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렌은 사흘의 기억을 되찾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분명 칼을 잡고 있었다. 눈앞에 쓰러진 병사가 있었고, 누군가가 흰 고리를 자기 손에 대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뜨자 꿈에 남은 것은 차가운 감각뿐이었다. 그는 의료 기록실 앞에서 그 꿈이 기억인지, 자신이 듣고 상상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꿈 얘기를 확정 기록에 넣지 않겠습니다.”
이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어요.”
그녀는 개인 귀환 조사 때문에 왕도를 떠나려다가 카이렌이 예약한 진료 날짜를 듣고 하루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한 것은 수현의 대리 판단이 아니었다. 옆에서 기다렸다가 끝난 뒤 같이 식사하자는 부탁이었다. 수현은 그 정도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진료 담당 의사 세핀은 카이렌에게 먼저 서류를 보여 주었다. 공개 범위는 세 날 가운데 둘째 날의 체온·약물 기록과 장치 관리 기록으로 한정돼 있었다. 사흘 전체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에게는 천천히 보아도 되는 이유가 있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번 실패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읽다가 중단할 수 있습니까?” 카이렌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기록의 사본 제공 여부도 그때 정하시면 됩니다.”
세핀은 질문에 바로 답했다. 수현은 문밖에서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 예전 같으면 몸이 부서진 상태에서도 출정 명령을 기다리던 사람이 지금은 자신이 무엇을 볼지 먼저 물었다.
카이렌이 돌아왔을 때 얼굴은 창백했지만 숨은 고르게 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게 되셨어요?”
“조금은요. 둘째 날에 제가 전투를 했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아예 치료실 대기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 기록이 사실인지 다른 자료와 확인해야겠죠.”
“네. 그런데 저한테는 그게 중요했어요. 의식을 잃은 채 싸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는 손등을 보여 주었다. 흰 원형 흉터는 여전했다. 의료 장부에는 K형 안정 장치 하나가 치료실에 출고됐다고 적혀 있었고, 반납 확인에는 지워진 글씨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 이름은 없었다. 세핀은 이 흔적만으로 카이렌이 장치를 착용했거나 소생술을 받았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제 몸에서 있었던 일을 제가 제일 모른다는 게 화가 났습니다.” 카이렌이 말했다.
“그럴 수 있죠.”
“처음에는 빨리 답을 듣고 싶었어요. 차라리 죽었다 살아났다고 누가 말해 주면, 그날부터 다시 살아가는 법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수현은 조용히 물었다. “지금은요?”
“지금은 제 몸에 일어난 일을 누가 대신 이야기해 주는 게 싫습니다. 모른다면 모른다고 듣고 싶어요.”
카이렌은 한참 뒤에야 웃었다. “이 말도 노무사님 영향입니까?”
“저는 기억을 돌려주는 능력은 없어요.”
“그렇겠죠. 그래도 모르겠다고 말할 용기는 생겼습니다.”
카이렌이 진료를 받기 전날, 수현은 원정대 막사 뒤편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훈련 검을 손에 들고 있었지만 휘두르지 않았다. 칼끝을 땅에 대고 오래된 나무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쉬는 날 아니었어요?” 수현이 물었다.
“맞습니다. 훈련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마음이 복잡해서 나왔습니다.”
“검을 들고 복잡해지는 건 아주 효율적인 방식은 아닐 것 같은데요.”
카이렌이 웃었다. “손에 익은 걸 들고 있으면 마음이 놓입니다.”
수현은 그 옆에 섰다. 막사에는 저녁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젠이 데런에게 활시위를 고치는 법을 설명했다. 둘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원정대는 예전보다 훨씬 덜 긴장돼 보였다. 그런데 카이렌의 얼굴은 달랐다.
“기록을 볼 생각을 하니까 두렵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혹시 제가 실제로 죽었다 살아난 거라면, 지금까지 제게 했던 약속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수현은 성급하게 부정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 가능하지 않다고 단정하는 것은 잠시 편할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사실이 다르게 나오면 그 사람의 신뢰까지 무너진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카이렌 씨가 지금 결정할 수 있는 일은 남아 있어요.”
“제가 용사라는 일도요?”
“그 일을 계속할지 말지도 포함해서요. 물론 이 왕국의 계약과 제도가 실제로 어떤 권리를 주는지는 따져 봐야겠죠. 그래도 마음은 다른 사람이 대신 정하지 못해요.”
카이렌은 검을 내려놓았다. “저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쉬는 것도 그 일의 일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드디어요.”
“그렇게 오래 걸렸습니까?”
“정확히는 저도 여기 온 뒤 꽤 오래 걸렸어요.”
카이렌은 문득 수현을 돌아봤다. “돌아갈 방법을 찾느라 식사를 자주 거르시잖아요.”
수현은 대꾸하지 못했다. 사람에게 휴식을 권하던 자신도 조사를 하느라 자꾸 잠을 줄이고 있었다. 잠이 부족하면 종이에 쓰인 숫자를 더 쉽게 오해한다는 말을 루세에게 들었는데도 그랬다.
“알겠습니다. 저도 오늘은 일찍 잘게요.”
“약속하셨습니다.”
“네. 서로 감시하는 걸로 하죠.”
둘은 웃으며 식당으로 돌아갔다. 메이는 수현에게 접시를 하나 더 건넸다. 잔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밥을 더 먹으라는 뜻이었다. 수현은 반박할 생각을 접었다. 이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한 말을 자신에게 돌려줄 만큼 가까워졌다.
다음 날 진료실에서는 의료기록과 원정대 출정 장부 사이의 날짜 차이를 따로 표시했다. 카이렌은 의사에게 그 차이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의사는 왕도 의료기관과 전장 지휘부가 서로 다른 날짜 기준을 사용한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같은 날'로 보이는 기록 두 개가 정확히 같은 시간대는 아닐 수 있었다.
“그럼 제가 깨어 있었다는 기록과 의식을 잃었다는 기록이 함께 있어도 모순이 아닐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둘 다 맞다고 확정할 수도 없어요.”
세핀은 카이렌의 허락을 받아 제한적 대조표를 만들었다. 자신의 몸에 관한 자료를 다루는 사람을 카이렌이 직접 고를 수 있었다. 수현은 그 과정에서 아무 결정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국에서 상담했던 사람들의 인사기록을 떠올렸다. 민감한 정보일수록 본인이 누가 볼지 정하는 게 중요했다.
진료를 마치고 카이렌은 원정대의 작은 휴게실을 찾았다. 그곳에는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침대가 두 개 있었다. 젠이 먼저 누워 있었고, 데런은 일지를 적고 있었다. 카이렌은 그들에게 진료 결과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내일은 오후까지 쉬겠다고 말했다.
“무슨 병이 있습니까?” 젠이 물었다.
“아닙니다. 쉬어야 할 일이 있어서 쉽니다.”
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제가 오전 업무를 맡겠습니다.”
카이렌이 놀랐다. 예전엔 누군가 쉬면 다른 사람에게 왜 쉬냐고 묻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맡을 일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그는 그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수현은 문 밖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카이렌이 기억의 진실을 알아내는 과정은 아직 길었지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지는 조금 더 분명해졌다. 그가 누구였는지보다 그가 이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카이렌은 휴게실에서 잠시 졸다가 꿈에 놀라 눈을 떴다. 땀이 이마를 적시고 있었다. 젠이 물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악몽입니까?”
“기억인지 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결론을 낼 필요는 없겠군요.”
카이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젠을 쳐다봤다. “너마저 그런 말을 하느냐?”
“원정대 전체가 그렇게 배웠잖습니까. 처음엔 저도 답답했는데, 잘못된 보고 때문에 출정했다가 진짜 다치는 것보다 낫더라고요.”
젠은 그날 밤 카이렌의 업무표를 대신 확인하겠다고 했다. 대신 자신의 근무시간이 늘어나지 않도록 데런과 순서를 바꿔 둔 상태였다. 카이렌은 자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대원들이 그렇게 준비하는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제가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카이렌이 중얼거렸다.
“그렇지는 않죠. 대장님은 이제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남겨 줍니다.”
카이렌은 잠깐 웃었다. 예전에는 영웅이 모든 일을 직접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누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쉬는 사람에게 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능의 증거인지 성장의 증거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원정대는 전보다 안전했다.
“내일 아침엔 내가 먼저 야간 기록을 확인하겠다.”
“대장님 내일 오전 휴무입니다.” 젠이 즉시 대답했다.
카이렌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후에 보겠다.”
“그때도 응급 상황이 아니면 다음 회의에서 보시면 됩니다.”
젠이 장난스레 웃었다. 카이렌도 웃었다. 쉬는 날을 지키는 데 이렇게 많은 동료가 필요할 줄은 몰랐다.
그날 밤 카이렌은 의료기록의 빈칸을 다시 생각했다. 모르는 사실이 자꾸 자신을 겁주었지만, 오늘 그의 옆에는 그 빈칸과 상관없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이 세 날 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직 몰라도, 내일을 어떻게 살지는 조금씩 배워 가고 있었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그는 제7원정대의 운영표를 펼쳤다. 카이렌은 자기 휴가 동안 젠과 오르카가 어떻게 교대로 의사결정을 했는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두 사람은 원정대의 다른 대원들을 위험한 임무에 무리하게 배정하지 않았고, 긴급 상황이 생기면 마을 경비대와 역할을 나눴다.
“저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어요.”
“그럼 이제 더 오래 쉴 수 있겠네요.”
카이렌이 눈살을 찌푸렸다. “꼭 그런 결론으로 가야 합니까?”
“네. 적어도 제가 상담인으로 일할 때는 그렇습니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수현도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남자의 웃음은 통증 때문에 끝이 짧았다. 지금은 웃고 난 뒤 스스로 물을 마시고 식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그는 다시 긴장한 얼굴로 수현을 찾았다. 의료 장부의 부속 안내문에 ‘보호 고리 일련번호의 원장: 북부 보관국’이라는 문구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K형 안정 장치의 재고 기록은 있었지만, 그 번호가 같은 형식의 다른 장치에도 사용됐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북부 보관국이면 라비엔이 있는 곳과 가까운가요?”
“지도상으로는요. 다만 그녀의 의료기록이나 업무 기록을 이용해 제 것을 알아낼 수는 없을 거예요.”
카이렌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수현은 그가 스스로 경계를 정하는 모습이 반가웠다. 옛 동료를 보고 싶다는 마음과 남의 기록을 열 권리는 다른 문제였다.
그들은 북부 보관국에 문의서를 작성했다. 요청 내용은 ‘K형 장치 일련번호의 발급 규칙’과 ‘동일 규격의 장치가 여러 곳에 사용됐는지 여부’뿐이었다. 카이렌 개인의 병력은 그가 승인한 범위를 넘기지 않았다.
그날 저녁 수현은 관측막사에서 확보한 중계 기록과 카이렌의 기록을 나란히 펼쳐 놓았다. 둘은 전혀 다른 사건이었다. 하나는 누군가의 이동을 둘러싼 동의와 장치 운용의 문제, 다른 하나는 치료받은 사람이 자신의 몸에 대한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 문제였다. 그 둘을 같은 미스터리의 부속품처럼 다루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카이렌이 물었다.
“저는 요즘 자꾸 모든 기록을 연결하고 싶어져서요. 그게 잘못될 때가 있더라고요.”
“연결되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까?”
“있죠. 당신의 개인적인 고통을 제 귀환에 필요한 단서라고 생각하는 건 싫어요.”
카이렌은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진지하게 말했다. “제 기록이 필요할 때는 제게 물으세요. 제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그때 제가 선택하면 됩니다.”
그 말에 수현은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카이렌은 누가 쉬라고 해야만 쉴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묻고 결정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며칠 뒤 카이렌은 원정대로 돌아가면서 휴가 계획의 다음 빈칸에 다시 날짜를 써 넣었다. 그는 앞으로 쉬게 될 날을 다른 대원들과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했다. 쉬는 건 아직 어색하지만, 몸이 망가진 뒤에 선택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수현은 마차에 올라타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카이렌 씨, 오늘 진료 결과는 제가 아니라 본인 기록에만 남겨 두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차가 떠난 뒤 수현은 보관국의 답변을 기다리는 사람 목록에 카이렌의 이름을 따로 적었다. 그것은 사건의 진실을 빨리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가 답변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날 밤 그녀가 확인한 중계 사건 자료에는 새로운 진전이 없었다. 그래도 하루가 헛되지는 않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둘러싼 빈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록하도록 선택했다. 수현은 그 사실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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