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기 시작한 건 수리반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이었다.
산 위 사람들은 첫눈이 오면 먼저 지붕을 보고, 두 번째로 창고를 본다고 했다. 지붕이 버티는지와 남은 장작이 충분한지가 그날의 일정을 결정했다. 수현은 창밖에서 제설용 삽을 옮기는 베른을 보며 휴대전화를 켜 보려다 그만두었다. 배터리는 이미 오래전에 다했다. 무엇보다 이곳의 눈은 알림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오늘 독립 교정표를 못 볼 가능성이 크네요.”
세드나가 말했다. “열람 허가는 왔지만 이동 제한 공문이 더 일찍 도착했습니다.”
“이쯤 되면 서류끼리 경주라도 하는 것 같아요.”
하르나가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아침 식사부터 하세요. 눈이 잦아들기 전까지 별관 문은 열지 않습니다.”
수현은 따뜻한 죽을 받아 앉았다. 서울에서라면 회의실에 늦었다고 아침을 거르던 날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회의실이 산꼭대기였고, 안전을 이유로 늦어야 했다. 상황은 이상했지만 지켜야 할 원칙은 같았다.
점심 무렵 수리반 책임자 리스가 막사에 들어왔다. 머리칼 끝에 성에가 얼어 있었다. 그녀는 굴뚝을 살피기도 전에 작업 명령서를 찾았다.
“단독 지붕 작업으로 배정됐습니다. 그런데 여기 경사가 급해요. 보조 인력 한 명 없이는 못 합니다.”
하르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매년 혼자 해 주던 분은 괜찮다고 했는데.”
“그분이 괜찮았다는 뜻이 아니라, 사고 없이 내려왔다는 뜻이겠죠.”
수현은 숟가락을 멈췄다. 리스의 말은 조용했지만 산 위 공기를 바꿔 놓았다. 단독 작업이 관행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오늘도 그래야 할 의무는 없었다.
“보조 인력을 부르면 오늘 보수를 못 끝낼 수도 있어요.” 하르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임시로 연기를 빼고 원장을 안전 장소로 옮기는 방법부터 찾겠습니다. 나중에 사고비 정산을 하는 것보단 낫겠죠.”
루세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자는 안전 절차를 미루는 데 가장 약한 핑계를 댈 때가 있다고 했다. 장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수현은 리스에게 작업 중단 사유와 추가 인력 요청을 명령서 뒷면에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리스가 직접 썼고, 하르나가 수령만 확인했다.
그때 베른이 비상 창고에서 밧줄을 꺼내며 말했다. “저라면 도울 수 있어요.”
“아직 발꿈치 상처가 있잖아요.” 수현이 말했다.
“어제보다 괜찮아요. 돈도 더 받을 수 있고요.”
리스가 몸을 낮춰 베른의 장화 안쪽을 살폈다. “높은 곳에서 밧줄을 잡는 사람은 발이 더 중요합니다. 보조라고 안전한 일이 아니에요. 이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못 시켜요.”
베른은 입술을 깨물었다. 쉬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쉬기 어려웠다. 수현은 대신 일을 시켜 줄 수 없었다.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더 그랬다. 그래서 운송조합 계약서의 ‘기상으로 작업 불가능한 날’ 조항부터 물었다. 토렌이 보관한 약정에는 기상 대기료 항목이 있었다. 다만 실제로 신청한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왜 신청하지 않죠?”
“며칠 뒤 배정에서 빠질까 봐요.” 베른이 말했다.
수현은 잠시 침묵했다. 종이에 권리가 적혀 있어도 그것을 꺼내는 사람에게 불이익이 돌아온다면 효력이 작아진다. 그래도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있었다. 토렌이 현장 책임자로 날씨와 도로 폐쇄를 확인하고, 베른이 신청서를 내는 것. 수현은 두 사람이 각자의 이름으로 쓸 문장을 정리했다.
“정말 받을 수 있을까요?”
“확답은 못 해요. 다만 이 문구는 계약에 있어요. 신청을 안 하면 심사도 시작되지 않죠.”
오후 늦게 보조 수리공이 도착했다. 리스가 두 사람의 작업 전 점검을 시작하는 동안 수현과 세드나는 별권 목록의 이관 경로를 조사했다. 하르나는 각 장부의 상자 번호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상 야간 교정표가 들어 있어야 할 상자에는 두툼한 천과 끈만 남아 있었다.
“누가 빼 갔다는 건가요?” 수현이 물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하르나가 바로 대꾸했다. “여기에는 재건조 기록이 있습니다. 곰팡이가 번져서 종이를 따로 뺐을 수 있어요.”
“그 기록부터 보면 되겠네요.”
재건조 접수표에는 ‘제삼 막사 교정표 1건, 보존 상태 불량, 인접 별동 이송’이라고 적혀 있었다. 받는 사람 칸에는 이름 대신 숫자 두 개가 있었다. ‘인계자 3, 수령자 2.’
세드나가 설명했다. “사람 수가 아니라 담당 자리 번호일 수도 있어요.”
하르나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오래된 난로 옆 창고를 가리켰다. “별동이 없어진 건 삼 년 전입니다. 지금은 눈 관측기 놓는 차양만 남아 있어요.”
일행은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기록이 거기에 있다고 가정해 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문서의 보존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현은 별동의 폐쇄 당시 재이관 목록을 신청했다.
리스가 지붕에 오르기 전 안전 점검을 할 때 수현은 옆에서 오래된 장비 목록을 보았다. 안전 밧줄은 규격에 맞았지만 고리를 고정하는 금속판이 녹슬어 있었다. 리스는 그 판으로 사람을 지탱하겠다는 계획에 즉시 반대했다. 하르나는 몇 년 전부터 쓰던 물건이라며 놀랐다.
“그럼 지금까지 다들 위험했던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그동안 사고가 없었다고 해서 오늘도 안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리스는 교체용 금속판을 가져오도록 요청하고 기다렸다. 수현은 그 기록을 볼 수 있도록 하르나에게 부탁했다. 하르나는 한참 서랍을 뒤져 장비 점검표를 찾았다. 점검표에는 작년까지 모두 '적합'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검사자의 이름은 여러 해에 걸쳐 똑같이 찍혀 있었고, 실제 방문 서명은 없었다.
“예전 검사자는 마을 밖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하르나가 설명했다. “그래도 목록에 이름을 남겨 놓아야 접수가 돼서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수현은 장부를 천천히 닫았다. 옛 E-17 기록에서 보았던 문제와 닮아 있었다. 시스템은 담당자 칸이 비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고, 현장은 일을 끝내기 위해 이전 사람의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처음에는 작은 편법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실제 점검이 됐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름을 고치는 게 우선이 아니라, 앞으로 누가 실제 점검했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야겠네요.”
리스는 자신의 점검일지를 꺼냈다. 그녀는 고정판 상태를 '사용 불가'로 적고 사진 대신 손으로 녹의 범위를 그렸다. 금속판은 그 자리에서 제거되지 않았다. 사고 위험이 있는 물건을 남겨 두면 누가 다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사용 금지 표식을 붙이고 관리 책임자에게 교체 목록을 제출했다.
베른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런 장비가 위험하면 저희가 매는 짐끈도 점검해야겠죠?”
“맞아요.” 리스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을 오늘 추가 점검자로 동원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점검을 할 사람과 시간부터 정해야죠.”
베른은 잠시 놀라더니 웃었다. 그는 늘 일이 하나 발견되면 자기에게 먼저 돌아올까 봐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필요한 일이 생겨도 그것을 담당할 사람과 비용을 정한다는 사실이 낯설고 반가운 모양이었다.
창밖에 눈이 더 쌓였다. 토렌이 왕도와 연락하는 전령에게 구조용 삽 두 개를 요청했다. 당직자는 물자를 요청하는 데도 복잡한 신청 번호가 필요하다고 했다. 수현이 기록을 확인하니 같은 번호가 난로 부품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업무가 다르지만 편의상 하나의 물품 번호로 묶였던 것이다.
“그러면 삽 대신 난로 부품이 와도 서류상 지급 완료가 될 수 있겠네요.”
“그런 일도 있었죠.” 토렌이 말했다. “그래서 겨울마다 싸웁니다.”
리스는 긴급 물품의 종류를 별도 품목으로 접수하고, 토렌은 실제 수령 시 확인하겠다고 했다. 직원들이 각자 자기 업무에서 확인해야 할 작은 약속을 정하는 동안 수현은 손을 보태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방법을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들이 이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저녁 식사 전 리스는 수현에게 물었다. “그렇게 기록을 따지면 언제 일을 끝낼 수 있습니까?”
수현은 한참 생각했다. “기록을 위한 기록만 늘어나면 저도 싫어요. 하지만 정말 끝났는지 모르면서 끝났다고 적으면 다음 사람이 더 위험해지잖아요. 필요한 것만 남겨야죠.”
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알고 싶은 건 왕국 행정의 개혁론이 아니었다. 내일 지붕에 올라갈 사람의 목숨을 지켜 줄 최소한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오래된 금속판을 쓰지 않고, 일한 사람의 이름을 실제대로 쓰고, 날씨가 나쁘면 멈출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었다.
그날 수현은 관측막사의 재건조 이관표를 다시 살폈다. 기술 문서를 찾기 위해 왔지만, 막사에서 쓰는 인력과 장비의 기록이 어떻게 어긋나는지도 보았다. 여러 장부는 서로 다른 이유로 틀렸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빈칸이 있으면 누군가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빈칸을 아무 숫자나 이름으로 채우면 불편함이 사라지는 대신 위험이 남았다.
다음 점검에서는 빈칸도 그대로 남기되, 그 빈칸을 언제 누구에게 확인할지 기한을 적기로 했다.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 훗날 같은 장부를 보는 사람이 적어도 위험을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녁에는 리스가 굴뚝을 고쳤다. 검은 그을음이 가득한 봉투를 내려놓고, 손을 씻으며 말했다. “굴뚝이 막힌 원인은 새가 둥지를 튼 게 아니라 배관이 안쪽으로 꺾인 탓입니다. 다시 막힐 가능성이 높으니 부품 교체를 요청해야 합니다.”
하르나가 긴 한숨을 쉬었다. “매번 청소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매번 사람을 지붕 위로 올리는 게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수현은 기록을 대신 쓰지 않았다. 하르나와 리스가 각자의 이름으로 시설 보수 의견서를 만들었다. 수현이 확인한 것은 원인, 조치, 향후 위험을 구별했다는 점이었다.
난로가 다시 타오르자 수현은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별권 장부의 실물은 아직 보지 못했다. 대신 세 가지 사실을 얻었다. 상자에서 문서가 빠진 시점, 보수 목적으로 별동에 이동한 기록, 그리고 별동 폐쇄 때 이관했어야 할 목록이 남아 있다는 것.
다음 날 아침, 폐쇄 기록을 찾던 하르나가 얇은 장부를 내놓았다. 장부에는 두 개의 수령 번호가 또렷했다. 그중 하나가 사고 밤 이후의 야간 교대 근무번호와 같았다.
“같은 사람이었다는 뜻인가요?” 수현이 물었다.
“아뇨.” 하르나가 말했다. “같은 자리였다는 뜻이지요. 여기 근무자가 바뀌면 번호는 그대로 갑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자리 번호로 바꾸면 편리해진다. 하지만 누가 결정했는지 추적해야 할 때는 그 편리함이 문제를 가린다. E-17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들은 옛 번호를 쓰던 시기의 인사 배치표를 찾아야 했다. 하르나는 인사기록은 관리기관의 별도 허가 없이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수현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확인되지 않은 이름을 범인처럼 쓰는 일은, 아무 근거 없는 서울행 표식을 믿는 것만큼 위험했다.
베른은 눈이 그친 오후에 산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는 기상 대기료 신청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토렌이 조합 접수처까지 동행하겠다고 했다.
“이번엔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받기 전까지는 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수현이 대답했다.
“선생님은 참 사람 기대를 꺾는 말을 하네요.”
“기대를 꺾으려는 건 아니에요. 확인할 수 있는 걸 확인하자는 거죠.”
베른이 쑥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기록이 남겠네요.”
산등성이에 구름이 걷혔다. 수현은 별권 이관표 복사 허가를 기다리며 창문에 손을 얹었다. 추위를 견디는 사람들의 장부가 흩어지고, 그 장부가 서로 다른 건물로 옮겨지고, 몇십 년 뒤 누군가가 소환 기록을 추적하며 그 틈을 다시 맞추려 한다. 참 오래된 문제였다.
그날 밤 수현은 루세에게 물었다. “이걸 다 찾아도 귀환 방법은 못 얻을 수 있죠?”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음 장부가 궁금해요.”
“그건 건강한 호기심입니다. 다만 호기심 때문에 난간을 넘지는 마세요.”
수현은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제 직업 특성상 난간보다 출입 허가서를 더 오래 봅니다.”
막사의 문이 잠겼다. 오늘은 원장의 의미를 바꾸는 결정적인 기술 증거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분실’로 처리될 뻔한 문서 하나가 재건조와 별동 이관의 경로를 따라 되살아났다. 수현은 사건 기록에 ‘실물 미확인, 소재 추적 중’이라고 썼다. 그 말은 실패가 아니라 다음 조사의 정확한 출발점이었다.
제14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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