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회복소에서 도착한 편지는 평소와 달리 두 통이었다.
첫 번째는 라비엔이 오르카에게 보낸 개인 편지였다. 가을이 시작된 북방의 길과 새로 심은 약초의 이야기가 짧게 적혀 있었다. 두 번째는 왕립길드에 제출하는 계약 정산 의견서의 사본이었다.
수현은 오르카에게 물었다. “이걸 제가 읽어도 되는 건가요?”
“라비엔이 그 범위까지 허락했어. 개인 편지는 나만 보고, 정산 의견서에서 공개 가능한 부분만 네게 물으라고 했지.”
“좋아요. 개인 편지는 안 볼게요.”
오르카는 웃었다. “예전 같으면 네가 허락해도 내가 그냥 보여 줬을 텐데.”
“예전의 당신은 이 일과 상관없으니까 지금부터 잘하면 돼요.”
의견서에는 서로 다른 두 계약이 등장했다. 제7원정대에서 전출됐을 때의 업무 인계 계약과 북방 회복소에 머물며 기록 업무를 맡았던 협력 계약이었다. 두 계약은 시기가 겹쳤다. 길드에서는 전출했으니 원정대 임금이 끝났다고 보고, 회복소에서는 임시 보호 대상이라 보수가 아니라 생활 지원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둘 다 자기 돈은 아니라고 하는 거군요.”
오르카가 씁쓸하게 말했다.
수현은 계산표를 자세히 보았다. 라비엔은 다리가 아픈 상태에서도 일정 시간 기록 업무를 했다. 누군가 부탁해서 한 일이었고 실제 결과물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그 일을 해 주었는데도 계약 주체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보수의 성격이 모호해진 것이다.
“제가 왕국법상 임금이라고 단정할 순 없어요. 하지만 작업을 누가 요청했고, 누가 결과를 받았으며, 어떤 약속을 했는지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엔이 그걸 직접 쓰겠다고 했어. 나는 증언만 하려고.”
그날 오후 수현과 오르카는 회복소 서기와 원격으로 연결된 기록 회신을 확인했다. 물론 사람 목소리를 보내는 장치는 아니었다. 왕도 공동보존실의 서신망을 통해 하루 걸려 도착한 문서였다.
라비엔은 ‘복귀 요청을 받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또한 현재 북방에서 계속 일할지, 치료를 우선할지는 본인이 결정하겠다고 적었다. 수현은 그 문장을 읽으며 조용히 웃었다.
오르카가 말했다.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 우리 모두 그리워하니까.”
“그 마음을 말할 수는 있죠.”
“하지만 오라고 명령할 순 없는 거겠지.”
“네. 그건 다른 일이에요.”
오르카는 오래 침묵했다. 라비엔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시절, 그는 매일 그녀의 방패를 닦았다. 다시 만나면 돌아오라는 말부터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난 뒤 깨달았다. 사라진 사람을 되찾는 일이 곧 그 사람을 예전 자리로 데려오는 일은 아니었다.
“편지에 답장을 써야겠어.”
“뭐라고요?”
“치료 잘 받고, 네가 결정하면 그걸 들려 달라고.”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산 의견서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회복소 서기는 ‘협력’이라는 단어가 보수를 지급해야 하는 계약인지 일회성 자원봉사인지 불명확하다고 했다. 오르카는 화가 났다.
“몇 달 동안 기록을 정리했는데 그냥 도와줬다고요?”
“그래서 자료가 필요해요.” 수현이 말했다. “시간만 적은 표 말고, 누가 어떤 일을 요청했는지 남아 있는 기록.”
회복소에서 보낸 다음 서류에는 라비엔에게 전달한 문서 묶음 목록과 완성된 장부가 있었다. 일부에는 행정실장의 검수 서명도 있었다. 수현은 항목별로 분리했다. 실제 업무 내용, 수행 기간, 지급 명목, 아직 다툼 있는 금액.
“이걸 라비엔에게 먼저 보내 주세요. 당사자가 사실관계를 맞다고 확인한 다음에 제출해야 합니다.”
오르카는 문득 웃었다. “네가 대신 싸워 주는 게 아니라, 싸울 자리를 정리해 주는 거군.”
“저는 이제 원정대 직원도 아닌걸요. 무엇보다 라비엔이 자기 일을 가장 잘 압니다.”
제7원정대에서는 그날 작은 회의가 열렸다. 젠이 새로 온 견습 궁수를 데리고 야간 경계 근무를 나눴고, 데런은 말 먹이와 인력 대체 비용을 예산에서 따로 표시했다. 카이렌은 회의 마지막에 덧붙였다.
“오늘 라비엔의 일은 우리가 억지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요청한 증빙만 보내겠습니다.”
브레그 감독관이 팔짱을 꼈다.
“원정대가 이렇게까지 부드러워져도 되나?”
오르카는 웃지 않았다. “부드러워져서 살아 있는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면, 저는 그게 더 강한 부대라고 생각합니다.”
감독관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지급 기록 담당자에게 과거 전출 통지 사본을 찾아 보라고 했다.
저녁 무렵 북방에서 추가 회신이 왔다. 라비엔은 현재 계약을 곧바로 종료하기보다, 보수가 지급되지 않은 기간부터 정산하고 이후 업무를 새로 합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복귀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오르카는 종이를 가만히 만졌다.
“잘됐네.”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이제 그녀가 고를 수 있잖아.”
수현은 그 말을 듣고 오래 생각했다. 자신에게도 그런 선택이 필요했다. 이 세계에 남을지 돌아갈지 고민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실제로 존재해야 비로소 선택할 수 있다. 돌아갈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남는 것도 네 선택’이라고 말하는 건 잔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라비엔에게 보낼 회신에 아무 조언도 덧붙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확인한 기록 범위와 추가 질문 목록만 적었다.
문서의 맨 마지막에는 라비엔의 글씨가 있었다. ‘앞으로의 노동은 다시 합의하겠습니다. 지난 노동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수현은 그 문장에 밑줄을 긋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삶에서 힘주어 읽을 대목을 정하는 일도, 그 사람에게 남겨 두고 싶었다.
라비엔의 계약 자료를 살피던 중 오르카는 뜻밖의 항목을 발견했다. 회복소에서는 라비엔의 생활비 일부를 ‘보호 대상 지급’으로 적어 놓았고, 같은 달 기록 협력비에는 ‘자발적 지원’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물품 목록을 보면 그녀는 두 명의 기록원을 대신해 원장을 정리한 뒤, 밤마다 별도 창고의 장부까지 묶었다.
“자발적이라는 말은 왜 이렇게 마음대로 붙이는 거지?”
수현이 물었다. “라비엔이 정말 그 일을 스스로 맡겠다고 했는지 기록이 있어요?”
오르카는 서류를 넘기다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라비엔이 처음 회복소에 도착했을 때 쓴 편지 사본이었다. ‘다리가 낫기 전까지 가능한 범위에서 기록 정리를 돕겠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럼 자원해서 도운 건 맞는 거 아냐?”
“처음에 돕겠다고 말한 건 맞아요. 하지만 그다음부터 매일 얼마나 일하기로 했는지, 일을 중단할 수 있었는지, 대가에 대해 어떤 약속이 있었는지는 따로 봐야죠.”
오르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부상 중일 때 아무도 대신 설 수 없다는 이유로 경계 근무를 계속한 적이 있었다. 동료를 돕겠다는 말이 어느 순간 빠질 수 없는 의무가 된 것이다.
왕도 회복행정 분관의 담당자는 수현 일행에게 별도 열람 시간을 배정했다. 수현은 허가된 범위 안에서 협력 업무의 총 시간을 확인하고, 개인 진료 기록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오르카도 같은 제한에 동의했다.
“라비엔이 몸 상태를 알려 주지 않으면 정산에 불리해지지 않을까요?” 담당자가 물었다.
“의료 정보 중 꼭 필요한 사실이 있다면 본인에게 먼저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야겠죠. 정산한다는 이유로 통째로 열람할 권한이 생기지는 않아요.”
담당자는 메모했다. 오래된 업무 기록에는 부상 기간과 작업 시간이 한 줄에 뒤섞여 있었다. 수현은 그 형식도 고쳐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단, 그녀는 새로운 왕국 규정을 선포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에서 사실관계를 분리해서 검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날 오후 회복소의 서신이 도착했다. 라비엔은 지난달에 자신이 문서 정리 업무를 멈춘 날을 정확히 적어 두었다. 그날 이후 보관실 다른 직원이 남은 작업을 맡았으며, 라비엔에게는 작업 중단으로 인한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오르카는 긴 숨을 내쉬었다. “이건 다행이네.”
“적어도 최근에는 스스로 중단할 수 있다는 기록이 있네요.”
“그 전에 했던 일에 대한 계산은 여전히 남았고.”
“그렇죠. 최근의 좋은 변화가 과거의 문제를 저절로 없애 주지는 않으니까요.”
그날 저녁 오르카는 카이렌과 술집 대신 조용한 식당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라비엔의 소식과 부대 근무표를 함께 이야기했다.
카이렌이 물었다. “언젠가 돌아오면 다시 방패를 들 수 있을까?”
오르카는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돌아올지부터 본인에게 물어야 해.”
“그렇군.”
“그리고 꼭 방패를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야. 라비엔은 기록도 잘하니까.”
카이렌은 웃었다. “우리가 사람을 너무 자기 역할로만 봤나 봐.”
“나는 아직도 그래. 자꾸 옛날 일을 떠올리니까.”
카이렌은 고개를 저었다. “떠올리는 건 괜찮아. 그 기억 때문에 오늘의 라비엔을 대신 정하지만 않으면 되겠지.”
식당 주인은 두 사람에게 작은 수프를 더 내주었다. 원정대가 예전보다 자주 얼굴을 비추고, 급히 먹고 뛰어나가는 일이 줄었다는 말을 했다. 카이렌은 그 말에 멋쩍게 웃었다. 아주 대단한 변화인 것처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평범하게 식사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일상이 달라질 수 있었다.
수현은 같은 시간 왕도에서 회복소 정산 담당자에게 질문 목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라비엔이 반드시 받을 돈’이라는 식의 단정 문장을 지웠다. 대신 ‘약정 대가의 존재, 실제 업무 수령자, 지급 방법, 지급 누락 사유에 대한 판단을 요청한다’라고 썼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계약의 효력을 수현이 멋대로 확정해서는 안 됐다.
그런데 표 마지막에 기묘한 이름이 하나 나왔다. ‘전출시 임시 보존업무 책임자: 에린.’
오르카가 그 이름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또 에린이야?”
수현은 즉시 손을 내저었다. “같은 사람인지 확인되지 않았어요. 이 서류에서는 성도 없고 직책도 달라요. 지금까지 확인한 이름이 여러 문서에 있다고 해서 하나로 묶어선 안 돼요.”
“그래도 누군가 계속 같은 일을 건드리는 것 같잖아.”
“그럴 수도 있고, 흔한 이름일 수도 있어요. 여기서는 라비엔의 정산이 먼저예요.”
오르카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수현의 차분한 말투가 오히려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음 날 회복소에서는 본인 확인이 끝난 업무 기록과 과거 청구 자료를 분리해서 검토하겠다는 회신이 왔다. 정산 금액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회복소 협력 업무를 하면서 발생한 결과물과 라비엔의 보호 치료 기록이 한데 뭉뚱그려지지는 않게 됐다.
수현은 라비엔에게 정산 회신 요약을 보내면서 마지막 질문을 덧붙였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의무 때문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며칠 뒤 답장이 왔다.
‘기록을 정리하는 일은 좋아요. 다만 어느 날 아침에 다리가 아프면 쉬어도 된다고 말해 주는 곳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수현은 그 문장을 읽고 나서야 이 사건의 핵심을 조금 더 이해했다. 라비엔은 방패 기사의 명예를 버리고 기록 일을 택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과 일을 어떻게 다룰지 선택할 기회를 되찾으려는 사람이었다.
라비엔의 정산자료에는 근로를 제공한 날 외에도 쉬었던 날이 있었다. 북방 회복소 담당자는 그 날을 보수 산정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현은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계약상 무엇을 대가로 지급하기로 했는지, 쉬는 날에도 대기 의무가 있었는지 먼저 물었다.
회복소에서는 당시 야간 호출 명단을 찾았다. 라비엔이 쉬었다고 표시된 사흘 중 하루는 밤에 문서 분실 사고 때문에 두 번 호출됐다. 나머지 이틀은 정말 아무 업무가 없었다. 수현은 그 차이를 자료에 그대로 남겼다.
“쉬는 날은 모두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오르카가 말했다.
“실제로 쉬었는지, 언제든 부르면 와야 했는지에 따라 당사자가 겪은 건 다를 수 있죠. 어떤 기준으로 대가를 산정할지는 계약과 이곳 규정에 따라 검토해야겠지만요.”
라비엔은 회신을 보냈다. ‘모든 날을 제게 유리하게 계산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제가 실제로 한 일을 없애지는 말아 주세요.’
오르카는 그 문장을 읽고 오래 웃었다. 라비엔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지 않지만 자기 몫을 잃어버리는 것까지 미덕으로 여기지는 않는 사람. 수현은 이 회신이 본인 확인된 진술로 보존되도록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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