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반 측량소로 가는 마차는 왕도를 벗어나자마자 돌부리에 두 번 걸렸다.
세 번째 덜컹거림에 수현은 무릎에 놓은 서류철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이 나라의 길은 유독 서류를 싫어하나 봐요.”
데런이 고삐를 잡은 채 웃었다. “마차가 좋은 종이를 알아보나 보죠.”
“당신은 원정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오늘은 제 휴무입니다. 개인적으로 친구를 태워 주기로 했습니다. 마차 사용료와 말 먹이는 돈은 이미 따로 적어 두었고요.”
수현은 눈썹을 올렸다. “이거 제가 가르친 거죠?”
“아니요. 제가 배운 겁니다.”
말뜻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들은 순간 수현은 더 묻지 않았다. 데런의 표정에는 누군가에게 지시받아 하는 사람의 피곤함이 없었다. 자기 시간을 쓰기로 선택한 사람의 느긋함이 있었다.
측량소는 절벽을 뚫어 만든 낮은 돌 건물이었다. 벽마다 지도와 높이 표식이 붙어 있었고, 입구에는 ‘장치 경로와 실제 지형을 혼동하지 말 것’이라는 주의문이 걸려 있었다. 수현은 그 글을 읽고 루세를 바라봤다.
“설마 그런 사고가 있었어요?”
“마력 회선이 산맥을 똑바로 지나간다고 지도에 그려 놓고, 사람이 그 길을 따라 걷다 절벽을 만난 일이 있었답니다.”
“용사 파티보다 행정사고가 더 무섭네요.”
측량소 책임자 하멜은 한쪽 눈에 돋보기를 걸친 나이 많은 여성이었다. 세드나가 허가서를 내밀자 하멜은 첫 줄보다 마지막 줄을 먼저 살폈다.
“원본 열람은 가능하지만, 복제본을 외부로 가지고 나가는 건 안 됩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만지면 안 됩니다. 잉크가 흘러요.”
“그것도 좋습니다.”
“왜 이렇게 순순히 동의하시죠?”
수현은 잠시 웃었다. “사람한테도 동의를 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요. 그림이라고 예외는 아니죠.”
하멜은 웃지 않았지만 잠긴 캐비닛의 열쇠를 꺼냈다.
오래된 대응표는 커다란 양피지였다. 경로를 나타내는 선들이 네 가지 색으로 그려져 있었고, 색마다 서로 다른 시대의 판본이 덧칠되어 있었다. 수현은 E-17의 번호와 일치하는 숫자를 찾았다. 셋이 있었다.
“셋이요?”
“보시다시피 이 번호는 재사용됐습니다.” 하멜이 지팡이 끝으로 선을 짚었다. “첫 번째는 북쪽 관측소. 두 번째는 남서부 검증 구역. 세 번째는—”
하멜은 말을 멈췄다. 세 번째 선은 종이 가장자리에서 갑자기 끊어져 있었다.
“삭제된 건가요?”
“잘린 겁니다. 홍수 때 손상돼서 원판의 끝부분을 다른 곳에 보존했다고 적혀 있군요.”
세드나는 곧바로 ‘손상’과 ‘고의 제거’를 구분해 메모했다. 루세는 잉크의 두께를 비교했다.
“시기별 숫자는 같아도 시작점 표식이 서로 다릅니다. 사건 당일 판본을 적용하면 세 번째 후보와 가장 가깝지만, 판의 끝이 없어 종점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어디로 끌려왔는지도 아직 모르는 거네요.”
“현재 자료로는 그렇습니다.”
수현은 실망을 삼켰다. 기대가 무너질 때마다 스스로 미련해 보였다. 하지만 자기가 걸어 들어온 것도 아닌 세계에서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으려는 기대가 어째서 미련한 일이어야 하나.
그때 데런이 밖에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낡은 안내판이 들려 있었다.
“입구 뒤편에 버려져 있던 건데요. 여기에도 같은 번호가 있습니다.”
하멜의 눈이 커졌다. “그 판을 어디서 찾았죠?”
“폐창고 문 옆에서요. 꺼내도 되는지 경비에게 물었습니다.”
하멜은 안내판을 받고 한참 들여다봤다. 뒤쪽에는 오래된 수선 흔적과 짧은 문구가 남아 있었다. ‘원점 표식 판독은 별도 봉인된 교정판으로 한다.’
“원점?” 수현이 되물었다.
“보낸 쪽을 확인하는 표식입니다.” 하멜이 설명했다. “보통은 수신점과 다른 문서에 두었죠. 누군가 수신 기록만 고쳐도 원점까지 고칠 수 없도록요.”
수현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럼 원점 교정판이 있으면 제가 온 곳을 알 수도 있는 거예요?”
“장치가 기록한 출발 경계의 종류는 알 수 있을지 모릅니다. 도시나 집 주소가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았다. 최근 몇 달 동안 그녀를 가장 지치게 했던 것은 몰랐던 사실이 아니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는 상태였다.
교정판이 보관된 곳은 측량소의 오래된 별관이었다. 그러나 문은 잠겨 있었고 열쇠의 관리 기록에는 ‘관리 책임 미지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멜은 절대로 문을 억지로 열지 않겠다고 했다. 수현도 찬성했다.
“관리 책임이 없는 문을 함부로 열었다가 원본이 손상되면 모든 증거가 날아가겠죠.”
“그런데 누가 책임자를 지정합니까?”
“왕도 보존위원회입니다. 지금 신청하면 빠르면 나흘입니다.”
“나흘이나요?” 데런이 놀랐다.
“대신 그 나흘 동안 현장을 지키는 사람도 배정할 겁니다.”
수현은 방금 불평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어떤 나흘은 낭비였지만 어떤 나흘은 기록을 지키는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날 측량소에서는 한 가지 작은 소동이 있었다. 오래된 지도 아래 깔린 나무 받침 하나가 부러져 지도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하멜은 수현 일행을 모두 뒤로 물렸다. 데런이 당장 받침을 고치려 하자 그녀가 막았다.
“그건 지금 손대는 사람이 아니라, 기록 관리자가 확인해야 합니다.”
“받침 하나 고치는 데도 허가가 필요합니까?”
“지도를 손상하면 원래 모양을 복원할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멜은 대신 보존 천을 덮고 시설 담당자를 불렀다. 수현은 그렇게 작은 물건을 다루는 태도가 조금 부러웠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몸은 저 지도만큼 조심스럽게 다뤄졌을까.
시설 담당자는 손에 굳은살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는 혼자 받침을 들어 올리려 했다. 데런이 다가갔다.
“두 명이 들어야 하는 무게 같은데요.”
“보조 인력은 오늘 다른 건물로 갔습니다.”
“그럼 조금 늦추면 안 되나요?”
“관장님이 빨리 하라고…”
하멜이 곧바로 말했다. “내가 빨리하라고 한 건 지도 손상을 막으라는 뜻이지, 혼자 들라는 뜻은 아니에요.”
수현은 그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지시가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급히 처리하라’는 말이 ‘안전 절차는 생략해도 된다’로 번역되는 순간이 있다.
하멜은 시설 담당자의 작업을 중단시키고 다른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데런은 목재를 살펴보다가 그 청년에게 물었다.
“이 일을 자주 혼자 해요?”
“보통은요. 그리고 끝나면 근무표에 쉬었다고 적혀 있어요.”
“쉬었는데 왜 계속 옮기고 있어요?”
“지도 보존 중에는 쉬는 시간으로 처리하는 모양이에요.”
수현이 웃음을 잃었다. 예전의 제7원정대와 다르지 않았다. 업무가 잠시 줄었다는 이유로 사람의 휴식을 사용한 것으로 계산하는 방식.
“그건 기록에서 실제 일과 쉬었던 때를 분리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제가 직원도 아니고 왕국의 판정권도 없으니 대신 고칠 수는 없지만, 당사자가 원하면 질문 목록은 같이 만들어 드릴게요.”
청년은 망설이다가 자신의 근무표를 가져왔다. 하멜도 함께 앉았다. 그들은 점심시간을 쉼으로 기록한 날 중 실제로 지도 이동을 했던 날짜를 체크했다. 하멜은 앞으로 보존 대기와 실제 휴게를 구분하겠다고 약속했다. 업무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이 쉬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면 일손이 더 필요한데요.” 청년이 말했다.
“필요한 일손이 얼마나 부족한지 그래야 알 수 있겠죠.” 하멜이 대꾸했다.
수현은 말을 보태지 않았다. 결정은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했다. 그녀가 사라져도 유지될 변화를 원한다면, 기록도 권한도 그 사람들의 손에 있어야 했다.
그때 루세가 지도 끝에서 이상한 표시를 발견했다. 색이 다른 선 두 개가 교차하는 부분에 ‘교정 전’과 ‘교정 후’라는 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돋보기를 들고 다가갔다.
“하멜 선생님, 이 표시는 누가 적었습니까?”
“옛날 교정반 직원들이요. 원래는 원판과 수정판을 비교하는 표시였죠.”
“두 선이 서로 겹치지 않네요.”
“그래서 새 판본을 만든 겁니다. 지형이 움직인 게 아니라 회선을 부르는 이름이 바뀌었어요.”
수현은 지도를 내려다봤다. 길은 그대로인데 이름표만 바뀌었고, 그 이름표를 믿고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서울에서 처리했던 회사의 인사 이동 사건이 떠올랐다. 사무실 위치를 바꾸지 않고 부서 이름만 변경해 놓고, 직원이 업무를 바꾸는 데 동의했다고 주장하던 사례.
“여기도 이름이 바뀌었다는 걸 모든 부서에 알렸나요?”
하멜은 씁쓸하게 웃었다. “보냈다는 장부는 있답니다. 받았다는 장부는 보지 못했지만.”
수현은 종점 판본이 다르다는 문제 외에 새 질문을 적었다. 변경 통지서를 실제 받은 기관은 어디인가. 수신 확인이 없다면 누가 구형 번호를 계속 사용했는가. 그리고 구형 번호로 만든 집행 후보가 실제 작동 장치에 넘어갈 때 어떤 확인 절차가 있었는가.
데런은 하멜에게 말했다. “지도 하나가 이렇게 많은 걸 품고 있군요.”
“우리는 오래된 돌의 높이도 지웁지 않습니다. 한 번 지우면 그때 누가 무슨 지형을 봤는지 알 수 없게 되니까요.”
수현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 있던 자신의 사무실에서도 오래된 기록을 폐기하기 전 법적 보존 기간을 따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낡은 수치 하나가 자신의 의사와 목숨을 둘러싼 진실을 결정할 수도 있었다.
시설 담당 청년이 고친 받침을 들고 돌아왔다. 옆에는 다른 직원이 함께였다. 두 사람은 하멜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지도 아래로 받침을 밀어 넣었다. 지도는 수평을 되찾았다. 하멜은 그 자리에서 작업이 끝난 뒤 청년의 남은 휴게 시간을 다시 적었다.
수현은 그것까지 메모하지 않았다.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그들의 기록으로 남겨 두는 편이 좋았다.
별관 앞에서 그들은 말 먹이를 나누었다. 루세는 마른 빵을 씹으며 이상한 질문을 했다.
“만약 기록이 정말로 다른 세계 경계를 가리킨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수현은 물병 뚜껑을 닫았다.
“그다음은 서울이라는 걸 확인해야겠죠.”
“서울이라면?”
“안전한 방법이 있는지 확인해야죠.”
“그게 가능하다면요?”
“그때는 내가 정말 갈 수 있는지, 가면 이곳 사람들에게 어떤 통지가 필요한지 생각해야겠고요.”
루세가 웃었다. “순서가 참 많네요.”
“저도 싫어요. 하지만 제 목숨은 시험장 소모품이 아니잖아요.”
하멜이 듣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오래전에 그 말을 했어야 할 사람이 있었죠.”
수현이 돌아봤지만 하멜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근무표를 펼쳐 별관 관리 공백이 시작된 날짜를 보여 주었다. 기록된 이유는 인원 감축이었다. 기술 사고의 흔적을 찾으러 왔다가 또다시 사라진 사람의 자리를 발견한 셈이었다.
왕도로 돌아오는 길에 데런은 마차의 속도를 늦췄다. 해가 지기 전 도착하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지만 말의 호흡이 거칠어졌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일몰 전에 도착하면 되잖아요.”
“사람이 아니라 말도 휴식이 필요하죠.”
수현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라면 카이렌도 데런도 목적지를 위해 몸부터 몰아붙였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느리게 가도 된다는 걸 배우고 있었다.
별관 열람 신청서에는 세 가지 항목이 적혔다. 보존 책임자 지정. 원점 교정판의 손상 여부 점검. 사건 당일 운용판과의 비파괴 대조.
수현은 마지막 칸에 스스로 문장을 덧붙였다.
‘원점이 특정되어도 사람의 이동 시험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돌아가기 전 수현은 하멜에게 별관 열람 기록이 누구의 손에서 보존될지도 물었다. 책임자를 지정하는 건 문을 여는 권한만이 아니라, 다음에 열람할 사람에게 오늘의 질문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하멜은 접수 번호를 따로 알려 주었다. 수현은 사본과 원본 보관 장소를 분리해서 적고, 이관될 때 통지를 받을 수 있는지도 확인했다.
도장이 찍히기 직전, 하멜에게서 쪽지가 도착했다. ‘별관의 잠금장치는 오래된 수리 기록상 이중 잠금이다. 그중 하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개인 인장으로 등록되어 있다.’
수현은 쪽지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또 사람이군.”
사라진 길을 찾을 때마다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은 숫자나 기계가 아니라, 어떤 결정을 내렸고 어떤 권리를 가졌던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마차가 왕도 북문을 지날 때 데런은 말에게 마지막 물을 먹였다. 수현은 오늘 하루 확인한 자료의 출처를 다시 적었다. 대응표 원판은 측량소, 손상된 가장자리의 복원 자료는 별관, 개인 인장의 등록 기록은 보존위원회. 어느 하나를 없애면 같은 숫자가 다른 길을 가리키게 된다. 그녀는 수첩을 덮고 말했다. “내일은 서두르기보다 이 세 장부터 정확히 맞춰 볼게요.” 데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쉬어야 할 시간이었다.
제13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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