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세 가지 경고가 쓰여 있었다.
첫째, 해가 지면 통행을 삼갈 것.
둘째, 빗물에 젖은 장화로 관측막사에 들어오지 말 것.
셋째, 허가 없는 사람은 기록을 열지 말 것.
이수현은 세 번째 문장에 동그라미를 쳤다. 첫째와 둘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단과 날씨를 무시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세 번째는 한국에서도 지겹게 봤던 문구였다.
“막사에 들어가는 허가와 기록 열람 허가가 다르다는 뜻이군요.”
세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구를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시네요.”
“이 정도면 취업시켜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난 계약은 끝났다고 매번 강조하시던 분이.”
“취업하겠다는 게 아니라, 제가 읽을 줄 아는 문장을 보고 반가워한 거예요.”
루세는 두 사람의 농담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짐마차의 바퀴를 살폈다. 협곡 입구부터는 사람 셋이 함께 걸어야 했다. 특히 수현이 들고 온 장비는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연구실에서 만든 네 번째 홈의 종이 탁본과 판독 의견서뿐이었다. 실제 부품은 밀봉한 채 다른 곳에 남겼다.
“정말 전원을 넣지 않을 겁니다.” 루세가 확인하듯 말했다.
“네. 시작하기 전에 그렇게 합의했잖아요.”
“산 위에서는 누군가 옛 기계를 보고 호기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저라면 먼저 말릴게요.”
수현은 그 말에 잠시 웃었지만, 실은 어느 기계라도 당장 작동시켜 서울로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밤마다 꿈속에 보이던 것은 빛나는 문이 아니라 사무실 컴퓨터의 로그인 화면이었다. 정전된 휴대전화를 볼 때마다 자신이 아는 시간이 여기에선 얼마나 무력한지 느꼈다. 그래도 서둘러 손잡이를 잡았다가 다른 누군가가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산길 안내원 토렌은 그들의 서류를 읽더니 마지막 줄에 멈췄다. “독립 원장 열람이라고요? 올라가면 산사람들 장부가 있습니다. 누가 얼마나 일을 했고, 눈보라 때 누구 대신 불침번을 섰는지까지 적혀 있죠. 그런 것도 가져가실 겁니까?”
“아뇨. 저희가 확인할 건 옛 관측 표식에 관련된 항목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은 필요한 경우에도 허락을 받아야 하고요.”
토렌은 잠깐 그들을 살폈다. “가져가는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하긴 하지요.”
“그러면 가져가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겨 드리겠습니다.”
수현은 수첩에서 작은 종이를 찢어 현장에서 볼 항목, 복사하지 않을 항목, 되돌려줄 시점을 구분해 적었다. 세드나가 문장을 다듬어 공식 열람 목적서를 만들었다. 토렌은 그것을 접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식으로 쓰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저도 산 위에 올라가는 건 처음이에요. 서로 확인하는 게 안전하겠죠.”
한 시간쯤 올랐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 아래에서 보면 얌전한 구름이었는데, 바람이 협곡을 타자 빗줄기가 옆으로 누웠다. 수현은 미끄러지는 자갈을 피해 손을 뻗었다. 토렌이 그녀의 팔꿈치를 받쳤다.
“여기서 뛰지 마십시오. 늦어도 괜찮습니다.”
“문서 보존 기간이 삼십 년인데 제가 오늘 삼십 분 늦는다고 큰일은 아니겠죠.”
“그걸 알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뒤에서 짐을 지던 청년이 자꾸 시계를 바라봤다. 보수가 운반 횟수로 계산되어 일찍 돌아가야 저녁 한 번을 더 운반할 수 있다고 했다. 수현은 다시 멈춰 섰다. 청년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얼굴이었다. 일을 멈추게 한 사람에게 화가 날까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베른입니다.”
“미끄러지면 산에서 치료비는 누가 내나요?”
베른이 눈을 피했다. “다친 사람이요. 짐도 망가지면 값이 깎여요.”
수현은 토렌을 바라봤다. 그는 불편한 듯 목을 긁었다. “내가 정한 조건은 아닙니다. 운송조합에서 내려온 장부예요.”
“바꾸라고 명령할 권한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 이 비에 무리해서 올라가면 저희도 같이 다칠 수 있죠. 오늘 맡긴 운반비는 횟수가 아니라 한 번의 안전한 왕복으로 지급할게요. 그 비용을 조합 정산과 어떻게 처리할지는 따로 확인하시고요.”
세드나가 수현을 흘끗 보았다. 개인 조사비에서 추가 비용을 내겠다는 뜻임을 알고 있었다. 수현은 마음속으로 남은 은화를 계산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은화 주머니는 한국에서 월말을 맞던 때처럼 얄팍해졌다. 그러나 누군가가 서둘러 다친 다음보다 비용을 정리하기는 쉬웠다.
토렌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갑시다.”
베른은 처음에는 미안하다고 했다. 수현은 대답했다. “위험하다고 말했을 때 미안해할 일은 아니에요.”
그 말에 청년이 장화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실은 발꿈치가 까져 있었다는 사실은 잠시 후에야 드러났다. 메이가 함께 있었다면 한 번에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수현은 가지고 온 깨끗한 천을 건네고, 토렌이 안내한 비상막사에서 상처를 씻도록 했다. 치료를 해 주는 척하며 모르는 일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했다.
오후 늦게 그들은 산등성이 아래의 관측막사에 닿았다. 지붕은 회색 석판이었고, 창문은 바람 때문에 안쪽에서만 열리게 되어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솟는 것을 보고 수현은 긴장이 풀렸다. 폐쇄됐다고 들었던 시설에 아직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문을 연 사람은 털실 장갑을 낀 중년 여성 하르나였다. 그녀는 방문자 명부를 내밀면서도 서류보다 먼저 젖은 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기록은 안 젖었습니까?”
“저희도 아직 안 젖었습니다.” 수현이 대답했다.
“종이가 사람보다 귀한 곳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손부터 녹이세요.”
하르나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그러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주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루세가 장치 관련 입회 승인을 내밀자 그녀는 읽지 않고 벽의 게시판을 가리켰다. 게시판에는 열람 허가 기관, 시설 안전 책임자, 기록 소유기관이 각기 다르게 적혀 있었다.
“길 아래서 허가받았다고 여기 열쇠가 자동으로 열리는 건 아니에요. 보존 문서는 기상분관의 것이고, 관측막사의 건물은 산지청 것이지요. 저는 열쇠를 지키지만 내용 공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수현이 탄성을 내뱉었다. “분리가 잘 되어 있네요.”
“분리만 잘 되어 있고 서로 답장이 늦어요.”
하르나는 무릎 위에 낡은 장부를 얹었다. 방문자 접수와 열람 신청이 기록된 책이었다. 옛 문서 중 하나에는 ‘독립 관측’이라고 찍혀 있었다. 수현은 그 단어를 보고 숨을 죽였다.
“그게 저희가 찾는 원장인가요?”
“아마도. 하지만 독립이 무슨 뜻인지부터 확인하세요. 여기 사람들은 본부와 따로 썼다는 의미로 그 말을 붙였어요. 같은 신호를 따로 받았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루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수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문장도 이름만으로 결론을 대신하지 못했다.
열람실은 작았다. 안쪽 벽에 습도계를 걸어 두었고, 천장에는 물방울을 받는 양동이가 있었다. 하르나는 곰팡이를 막기 위해 밤마다 난로를 피운다고 했다. 그 일이 정식 관리인 업무에 들어 있느냐고 수현이 묻자 그녀는 비웃듯 말했다.
“낮에 열람객 맞는 건 일로 쳐줍니다. 밤에 종이 살린 건 취미인 줄 아나 봐요.”
“밤마다요?”
“겨울 한 달은요. 눈이 녹는 동안은 쉬면 안 됩니다.”
수현은 즉시 업무표를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 질문하는 사람은 원장 열람을 하러 온 외부인이었다. 자신이 아닌 이곳의 직원이 원하지 않는 조사까지 떠밀어선 안 된다. 대신 하르나에게 물었다. “그 얘기도 별도 정산 문제로 제기하고 싶으세요? 제가 아는 범위에서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방법은 설명할 수 있어요.”
하르나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일단 기록부터 보시죠. 그다음에 제가 결정할게요.”
그날 저녁, 그들은 열람실 유리 너머로 원장의 외피만 확인했다. 두꺼운 가죽 표지에는 ‘동쪽 산지 제삼 관측막사, 비상 분기 교정 및 독립 표식 원장’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표지의 연도는 손상됐고, 봉인 옆에는 얇은 검은 선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
“두 번째 선은 뭐죠?” 수현이 물었다.
하르나는 등잔을 가까이 들었다. “옛 관리인이 한 번 다시 묶었단 뜻일 겁니다. 원본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지요.”
누구도 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신청서에는 외피 및 보관상태 확인만 허가돼 있었다.
수현은 그 선을 오래 바라봤다. 수많은 서류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중요한 순간마다 새로 열린 건 문이 아니라 추가 신청서였다. 그게 지긋지긋한 날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다른 사람의 기록을 함부로 열지 않았기 때문에 내일 읽게 될 내용에도 설명할 근거가 생겼다.
창밖에서 바람이 막사를 흔들었다. 하르나가 램프를 껐다. “내일 아침 분관의 답장이 도착하면 첫 장을 보여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답장이 안 오면요?”
“다시 기다려야지요.”
수현이 작게 웃었다. “기다리는 것도 업무네요.”
“그러면 수당부터 주세요.”
열람실을 나서기 전 하르나는 막사 이용료가 따로 있다고 설명했다. 숙박료에는 난방이 포함되지만 기록 열람에 필요한 난로 비용은 별도라는 것이었다. 같은 난로를 쓰는 데 장부만 두 개였다. 수현은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난로가 지금 어떤 사람은 따뜻하게 하고 어떤 사람은 문서를 따뜻하게 하는 건가요?”
“왕도에서는 그렇게 분리해서 계산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난로가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있나 보네요.”
하르나는 피식 웃었다. 루세는 비용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수현은 서류를 확인했다. 기술서고의 조사 예산으로 지불할 수 있는 비용과 자신의 숙식비는 달랐다.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지출됐다고 모두 같은 업무 비용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세드나가 기관 입회에 필요한 난로 비용을, 수현이 본인 숙박비를 따로 계산했다.
“돈은 똑같이 나가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죠?” 루세가 물었다.
“나중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빚을 대신 떠안지 않게 하려고요.”
수현은 메이의 손목에 남은 금속 고리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작은 비용 구분 하나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떤 항목을 개인이 낸 걸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쉬어야 할 때도 일을 해야 할 수 있었다.
하르나는 계산서를 보다가 오래된 난방 장부를 가져왔다. 그녀는 매년 겨울 밤마다 원장의 습도를 기록하고도 수당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보존 난방 특별 지급’이 한 번 적혀 있었다. 지급 수령자 칸은 마을 공동계정으로 되어 있었고, 그녀에게 실제로 전달됐다는 기록은 없었다.
“제가 이 돈을 못 받았다고 해도 되겠습니까?”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씀하실 수는 있죠. 다만 지급된 돈의 목적과 실제 수령자를 더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하르나는 소매를 걷고 종이를 펼쳤다. 밤새 불을 지킨 날짜를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해도, 굴뚝을 청소한 날과 장작을 배달받은 날은 작은 표시로 남아 있었다. 수현은 그 기호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만든 자료는 아니었다. 그저 그날 밤 종이가 얼지 않도록 지킨 흔적이었다.
“기록을 복사해 갈 건가요?” 하르나가 물었다.
“제가 아니라 하르나 씨가 필요할 때 사용할 자료예요. 본인에게 먼저 사본을 남기세요. 그리고 지급 내역을 확인할 권리가 있는지 담당 기관에 물어보시면 됩니다.”
하르나는 종이를 덮었다. “여기 온 사람들은 대개 관측 수치만 알고 싶어 했어요.”
“저도 그게 급한 건 맞아요. 그런데 그런 숫자를 누가 밤새 지켰는지도 무시할 수는 없겠네요.”
바깥에서 토렌이 불렀다. 베른이 내려갈 준비를 하며 마차에 묶은 밧줄을 점검하고 있었다. 수현은 그의 손등이 추위로 갈라진 것을 보았다. 그에게도 쉬는 날과 보수가 연결된 장부가 있었다. 나중에 그 장부를 확인할지 말지는 베른이 정할 일이었다.
수현은 막사의 방문자 명부에 자신의 체류 목적과 안전 조건을 적었다. '기술 기록 확인을 위해 방문. 상주 근무자에게 추가 야간 작업 요구하지 않음.' 하르나가 그 문장을 읽고 작게 웃었다. “이상한 손님이네요.”
“저도 여기에 와서 제가 꽤 이상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녀들은 잠깐 마주 웃었다. 막사에는 신비한 빛이 없었다. 대신 밤에 지붕이 새는 소리와 나무 타는 냄새가 있었다. 수현은 이 사소한 것들이 오래된 원장보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수현은 좁은 침대에 누워 관측막사의 지붕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빗방울과 나뭇가지가 번갈아 부딪혔다. 저 멀리 서울에서는 같은 시간에 무슨 소리가 들릴까. 지하철 도착 안내음일까, 회사 복도에서 울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일까. 그녀는 답을 알지 못했다.
다만 오늘 자기 손으로 쓴 약속 하나는 분명했다. 원본의 내용을 보려면 권한과 보존 상태를 먼저 확인한다. 사람을 산으로 부르려면 안전한 이동 조건과 보수를 먼저 정한다. 그리고 위험할 때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참가자가 알아야 한다.
수현은 잠들기 전에 수첩 마지막 줄에 적었다. ‘독립 원장: 존재 확인. 열람 허가 대기. 비상 분기 번호와 동일성 미확정.’
막사 복도 끝에서 하르나와 베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베른은 내일 내려가도 될지 묻고 있었다. 하르나는 그를 혼내지 않았다. 다친 발을 낫게 하고 내려가라고 했다. 산에서는 한 번 더 운반하는 것보다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뒤따랐다.
수현은 담요를 끌어올렸다. 오늘 얻은 성과는 두 가지였다. 오래된 책 하나가 실재한다는 사실과, 서류가 아닌 사람들이 내일도 같은 자리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녀에게는 둘 다 조사 기록에 남길 가치가 있었다.
제14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