무 사실과 계약 종료 절차를 익명 사례로 활용하는 데 동의합니다. 병력과 개인 거주지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라비엔은 자신이 북방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로도 제7원정대에 즉시 돌아오지 않았다. 전출 통지서의 효력과 북방에서 수행한 기록 보존 업무의 대가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라비엔이 직접 조사한 문서들이 쌓였다. 그래서 그녀의 편지는 그간 진행한 선택의 결과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오르카는 여전히 부상한 팔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현이 편지를 가져가자 그녀는 먼저 봉투를 열지 않았다. 라비엔이 편지를 보내기 전 연락을 해 와서, 이틀 뒤에 오르카가 원정대에서 쉬는 시간을 맞춰 전달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저는 오늘 쉬는 날입니다.” 오르카가 말했다.
“쉬는 날이면 편지를 읽으면 안 되나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읽을지 말지 제가 정하고 싶었습니다.”
수현은 웃었다. 예전 같으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의 소식에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갔을 사람이다. 지금은 자신의 시간에 맞춰 편지를 여는 법을 배웠다.
라비엔의 편지에는 세 가지 결과가 적혀 있었다. 첫째, 북방 회복소와 체결한 기록 협력 계약의 실제 근무일 수를 다시 계산했다. 둘째, 전출 처리 당시 누락된 통지 수령 확인 문제는 여전히 심사 중이었다. 셋째, 계약이 정리되더라도 당장 원정대에 복귀할 생각은 없었다.
오르카가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괜찮다고 하네요.”
“정말 괜찮다고 했어요?”
“아뇨. 아직 다리가 아프고, 일한 대가도 다 받지 못했다고 했어요. 그래도 결정은 자기가 하겠대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상태가 완전히 좋아져야만 그의 결정이 존중되는 것은 아니었다. 몸이 불편하고 돈이 모자라도, 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를 스스로 정할 권리는 남아 있었다.
그날 오후 그들은 북방 회복소의 계약 담당자에게 답신을 보냈다. 라비엔이 요청한 것은 특정 기간의 업무 대가와 치료 목적 체류비의 구분이었다. 회복소는 숙식 제공을 임금 대신 계산하겠다고 적어 두었지만, 실제 계약에 그런 내용이 충분히 설명됐는지 불명확했다.
“일한 대가가 숙식비에서 빠졌다는 건가요?” 오르카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겠죠. 하지만 아직 정확한 계산표를 못 받았어요.”
“싸워서라도 받아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현은 그녀를 바라봤다. “라비엔이 원하면 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계산 근거부터 알고 싶다고 했잖아요.”
오르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동료가 손해를 보면 당장 달려가 적을 무찌르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싸우는 대신 답장을 썼다. ‘네가 원하면 내가 증인으로 함께하겠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기다리겠다.’
수현은 그 문장을 읽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엔이 받게 될 것은 명령이 아니라 선택지였다.
라비엔이 보내온 별지에는 북방 회복소의 작은 자료실에서 계약 정산을 시작한 경위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곳의 사서 겸 기록 담당자 베라는 일한 날짜를 증명할 원본이 어느 부서에 보관돼 있는지 알려 주었다. 라비엔은 먼저 자신의 기억으로 날짜를 적어 놓고, 장부와 일치하는 부분만 표시했다. 다르게 적힌 날에는 곧바로 상대가 거짓말한다고 하지 않았다. 본인이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고, 시계나 교대 기준이 달랐을 수도 있었다.
“이 날짜에는 야간 경비까지 맡았다고 하셨군요.” 베라가 물었다.
“그날은 다른 직원이 열이 났어요. 기록 보존 업무를 하다가 밤에 약품 보관 창고도 지켰습니다.”
“그럼 경비업무 시간은 별도로 기록됐습니까?”
“제가 직접 적은 수첩에는 있습니다. 하지만 회복소의 정식 장부에는 기록 협력이라고만 되어 있어요.”
베라는 수첩을 보존 증거로 접수할지 라비엔에게 물었다. 자신의 수첩이 공식 심사자료가 되면 일부 내용이 담당자에게 공개될 수 있었다. 라비엔은 일한 시간과 맡은 업무만 발췌해 제출하기로 했다. 개인적인 일기 부분은 제출하지 않았다.
“예전 원정대에서는 대장이 달라면 모두 보여 줘야 했어요.” 라비엔이 말했다.
“여기는 그렇지 않도록 하려는 중입니다.”
베라의 말은 완벽한 현실을 뜻하지 않았다. 회복소에도 불충분한 인력이 있었고, 야간 담당자는 자주 밥을 거르곤 했다. 라비엔은 자신이 권리를 주장하면 다른 동료들이 더 힘들어질까 걱정했다. 그런데 베라는 그 문제도 담당 기관의 인력 배정 책임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보수를 제대로 계산하면 다른 사람의 일까지 드러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걸 숨길 이유는 없죠.”
라비엔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원래 전투에서 동료를 보호하던 방패 기사였다. 지금은 숫자 하나를 확인하면서 다른 사람의 작업시간까지 생각하게 됐다. 처음에는 이 일이 너무 느리다고 느꼈다. 그러나 소속도 모르는 명령서에 따라 밤마다 움직이던 시절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한편 이천 리 밖 왕도에서 오르카는 라비엔의 편지를 여러 번 읽었다. 수현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 “답장이 어려워요?”
“아뇨. 너무 많은 말을 쓰고 싶어서요. 예전 일을 사과하고 싶고, 돌아오라고 하고 싶고, 그래도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그중에서 라비엔이 지금 들을 수 있는 말을 먼저 써 보세요.”
오르카는 펜을 들었다. 첫 문장을 적었다가 지웠다. '우리가 너를 지켜 주지 못했다.' 두 번째 문장도 지웠다. '빨리 돌아와.' 세 번째에는 손이 멈췄다. '너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내게 알려 줄 수 있니?' 오르카는 그 질문이 마음에 들었다.
“돌아오라는 말은 안 쓰기로 했습니다.”
“왜요?”
“제가 보고 싶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상대의 다음 선택을 정하지는 못하니까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카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방식으로 보호하려고 들기 쉽다. 그 방식이 강요가 되는 순간을 알아채는 일은 오랜 전투 훈련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며칠 뒤 라비엔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녀는 회복소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일을 적었다. 치료 기록의 보존은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긴급 야간 근무를 무제한 맡지는 않겠다고 했다. 전출 정산이 끝난 뒤에는 병력이 더 나아지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오르카는 편지를 읽고 눈을 감았다. “잘 지내고 있네요. 힘든 일도 있지만요.”
수현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상대가 더 이상 옛 원정대의 빈자리를 채워 줄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녀에게는 북방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있었다.
그날 밤 오르카는 원정대 기록실 한쪽에 오래된 방패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라비엔이 썼던 방패였다. 누군가 돌아오면 쓸 수 있도록 손질해 두었던 물건이다. 그러나 오늘은 방패 옆에 '본인 동의 없이 임의 지급하지 말 것'이라는 표식을 붙였다. 그 표식은 라비엔이 돌아올 거라는 약속이 아니었다. 그 물건에 남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꾸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수현은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자신도 서울에 두고 온 물건이 있었다. 사무실 책상, 서랍 속 서류, 가족사진. 누군가 그 물건을 대신 관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건이 남아 있다는 것과 자신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다시 적었다. '현실 세계의 원점과 수신지 확인, 인체 이동 안전성 확인, 본인 의사 확인.'
오르카가 그 문장을 보고 말했다. “돌아가면 저희 얘기를 하시겠습니까?”
“누구에게요?”
“수현 씨 나라 사람들에게요.”
수현은 잠시 생각했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이야기하겠죠. 그런데 메이와 라비엔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분들이 원할 때만요.”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소유하지 않은 이야기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 더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녁 무렵 북방 회복소에서 온 별도 통지에는 보수 재정산의 일부가 반영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당시 관측표 작성 업무와 야간 기록 보존 업무가 하나의 ‘자원 협력’ 항목으로 묶여 있었는데, 재심사에서 야간 근무 분량을 별도 인정하기로 했다고 했다. 금액 전체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근로 사실을 없었던 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수현은 서류 끝에 작은 글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삼 관측막사 분리 서식 참조.’
동쪽 산지 관측막사와 같은 명칭이었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라비엔이 북방에서 받은 보수 문제가 자신이 조사하는 E-17 기록과 연결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자신을 말렸다. 같은 서식 이름을 사용한다고 같은 사건일 수는 없었다. 오래된 행정 서식은 수십 년 동안 여러 기관에서 썼다.
“이거, 관측막사 사건과 관계가 있나요?” 오르카가 물었다.
“모릅니다. 확인할 수는 있겠지만, 라비엔의 급여 문제를 제 조사에 가져다 쓰면 안 돼요.”
수현은 서류의 그 부분을 가려 복사해 두었다. 공식 공개된 서식의 명칭과 개정 연도만 볼 수 있게 했다. 라비엔의 근무일과 실제 임금은 조사와 관계없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라비엔에게 다시 허락을 받아야겠네요.”
“그럴 필요도 아직 없어요. 같은 서식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공개된 문서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거든요.”
오르카가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싸우는 방법도 있군요.”
“싸운다기보다는 길을 찾는 거죠.”
그날 밤 수현은 공개 서식 목록에서 제삼 관측막사 분리 서식이 기술 기록뿐 아니라 인사·보수 장부에도 쓰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식의 명칭은 관측막사의 이름에서 가져왔을 뿐, 소환 기술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관련 없는 사건들을 억지로 하나로 만드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오르카는 라비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원정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담겼다. 카이렌이 휴가를 쓰고, 메이가 직접 원장을 확인하고, 데런이 야간 마차 이동을 거절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게 된 일들. 라비엔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기분일까. 수현은 그 답을 추측하지 않았다.
며칠 뒤 라비엔의 짧은 답이 왔다.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너희가 잘 지내서 기쁘다. 나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천천히 끝내겠다.’
오르카는 그것을 읽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라비엔을 기다린다고 할 때, 반드시 돌아올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수현은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기다리는 일은 돌아오라는 압박이 될 수도 있고, 돌아오지 않아도 관계가 이어진다는 약속이 될 수도 있다. 차이는 듣는 사람의 선택을 남겨 두는지에 있었다.
수현은 자기 귀환 기록을 펼쳤다. 그곳에는 아직도 미완료 표시가 줄지어 있었다. 수현 역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지만, 돌아갈 수 있는 방법과 시각을 선택할 자료는 없었다. 라비엔은 머무를 곳을 선택하는 중이었고, 수현은 떠날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둘의 방향은 달랐지만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은 같았다.
그날 저녁 그녀는 메이와 오르카, 카이렌에게 인사를 했다. 다시 동쪽 관측막사 자료를 확인하러 가야 했다. 오르카가 물었다. “혼자 가십니까?”
“세드나와 루세가 동행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안전한 길만 이용할 겁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편지 답장 잘 써 주세요. 그게 제일 중요해요.”
오르카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웃었다. 검과 방패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듣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다는 듯했다.
출발 전 수현은 라비엔의 동의서를 원래 봉투에 넣어 돌려보냈다. 필요한 익명 사례만 별도 기록으로 남겼고, 나머지 개인 자료는 보관하지 않았다. 사람의 이야기를 알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야기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차가 움직였다. 북방의 라비엔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남쪽 원정대는 자기 힘으로 하루를 운영했다. 수현은 그 사실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의 귀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그들의 삶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쓸쓸하면서도 기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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