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중앙기술관리청의 복도에는 문이 세 개 있었다. 왼쪽에는 장치 관리실, 오른쪽에는 운용 기록실, 정면에는 ‘분기·종점 대응표 보존실’이라는 긴 이름의 문이 있었다.
이수현은 정면 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다행이네요.”
세드나가 물었다. “무엇이요?”
“적어도 오늘은 찾아갈 부서가 이름을 써 놨잖아요.”
“이름이 있다고 일을 해 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너무 현실적인 답변은 사양할게요.”
제2차단함에서 읽어 낸 E-17의 비상 분기 번호는 그들에게 처음으로 확실한 숫자 하나를 주었다. 수현은 그 숫자를 적은 종이를 세 번 접어 품에 넣었다. 세 번 접는다고 비밀이 더 안전해지지는 않겠지만, 그 종이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불편했다.
보존실 접수 창구의 직원은 젊은 남자였다. 그의 명찰에는 도이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수현이 사건 접수 번호와 비상 분기 번호를 제시하자 도이안은 서류를 한 줄씩 읽었다.
“분기 번호는 주소가 아닙니다.”
수현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 말을 들으려고 마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이나 왔단 말인가.
“그럼 무엇인가요?”
“장치가 정상 종점으로 갈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경로 묶음의 번호입니다. 같은 번호를 여러 날 사용할 수 있어요. 어디로 갔는지 보려면 날짜, 운용판 판본, 시작점의 고유 표식을 대조해야 합니다.”
“그 셋을 한꺼번에 보관하나요?”
도이안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보관 규정은 그렇습니다.”
“실제론 다르군요.”
“전쟁 기간에 분산 이관됐습니다.”
수현은 책상 위의 지도부터 살폈다. 각 왕립기관의 보존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줄은 실선, 어떤 줄은 점선이었다. 점선을 따라 눈을 옮기자 오래전 폐쇄된 남문 종점 운용실이 나왔다.
루세가 서류의 모서리를 가리켰다.
“그때 쓴 차단판은 세대가 달랐을 겁니다. 판본을 틀리게 적용하면 분기 번호가 완전히 다른 구역을 가리킵니다.”
“숫자 하나가 있으면 절반은 해결될 줄 알았는데.”
“숫자 하나는 출발점이지, 결론이 아닙니다.”
수현은 도이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우리가 합법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출발점은 어디까지인가요?”
직원은 분기 원장 열람 신청서를 내밀었다. 신청서는 세 장이었다. 첫 장은 사건 관련성, 두 번째는 열람 범위, 세 번째는 개인정보가 포함되었을 때의 처리 방식. 수현은 한숨 대신 펜을 들었다. 쓰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 포기시키는 방식이라면 이미 한국에서 충분히 경험해 봤다.
“전부 공개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사건 당일 분기 경로의 판본과 고유 표식 유무만 확인하겠습니다. 실제 수신 대상이 사람이라면 식별 정보는 가려도 됩니다.”
세드나가 바로 덧붙였다. “당사자 동의 없는 타인의 의료·주거 자료는 요청 범위에서 제외합니다.”
도이안은 처음으로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쓰시면 검토가 빠를 겁니다.”
오후에 받은 열람 허가는 고작 원장 두 쪽이었다. 하지만 수현은 그 두 쪽을 보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건 당일의 분기 번호 아래에는 운용판 판본이 적혀 있었고, 그 판본 옆에는 작게 ‘동시 운용 표식 없음’이라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
“없는 건가요?”
“정확히는 원장에 기재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루세는 종이를 빛에 비췄다. “이 판본에서는 고유 표식을 종점에서 찍었습니다. 정상 종점 응답이 없으면 표식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럼 물리적으로 아무 데도 연결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비상 분기가 작동했는데 기록이 남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수현은 메모를 둘로 나눴다. 확인된 사실. 아직 설명이 필요한 사실. 종이 가운데 선을 그을 때마다 마음이 덜 흔들렸다.
확인된 것은 E-17이 종점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비상 분기 후보로 처리됐다는 점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것은 그 후보가 실제 신호를 전송했는지, 사람을 이동시켰는지, 어느 쪽으로 연결됐는지였다.
복도 끝 창문으로 늦은 햇빛이 비쳤다. 수현은 자신이 서울에서 이 세계로 끌려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일을 일으킨 기계가 바로 눈앞 서류의 기계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 차이는 답답할 정도로 중요했다.
점심 무렵 도이안은 바쁘다는 핑계로 식사를 거르려 했다. 옆 창구 직원이 보존 상자를 옮기느라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신청서를 정리하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교대자는 없어요?”
“오늘 한 사람이 병가입니다.”
“병가를 냈는데 그 사람 몫까지 남은 사람이 모두 하는군요.”
“여기는 그런 날이 많습니다.”
수현이 잠깐 망설였다. 자신은 이제 제7원정대의 유급 자문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사람의 끼니를 모른 척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민원 하나 더 낸다고 일이 나아지지는 않겠죠. 그렇지만 제 서류 처리 시간 때문에 식사를 못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오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도이안이 놀라 손을 내저었다. “보통은 빨리 처리해 달라고 화부터 내시는데요.”
“오래 기다리는 일이 좋은 건 아닙니다. 다만 굶는 사람이 서류를 빨리 처리한다고 좋은 기록이 나오진 않더라고요.”
밖으로 나오자 루세가 웃었다.
“노무사라는 직업은 마법보다 범위가 넓군요.”
“아니에요. 마법은 적어도 벽에 구멍이라도 뚫잖아요. 저는 점심 드시라고 말한 것뿐인데요.”
세드나는 물끄러미 수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도이안은 내일 동료에게 그 말을 전할 겁니다.”
분기 대응표를 기다리는 동안 수현은 복도 의자에 앉아 도이안의 안내문을 다시 읽었다. ‘회신은 담당 부서 업무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그 문장이 이상하게 걸렸다. 업무시간이 아닌 동안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갈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먼지 묻은 장화를 신은 농부, 작은 아이와 함께 기다리는 여성, 군복을 입은 젊은 병사. 저마다 자기만의 사정 때문에 이곳에 와 있었다.
농부가 종이를 거꾸로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수현이 다가갔다.
“도와드릴까요?”
“땅 경계 확인을 하라고 하는데 글자가 너무 많네요.”
수현은 선뜻 종이를 받아 들지 않았다. “어떤 부분이 궁금하세요? 읽어 드릴 수는 있지만 서명은 직접 하셔야 해요.”
농부는 흙이 밴 손으로 가운데 줄을 짚었다. ‘대상 경계 조정에 이의 없음.’ 수현은 그 문장부터 읽었다. 농부의 얼굴이 달라졌다.
“이의가 없다니요? 저쪽 이웃이 우리 논까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해서 온 건데.”
“그럼 이 서류는 맞지 않을 수 있어요. 조정에 동의하는 서식이니까요.”
“다른 서식도 있나요?”
“직원에게 물어보죠. 저는 이곳 규정을 전부 알지는 못합니다.”
도이안의 동료가 자리를 비웠던 이유로 밀려 있던 민원이 그때 한꺼번에 쏟아졌다. 수현은 잠시 통로 정리에만 손을 보탰다. 직원에게 농부의 의문을 전달하자 직원은 다른 이의 신청서를 내주었다. 농부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감사할 일 아니에요. 반대하는 사람에게 동의서를 내민 게 이상했던 거죠.”
그 말이 끝나자 수현은 자기가 지금 조사하는 E-17 기록을 떠올렸다. ‘접수’가 ‘동의’로 바뀌었던 사건과, 이 농부가 서명할 뻔한 종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규모와 피해는 달랐지만 구조는 닮아 있었다. 글자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설명을 듣지 못한 사람의 침묵이, 어느 순간 결정으로 기록되는 구조.
점심 뒤 보존실로 돌아왔을 때 도이안은 그 농부의 민원 때문에 새 안내문을 쓰고 있었다. 그는 표제 아래 두 줄을 덧붙였다. ‘경계 확인은 동의가 아닙니다. 서명 전 문서 종류를 확인하십시오.’ 수현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거 담당자에게 혼나는 거 아니에요?”
“혼나면 설명해야죠. 민원인을 위한 안내문을 고치는 게 왜 문제인지요.”
“용감하시네요.”
“아뇨. 그냥 아까 그분 표정을 봤습니다.”
도이안의 말은 담담했다. 수현은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했다. 여기에 와서 깨달은 것은 고의로 속이는 사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제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다치게 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한 사람이 서식 한 줄을 고칠 권한과 시간이 있는 환경이었다.
루세는 창구의 구형 벽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시계가 아직도 느리게 가네요.”
“어떻게 알아요?”
“진동수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기술청 회의 때도 저런 모델 때문에 기록이 한 번 꼬였죠.”
수현은 벽시계를 다시 보았다. 이 세계에서 시계조차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사건 당일 표식에 적힌 시각도 실제 사건의 순서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제야 피부로 와닿았다.
“원장에 적힌 날짜까지 틀렸을 수도 있나요?”
“날짜는 다른 자료와 대조해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분 단위 순서죠. 종점에서 기록한 시간과 비상 차단판의 시간이 서로 다른 기준이라면, 나중에 찍힌 도장이 먼저 있었던 행동을 뜻할 수도 있어요.”
수현은 서류 옆에 작은 별표를 쳤다. ‘시간값: 같은 기준인지 확인할 것.’
한참 뒤 도이안은 분기 번호의 통합 색인 카드 한 장을 추가로 가져왔다. 카드 뒷면에는 폐기 예정이라는 붉은 글씨가 있었다. 수현의 얼굴이 굳었다.
“폐기하면 이 사건 기록이 사라지는 건가요?”
“아닙니다. 원본은 따로 있고 이건 검색용 카드예요.”
“그럼 원본이 무엇인지 지정해 주실 수 있나요?”
도이안은 카드의 출처 항목을 읽었다. 왕도 기록원, 남문 운용실, 암반 측량소. 셋이 적혀 있었다. 수현은 그 세 곳을 적으면서 왜 기록이 끊임없이 늘어나는지 깨달았다.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종이로만 이해하려는 순간 틀릴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 사건은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은 여러 조각의 기록 속에 흩어져 있었다.
“수현 씨, 이 카드의 복사본은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제가 받을 권한이 있나요?”
“개인 식별 부분이 없어서 가능합니다.”
“그럼 제가 받은 날짜와 담당자 이름도 적어 주세요. 나중에 보존한 분에게 괜한 의심이 돌아가지 않게요.”
도이안이 그 말을 듣고 잠시 손을 멈췄다. 그는 정리된 문서 뒤에 자신의 이름을 작게 썼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책임만 떠넘길까 봐 숨는 대신,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듯했다.
오후에 다시 찾은 보존실에서는 작은 진전이 있었다. 도이안이 분산 원장 대조 목록을 준비해 둔 것이다. 남문 종점 운용실의 판본 원장과 비상 경로의 대응표가 같은 상자에 있지 않았다. 대응표는 홍수 피해 이후 서쪽 암반 측량소로 이관됐다는 표식이 있었다.
“암반 측량소요?”
“장치 전선을 지형 경계와 맞춰 그리던 곳입니다. 지금은 일부만 운영합니다.”
“거기에 서울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지는 않겠죠?”
도이안은 농담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서울이 어느 구역입니까?”
“아주 먼 구역이에요.”
“그렇다면 이 지도만으로는 못 찾습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수현은 웃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잃어버린 집을 찾는 일은 이렇게 막막했다. 지도에서 시작했는데, 지도 바깥의 집을 찾아야 했다.
그날 저녁 제7원정대로부터 전령이 도착했다. 카이렌의 짧은 편지였다. ‘오늘은 제가 쉬는 날이었습니다. 젠과 데런이 야간 출고를 처리했고, 특별한 사고 없이 끝났습니다. 메이가 식사도 두 번 했습니다.’
수현은 마지막 문장에서 웃었다. 메이의 식사 횟수가 원정대 성과 보고에 들어가다니. 그러나 글씨는 놀랍도록 단정했다. 자기 한 사람 없으면 모든 일이 멈출 거라 믿던 용사가, 이제는 동료들이 자기 없이 해낸 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편지 아래에는 다른 손으로 적은 문장이 있었다. ‘우리에게 자문비를 다시 청구하지 마세요. 쉬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겁니다. 대신 당신도 밥 드세요. —메이.’
수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얻은 것은 보수도 자격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도 쉬어야 한다고 말해 주는 관계였다.
세드나가 물었다. “내일도 암반 측량소로 갈 생각인가요?”
“가야죠. 다만 지금은 밥부터 먹을게요.”
루세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바로 안전 계획의 첫째 항목입니다.”
수현은 편지를 접고 한쪽에 적었다. 내일 확인할 세 가지. 분기 대응표 원본, 판본별 경로 차이, 경로 사용 사실과 후보 등록의 구분.
네 번째를 쓸까 말까 하다가 끝내 적었다.
‘내가 돌아가더라도 이 사람들이 자기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
종점까지 가는 지도는 없었다. 대신 그 지도를 함께 읽어 줄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한 위안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권리와 맞바꿀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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