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에게서 편지가 온 날, 이수현은 산 아래 작은 여관의 공동 식탁에서 빵을 자르고 있었다. 봉투 앞에는 메이가 직접 쓴 짧은 문장이 있었다.
‘청구 금액이 줄었어요. 그런데 제가 낸 돈은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수현은 빵을 내려놓았다. 메이의 손목 고리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예비 적립비를 개인 부담에서 제외한 결정이 있었지만, 나머지 치료비가 누구의 책임인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이의 편지는 금액 자체보다 다른 문제를 묻고 있었다.
“환불을 요구하는 건가요?” 세드나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돈을 돌려달라는 말보다 먼저,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겠다는 뜻 같아요.”
수현은 답장을 쓰기 전에 메이가 첨부한 영수증 사본을 살폈다. 길드 표식이 붙은 두 장이었다. 하나는 메이가 직접 약재상에 낸 비용, 다른 하나는 원정대 치료비 계정에서 공제됐다는 비용이었다. 같은 날이지만 품목과 수량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다.
‘중복 청구’라고 적어 버리기에는 성급했다. 다른 환자에게 사용된 물품일 수 있었고, 장부에 묶음으로 계산된 마석 값일 수도 있었다. 수현은 질문을 세 개로 나눴다. 누가 받았는가. 무엇을 지급했는가. 개인에게 청구하는 승인 근거가 있는가.
그런데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메이의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편지에 웃는 얼굴을 그려 두었다.
‘먼저 질문했어요. 키아가 원장 열람 날짜를 잡아 줬습니다. 그리고 약재상 주인이 자기 판매 기록도 보여 주겠다고 했어요. 수현 씨는 급히 돌아오지 않아도 됩니다.’
수현은 웃었다. 자신이 여기 없어서 일이 멈추는 조직보다, 자신이 없어도 사람들이 질문하고 수정하는 조직을 바랐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메이는 여전히 불리한 규정과 싸우고 있었고, 질문 하나를 하기 위해 긴 업무를 마친 뒤에도 시간을 내야 했다.
며칠 후 수현은 왕도에 돌아와 메이를 만났다. 원정대에 급한 출정이 없는 날이었다. 메이는 붉게 빛나는 손목 고리를 보여 주면서도 전보다 차분해 보였다.
“이제 고리가 뜨거워질 때마다 무서워하기보다는 무슨 항목인지 확인해요.”
“고리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적응의 문제로 끝내면 안 되죠.”
“알아요. 그래서 해제 조건도 계속 물어볼 거예요. 다만 그전에도 제 일을 멈추지 않으려고요.”
두 사람은 동부 정산실에서 키아를 만났다. 키아는 개인 청구 원장과 실제 출고 원장을 따로 보여 주었다. 세드나는 메이의 명시적 위임 범위를 확인했고, 수현은 자신의 역할을 동석 상담인으로만 적었다. 키아가 설명한 첫 항목은 긴급 치료에 쓴 지혈 약초였다. 치료 기록에는 사용이 확인됐지만, 왕실 보급 예산과 개인 구매 영수증에 같은 공급처가 적혀 있었다.
“같은 약재상을 이용했으니까요.” 키아가 말했다.
“그럼 같은 약재인지 아닌지 구분할 일련번호가 있나요?” 메이가 물었다.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질문을 메이가 먼저 하고 있었다.
키아가 장부를 돌렸다. 수령 번호는 둘이었다. 한 번호는 원정대가 지급받았다는 물품, 다른 번호는 메이가 개인 돈으로 산 물품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번호에는 실제 수령자 서명이 없었다.
“처음에도 이런 일이 있었잖아요.” 메이가 말했다. “제가 받아 가지 않은 물약을 제가 받은 걸로 적어 두고, 나중에 물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못 했어요.”
키아는 고개를 숙였다. “이 번호는 수령 확인 보완 심사가 필요합니다. 실제 지급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개인 청구에 반영하려면 근거가 부족합니다.”
메이는 고리를 내려다봤다. 그것이 당장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어서 물었다.
“그럼 수령 근거가 확인되기 전까지 제게 청구하는 건 중단할 수 있나요?”
“해당 항목은 잠정 보류 의견을 올릴 수 있습니다. 최종 결정은 별도 심사에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미 낸 돈은요?”
“중복 여부를 확인한 뒤 환급 또는 상계 여부를 따로 판단해야 합니다.”
메이는 그 설명을 받아 적었다. 환불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금속 고리가 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하나로 묶여 있던 금액이 두 항목으로 갈라졌다. 실제 지출이 확인된 금액과, 수령·승인 근거가 불충분한 금액이었다.
정산실의 긴 복도에는 치료비를 문의하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수현은 메이와 함께 줄 끝에 섰다. 앞에 선 노인은 약품 이름을 읽지 못해 창구 직원이 읽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서류가 젖어 숫자가 흐려졌다는 이유로 다시 방문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메이는 그 모습을 보며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처음엔 저도 저분들처럼 창구 앞에서 말을 못 했어요.”
“지금은요?”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지 메모해서 와요. 순서가 바뀌면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수현은 메이의 수첩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것은 메이의 것이었다. 다만 수첩 안에 조그마한 종이 탭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것은 보였다. 치료받은 사람, 실제 사용 약품, 지급 장부, 개인 구입 영수증, 수령하지 않은 보급품.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모두 '치료비'라는 하나의 말로 뭉뚱그려져 있었다.
노인이 창구 앞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돌아서자 메이가 먼저 다가갔다. “제가 읽는 걸 도와드릴까요? 원하지 않으시면 그냥 가셔도 됩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는 가격과 날짜만 읽어 주었다. 병명과 치료 내용은 큰 소리로 읽지 않았다. 공공장소에서 개인의 병력을 외쳐 놓고도 도움을 줬다고 말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노인이 떠난 뒤 메이는 수현에게 말했다. “전에 저는 치료받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모든 걸 말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분이 물어본 것만 읽었어요.”
“그것도 중요한 구분이죠.”
“치료사도 배우는 게 많네요.”
키아는 한참 뒤에야 창구에서 두 사람을 불렀다. 그녀는 서류가 늦어진 사유부터 설명했다. 실제 약품 지급 장부와 정산 장부의 담당 부서가 달라 원본 대조에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었다. 메이는 항의부터 하지 않고 그 설명을 받아 적었다.
“그럼 담당 부서가 다른 동안 저에게 청구를 계속해도 되는 이유가 있나요?”
키아는 잠시 생각했다. “현재는 강제 징수 보류 중입니다. 다만 시스템에서 잔액 안내가 보일 수 있어요.”
“안내라지만 제가 보는 고리에는 '미납'이라는 말이 떠요. 그걸 보고 동료들이 제가 약을 훔친 줄 알아요.”
키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손목 고리가 개인에게 어떤 압박을 주는지 오래 고민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장부 화면에서는 숫자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메이에게는 하루 종일 사람들 눈에 보이는 표시였다.
“최종 결론이 나기 전이라도 분쟁 중이라는 문구로 바꾸도록 요청하겠습니다.”
“제가 그 요청을 직접 하고 싶어요.”
수현은 메이가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적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감추려는 게 아니었다. 확정되지 않은 채무를 확정된 것처럼 표시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메이는 원정대 막사의 작은 마당에서 치유사 견습생을 만났다. 견습생은 병실 업무가 너무 많아 식사 시간을 놓쳤다고 했다. 메이는 잠시 예전처럼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게 물었다.
“오늘 교대할 사람이 있니?”
“젠이 전령을 맡아서 임시 치유사는 쉬고 있어요.”
“그럼 쉬는 사람을 다시 부르기 전에 담당관에게 긴급 환자 수와 남은 인력을 알려야 해. 네가 혼자 다 처리하면 다음번에도 괜찮은 줄 알 거야.”
견습생은 놀라서 메이를 쳐다봤다. 메이는 자기 자신에게도 그 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환자가 아프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무한히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환자를 지키려면 치료하는 사람도 지켜야 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메이는 카이렌과 새 운영표를 살폈다. 잔여 치료비 심사일에는 메이가 정식으로 업무에서 빠지는 것으로 처리했다. 카이렌은 인력 부담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메이는 그 말이 자신에게 심사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둘은 필요한 대체 인력과 비용을 따로 적었다.
“제가 없으면 누가 하죠?” 메이가 물었다.
“그걸 제가 알아봐야겠죠.” 카이렌이 말했다. “제가 용사니까 혼자 다 하겠다고 말하면 또 같은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메이는 웃었다. “많이 바뀌었네요.”
“그 말, 요즘 자주 듣습니다.”
수현은 식탁 끝에서 따뜻한 국물을 마셨다. 당장 치료비가 없어지지도 않았고, 원정대의 인력이 갑자기 늘지도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또 한 번 자기 몸과 시간을 빚으로 담보 잡히는 일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메이는 청구서 모서리에 숫자를 크게 적었다. ‘확인된 것’, ‘확인 전인 것.’ 수현은 그 분류만으로도 다음 심사를 준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용히 안도했다.
심사가 끝난 후 메이는 수현에게 말했다. “예전에는 막연히 다 나쁜 청구라고만 생각했어요. 지금은 제가 낸 돈과, 길드가 냈다는 돈, 아직 확인하지 못한 돈을 구분할 수 있겠어요.”
“그게 중요해요. 분명한 건 분명하다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가 이렇게 장부를 보는 동안 다른 치유사들이 일하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저를 원망하지 않을까요?”
수현은 쉽게 괜찮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원정대 교대 기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카이렌이 새로 만든 휴가·대체 계획에는 메이의 행정 심사 시간을 공식적인 부재 사유로 적어 놓았다. 그 시간에 다른 치유사가 무리해서 연속 근무하지 않도록 업무를 분산했다.
“이제 동료들이 알아야 할 건 메이 씨가 장부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수인계된 환자를 누가 맡는가예요.”
“그걸 카이렌이 적었어요?”
“네. 이제 그분은 제가 없어도 일합니다.”
메이는 작게 웃었다. “처음에는 잠을 자게 만드는 것부터 힘들었는데요.”
“저도 기억해요. 잠든 사람한테 긴급 서명을 요구하던 시절이 있었죠.”
두 사람은 잠시 웃었다. 그러다 메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수현 씨는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정말 떠날 거죠?”
수현은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떠나고 싶었다. 그 사실은 분명했다. 동시에 이곳에 남게 될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최초의 사람은 메이였다.
“네. 돌아가고 싶어요.”
“그럼 저도 도울게요. 수현 씨는 저희 때문에 여기 남아 있어야 할 의무가 없으니까.”
수현의 목이 잠시 메었다. 그 말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 주기를 오래 기다렸던 말이었다.
“메이 씨, 저는 처음부터 계약서를 참 많이 봤어요.”
“네. 거의 매일 봤죠.”
“근데 이 말을 들으니까 계약서보다 더 확실한 게 있다는 걸 알겠어요. 어떤 사람이 원한다고 말하는 걸 다른 사람이 진지하게 듣는 거요.”
메이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밖에는 원정대 전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메이를 찾으러 왔지만 예전과 달리 서명부터 요구하지 않았다. 새 환자가 도착했고, 당직 치유사에게 치료 가능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는 설명이었다.
“제가 갈 수 있어요.” 메이가 말했다. “다만 제 근무시간 안에요. 이어지는 처치는 다음 당직에게 넘길 겁니다.”
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변화였지만 길드의 오래된 천막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수현은 뒤에서 메이를 바라봤다. 여전히 손목에는 붉은 고리가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보이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래도 메이가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은 예전처럼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키아의 보완 통지가 왔다. 잔여 항목 가운데 하나는 근거 확인 전까지 개인 청구 산정에서 잠정 제외하도록 심사에 상정됐고, 다른 항목은 실제 치료에 사용됐는지 검토가 계속됐다. 최종 채무 취소나 고리 해제는 아니었다.
수현은 그 결과를 정리해 메이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귀환 사건 서류 한 장도 갱신했다. ‘귀환 희망은 계속 유효. 원정대에 대한 무기한 근무 의무 없음.’
메이가 읽고 웃었다. “그거, 제 손목에도 적어 둘 수 있나요? 제가 원할 때 그만둘 권리가 있는지요.”
“그건 계약과 규정을 확인해야겠지만, 질문부터는 누구든 할 수 있어요.”
메이는 자신의 수첩을 펼쳐 또박또박 적었다. ‘이 일의 끝을 내가 질문한다.’
수현은 그 문장이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청구서보다 중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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