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 요청 수신.’
수현은 제2차단함의 사본에서 그 네 글자를 다섯 번째 읽었다. 분명히 수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수신 다음에 있어야 할 처리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전화 받았다는 기록은 있는데, 전화를 받은 다음에 뭘 했는지는 없다는 거네요.”
루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건 전화 한 대가 아닙니다. 비상 분기 쪽과 종점 장치 쪽은 중단 신호를 받는 회선이 달랐습니다.”
“둘 중 하나가 멈췄어도 다른 하나가 계속 돌아갈 수 있었다는 말인가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실제로 그랬는지는 판독한 원장만으로 알 수 없어요.”
수현은 서류 옆에 새 표를 그렸다. 종점 정지 요청의 수신점, 비상 분기의 차단 경로, 각각의 확인 담당자. 공란이 셋이나 생겼다.
세드나가 제안했다. “남부 수문 기록실에 남은 인계 전표를 찾아보죠. 그때 비상 회선은 운하관리청이 임시로 관리했다고 했습니다.”
수문 기록실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비가 오고 강 수위가 높아진 탓에 직원들이 제방을 오가며 점검하고 있었다. 책임자 리카는 수현 일행을 보자마자 말했다.
“오늘 현장에 들어가시는 건 안 됩니다. 수위가 높아요.”
“들어갈 생각 없어요. 보존된 전표만 보려고 왔습니다.”
“그것도 지금은 담당자가 밖에 있습니다.”
수현은 창밖의 작업자들을 보았다. 물이 장화 위까지 차오르는 제방에서 누군가 쇠막대를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럼 점검이 끝나고 보죠. 저 사람들부터 돌아와야겠네요.”
리카는 뜻밖이라는 듯 바라보다가 의자를 권했다. 기다리는 동안 수현은 제방 관리표를 읽었다. 지난달의 정지 요청 처리 항목 옆에는 ‘현장 확인 완료’라고 적혀 있었지만, 다음 줄의 ‘관련 설비 복귀 확인’은 비어 있었다.
“이런 형태가 오래됐군요.”
“어떤 것 말입니까?”
“정지를 요구한 기록만 남고 실제로 멈췄는지 확인하지 않는 방식이요.”
리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문제 때문에 올해부터 확인을 두 번 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현장은 익숙하지 않지만요.”
수현은 그녀에게 오래된 E-17 기록의 사본을 보여 주었다. 리카는 두 개의 회선 기호를 보자 바로 표정을 바꿨다.
“이건 옛날 방식이에요. 한쪽에서 정지 요청을 받으면 비상 분기 담당에게 종이 전령을 보내야 했죠.”
“전령이 도착했다는 확인은요?”
“그걸 담당하는 별도 서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 홍수 이후 철이 분리되었어요.”
“어디로요?”
리카는 두꺼운 장부를 넘겼다. ‘안전 전령 인계 부속철, 남부 제방 경비동.’
경비동까지는 마차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수문에서는 돌풍이 몰아쳐 입구가 위험했다. 데런은 말을 돌렸다.
“오늘은 안 됩니다. 바람이 너무 강합니다.”
수현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그는 오히려 놀랐다.
“이만큼 찾아놓고 그냥 돌아가요?”
“서류 때문에 다치면 다음 서류를 누가 보겠어요.”
데런은 웃었다. “이제 우리가 먼저 말하게 됐네요.”
다음 날 수위가 내려갔을 때에야 경비동의 오래된 인계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에는 당시 전령의 이름과 전달 시간을 적는 칸이 있었다. E-17 사건 날짜의 줄에는 인계 요청만 있고, 수신인 서명이 없었다.
“보내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수현이 물었다.
“아직 그렇게는 말하지 마세요.” 세드나가 곧바로 답했다. “보냈지만 서명이 누락됐을 수도 있습니다.”
담당 경비가 원본의 뒷면을 비추자 희미한 눌림 자국이 드러났다. 전령이 지참한 확인표에 있던 모양과 비슷했다. 다만 이름 부분은 찢겨 있었다. 수현은 그 조각을 억지로 맞추지 않았다.
“결국 전령을 다시 찾는 일이군요.”
리카는 전령 명단을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수현은 안전 인계 문제가 현재도 반복되지 않도록 확인하고 싶었다. 리카는 이미 새 서식을 운용 중이라고 했다. 그 서식에는 송신 담당자와 수신 담당자 외에도 ‘실제 차단 상태를 확인한 사람’ 칸이 있었다.
“옛날 사고를 조사하다가 요즘 일을 고친다는 게 이상하네요.”
“이상하지 않아요.” 수현이 말했다. “모르는 채 반복하는 것보다 낫죠.”
돌아오는 길 루세는 원장과 전령 인계철을 겹쳐 보았다. 당시 종점 정지 요청은 수신됐지만 비상 분기 쪽으로 전달됐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이 사건의 핵심은 하나의 누락 기록이 아니라, 신호가 두 회선을 건너며 책임자가 바뀌는 구조였다.
수현은 그 사실을 자신에게도 적용했다. 이 세계에 온 사건은 메이가 민원을 썼다는 사실로 시작됐지만, 그것만으로 누가 이동을 승인했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누군가 서식을 만들었고, 다른 누군가 서명을 대신 해석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 기계를 작동시켰을 수 있었다.
“책임을 나눠 가진 사람들이 각자 자신은 일부만 했다고 하면요?” 그녀가 물었다.
세드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 일부가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확인해야겠죠. 모두에게 똑같은 책임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전체 결과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노무사인 자신에게도 익숙한 어려움이었다. 사고는 한 사람의 악의에서만 발생하지 않았다. 아무도 자기 몫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빈칸에서 생기기도 했다.
그날 밤 수현은 제방 쪽에서 가져온 물 묻은 서류를 말렸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오래된 전표였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동의가 어디서 사라졌는지를 찾는 지도였다.
말라 가는 종이 아래에 새로운 이름이 떠올랐다. ‘안전 전령 배달인: 레이든.’ 이름 끝의 도장은 오래된 것이었다.
수현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정지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과 실제로 멈춘 사실 사이에, 어쩌면 아직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레이든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수현은 그가 당연히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방 경비 명부에는 몇 년 전 퇴직하면서 바닷가 마을로 주소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었다. 주소 역시 공개 대상은 아니었다. 세드나는 먼저 해당 기관을 통해 연락 의사를 묻는 서신을 보냈다.
답장은 나흘 뒤 도착했다. 레이든은 왕도로 직접 오지는 못하지만, 서면으로 답변할 수 있다고 했다. 수현은 질문을 다섯 개로 줄였다. 당시 자신이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은 종이의 종류, 전령을 보낸 사람, 수신 예정자, 실제 전달 여부, 그리고 기억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기록이 있는지.
그의 첫 답은 짧았다. ‘정지 요청의 내용은 열람할 권한이 없었다.’
수현은 답장을 읽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전령은 종이를 나르지만 종이 속 결정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중단 요청이 얼마나 긴급한지 판단할 수 있었을까. 정보가 없는 사람에게 책임만 부과한 건 아니었을까.
두 번째 답에는 뜻밖의 사실이 있었다. 그날 경비동이 폭우로 폐쇄되면서 정식 수령자 대신 임시 당직자에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수현은 즉시 세드나와 루세에게 편지를 보여 주었다.
“임시 당직자가 누구였을까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세드나가 말했다. “하지만 누가 지정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서류가 있을 겁니다.”
루세는 답장의 날짜를 종점 운용판에 적힌 시각과 대조했다. 두 기록의 날짜는 일치했지만, 분 단위 시각은 여전히 서로 달랐다. 안전 관측소의 교정값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현은 레이든에게 추가 질문을 한 가지 보냈다. 그날 자신의 안전은 어땠는가. 질문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현은 전령이 위험한 물길을 건넜다면 그 사실이 작동 경로를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레이든의 회신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는 밤새 물에 젖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고 썼다. 몸이 떨려 글씨가 번졌고, 경비동 직원에게 마른 옷을 빌렸다. 그때 전령 확인표의 일부가 젖어 찢어졌다고도 했다. 앞서 발견된 찢긴 수령인 서명이 그 사고와 연결될 수 있었다.
‘고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끝내 누구에게 전달됐는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수현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레이든은 오래전에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위험한 상황에서 종이를 전달하라는 일을 맡았고, 그 뒤에 있는 시스템은 미완성 상태였다.
세드나는 말했다. “이 답변을 감사 기록에 편입하려면 본인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수현은 바로 레이든에게 목적과 공개 범위를 설명한 서신을 보냈다. 목격자가 답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평생 직업 기록을 마구 공개할 수는 없었다.
그날 수문 기록실에서는 새로운 안전 훈련이 있었다. 리카는 옛 사건을 재현하는 대신 현재의 홍수 경고 체계가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했다. 첫 번째 모의 요청이 들어왔을 때 종점 담당자는 수신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현장 차단이 완료되었다는 보고는 늦게 올라왔다.
“봐요.” 리카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종이를 받았다는 것과 밸브가 닫혔다는 건 전혀 다른 일입니다.”
수현은 훈련장 바깥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오래전 자신을 이 세계에 끌고 온 사건도 이와 비슷한 빈칸에서 발생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누가 잘못했는지 미리 정해 놓고 비난하지 않았다. 사람이 실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 절차를 고쳤다.
훈련이 끝난 뒤 리카는 전령 대체표를 보여 주었다. 한 사람이 폭우 속을 혼자 이동하지 않도록 이동 위험 기준이 추가됐다. 수현은 그 표를 보며 레이든에게 편지 한 줄을 더 쓰기로 했다.
‘당시의 위험을 견디셨다는 사실도 조사에서 중요합니다. 가능한 범위에서만 말씀해 주십시오.’
돌아오는 마차에서 루세가 물었다. “아직도 실제 중단이 실패했을 거라 생각하나요?”
“실패했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원인을 아는 것과 사람을 특정하는 건 별개죠.”
“그럼 누가 책임집니까?”
“모르는 부분을 모른다고 적는 사람도 책임을 지는 겁니다. 적어도 다음 조사자가 같은 질문을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되도록요.”
바깥에는 비가 그쳤다. 레이든이 걸었던 물길이 햇빛 아래 반짝였다. 수현은 오래전 한 번의 전달 실패가 사람을 움직인 기계의 원인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실패가 어떻게 기록에서 사라졌는지를 조금 더 알게 됐다.
레이든의 이야기를 기다리던 사이 수현은 제방 경비동의 실제 작업 동선을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높은 담을 따라 작은 초소가 세 개 이어져 있었고, 바람이 강할 때는 두 번째 초소에서 세 번째 초소로 직접 이동하기 어려웠다. 직원은 지금도 비가 오면 종이에 적은 지시를 서로 전달하는 대신 경고 종을 사용한다고 했다.
“종은 누가 쳤는지 확인할 수 있나요?” 수현이 물었다.
“시간과 담당자는 기록합니다. 하지만 소리만으로는 어떤 위험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 말은 오래된 E-17 신호를 떠올리게 했다. 정지 요청을 받았다는 표식과 실제로 멈추라는 뜻을 이해했는지는 별개였을 수 있다. 수현은 경고 종과 작동 신호가 어느 부서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됐는지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리카는 현재 사용하는 위험 구분표를 가져왔다. 수문 폐쇄, 경보만 전송, 현장 대피의 세 종류가 표시돼 있었다. 그런데 옛 구분표는 두 종류밖에 없었다. ‘긴급’과 ‘통상’. 그 사이에 수많은 판단이 사람에게 떠넘겨져 있었다.
수현은 레이든에게서 받은 답장을 읽고 종이의 뒷면을 다시 보았다. 눌린 글씨는 원본의 완전한 흔적이 아니었다. 전달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싶은 마음과 아무런 수령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섞어서는 안 됐다. 보고서에는 두 가능성을 나란히 남겼다.
“그러면 옛날 당직자는 급하다는 말만 들은 채 무엇을 멈출지 몰랐겠군요.”
“맞아요. 지금은 구분을 늘렸습니다.”
수현은 그 사실을 보고서에 적어 두었다. 사건 당일의 E-17 신호도 현행 표로 번역하면 의미가 달라질 수 있었다. 과거의 말을 현재의 규정으로 읽어 범인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됐다.
훈련을 마친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젖은 기록지를 말리는 일을 평소 혼자 맡는다고 했다. 리카는 오늘부터 그 일을 교대하기로 했다. 기록이 젖으면 누구 책임인지 따지는 데 익숙하던 조직이, 이제 종이가 젖지 않게 작업을 나누는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수현은 자기 수첩을 펼쳤다. ‘종점 중단 요청 수신’은 확인. ‘비상 회선 전달’은 미확인. ‘실제 차단’도 미확인. 그 세 줄은 오래전 사고를 곧장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가 다음에 같은 사고를 겪을 가능성을 줄여 주는 세 줄이기도 했다.
제13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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