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단함의 표면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이수현은 단단한 철제 상자를 한참 바라봤다. 누군가 비밀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자는 네 모서리만 둥글게 깎여 있었고, 위쪽에는 ‘안전 차단 후 개봉’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손잡이는 어디 있습니까?”
“수리하려고 만든 물건이 아닙니다.”
중앙 기술관리청의 보존 책임자 칼든이 말했다.
“분쟁이 나면 최종 작동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장치지요. 임의로 열지 못하게 바깥 부속은 없앴습니다.”
“그럼 누가 열죠?”
“두 명의 보존인과 독립 안전 확인자가 입회합니다. 원본은 그대로 두고 기록판만 비파괴 판독하는 방식입니다.”
수현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무언가를 밝히겠다며 장치를 켰다가 또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녀는 오늘 입회 신청서 옆에 별도의 문구를 적었다. 자신이 출석했다고 해서 실험에 동의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칼든이 그 문장을 읽었다.
“좋습니다. 그 부분은 분명하게 하죠.”
세드나가 낡은 모서리를 바라봤다.
“E-17 번호가 실제로 이 안에 있는지도 확인 전이군요.”
“네. 같은 계열의 운용판 여러 개가 여기 있습니다. 고유 봉인번호로 대조해야 합니다.”
루세는 도구 상자를 내려놓고 장갑을 꼈다. 그가 준비한 것은 거대한 마법석이 아니라 아주 작은 반사판과 거울이었다. 수현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여기서 가장 강한 장치는 저 거울이에요?”
“더 강한 힘을 쓰지 않으려고 가져왔습니다.”
“좋아요. 오늘의 마법은 절전형이네요.”
루세가 웃었다.
***
봉인번호를 대조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느렸다. 수현은 조급한 마음에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가 멈췄다. 자신에게는 오늘이 집으로 가는 첫날이 될지도 모르는 날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위험한 물건을 다루는 근무일이었다.
마침내 칼든이 번호를 읽었다. 노아가 봉인 견본에 그린 두 개의 구멍과 일치했다. 봉인판의 제작 연도도 맞았다. 다만 중간에 다른 수리소를 거친 기록이 있어 처음 봉인 이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같은 계열이라는 것까지 확인되었군요.”
수현이 말했다.
“운용판의 기록이 E-17과 연결되는지는 다음입니다.”
루세가 반사판을 기울였다. 철판 안쪽의 미세한 자국이 벽의 하얀 종이에 그림자로 나타났다. 하나는 준비, 하나는 안전 정지, 하나는 종점 응답. 그 뒤로 짧은 행이 더 있었다.
‘후보 접속 요청 수신.’
‘종점 응답 미수신.’
‘비상 분기 경유.’
수현은 세 번째 문장에서 숨을 멈췄다.
“비상 분기라는 게 뭔가요?”
“정상 종점이 응답하지 못할 때 호출 요청을 다른 경로로 보내는 구형 절차입니다. 여기에는 실제 대상 이동 여부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어디로 보냈는지는 알 수 있나요?”
“경로 목록과 대조해야 합니다.”
칼든은 별도 원장에 봉인번호와 분기표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 원장은 왕도 기술관리청이 아니라 오래된 소환 행정 서고에 있었다. 수현은 또 다른 곳이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번에는 참았다. 분리 보존 덕분에 지금까지 남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
잠시 뒤 루세가 두 번째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가장 얇은 판에 숨겨진 문구였다.
‘본인 확인: 없음.’
‘중단 요청: 수신.’
‘비상 분기 요청: 전달.’
세드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현은 문구를 하나씩 종이에 옮겨 적었다. 후보 이관표에서 본 의사 미수신과 이 기록의 본인 확인 없음은 같은 의미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법적 판단을 위해서는 실제로 무엇을 확인하려 했는지 명확해야 했다.
“본인 확인은 이름만 대조한다는 뜻일 수도 있나요?”
“구형 절차에서는 신원과 동의 확인 단계가 별도로 존재했습니다. 이 판의 본인 확인은 신원 검증 결과를 말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의 여부는 또 다른 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기록만으로 동의 부재를 다시 증명하는 건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다만 아무 확인 없이 비상 분기로 넘어간 정황을 보여 줍니다.”
수현은 가슴이 먹먹했다. 기술 기록은 그녀를 집으로 보내 주지 못했지만, 강제로 데려온 절차의 빈칸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곳 사람들에게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면서도 매번 같은 대답을 들었다. 사건은 이해하지만 기술적 실행은 모른다고. 이제 그 모름에 모양이 생기고 있었다.
“안전 정지 요청이 수신된 뒤에도 분기가 전달됐다는 의미인가요?”
루세가 고개를 저었다.
“둘의 정확한 선후는 아직 교정 원장과 대조해야 합니다. 하지만 같은 운용 사건에 두 상태가 병존한 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좋아요. 그 사실대로 써 주세요.”
수현은 한 번 더 말했다.
“저에게는 아주 중요하거든요.”
***
그날 오후에는 예상치 못한 사람이 찾아왔다. 행정분관의 이디스였다. 그녀는 공동 심사회의의 임시 결정을 가지고 있었다. 기술관리청 자료에서 당사자 확인 없이 비상 분기가 전달됐을 가능성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자, 행정분관은 별도의 시정 절차를 열기로 한 것이다.
“귀하의 사건을 단순한 ‘신원 확인 자료 미비’에서 ‘동의 없는 집행 가능성이 확인된 분기 처리 사건’으로 분류합니다.”
“그럼 누가 실행했는지 밝혀진 건가요?”
“아닙니다. 실행자와 실제 기술 작동의 인과관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집으로 갈 수 있나요?”
“그 역시 아닙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답을 듣고도 실망만 하지는 않았다. 공식 기관이 이제 사건을 단순한 오해라고 처리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연구비를 포함한 지원 검토가 시작됐다. 지원은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위험 시험을 조건으로 붙일 수 없다는 문구도 들어 있었다.
“이 결정에 제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나요?”
“비밀 자료를 유출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의무는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나 실험에 참여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수현은 그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오래전에 자신이 처음 이 세계로 왔을 때 누군가 그녀에게 묻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
저녁 무렵 세드나와 루세, 칼든은 분기표의 보존 목록을 다시 살폈다. 수현은 식사를 먼저 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루세가 놀라서 돌아봤다.
“지금 가시겠다고요?”
“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중요한 기록이 나올 수도 있는데요.”
“그래서 돌아와서 보려고요. 배고픈 뇌가 좋은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루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식당에서 따뜻한 수프와 딱딱한 빵을 먹었다. 빵이 너무 딱딱해서 아픈 턱을 문지르며 먹어야 했다. 아무리 신기한 세계에서도 식당 빵의 퍽퍽함만은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돌아오니 책상 위에 새 보존 목록이 펼쳐져 있었다. 세드나가 그녀를 불렀다.
“비상 분기의 종점 번호가 남아 있어요.”
“어디로 향하죠?”
“지금 사용하는 등록망 밖입니다. 그래서 옛 문서에서 외부 계열로 분류했나 봅니다.”
“그게 다른 세계라는 뜻은 아니죠?”
“네. 여전히 등록망 밖의 경로라는 뜻입니다.”
루세가 종이에 작은 기호를 그렸다. 출발점, 중간 경유지, 그리고 종점. 마지막 원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차이가 있어요. 이전에 찾은 문자열이 아니라, 장치가 기록한 분기 번호 자체입니다. 요청서에서 베낀 값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남은 운용판의 값이거든요.”
수현은 그려진 선을 오래 바라봤다. 그 선이 서울로 향한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그 선이 실제로 사용된 후보 경로를 가리킨다는 점은 이전보다 강한 단서였다.
“그럼 저 선의 끝을 확인할 방법이 있나요?”
루세는 잠시 망설였다.
“원점 확인 표식이 필요합니다. 처음 경로를 만든 장소와 대응하는 물건의 흔적이 있다면, 신호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대조할 수 있어요. 다만 물건이 있다고 해서 안전하게 돌려보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수현은 가방 안의 방전된 휴대전화를 생각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하지만 원점 확인에 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고, 무턱대고 장치에 연결하면 중요한 정보를 망가뜨릴 수도 있었다.
“개인 물품을 쓰려면 비파괴 검사와 정보 보호 조건부터 세워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현은 말한 뒤 잠시 웃었다. 집으로 가고 싶어서 이곳에 왔는데, 이제는 안전 검사부터 요구하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
검사를 시작하기 전 수현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칼든에게 보여 줬다. 그는 낯선 물체를 신기하게 바라봤지만 만지지는 않았다. 수현은 화면이 오래전에 꺼졌고 안에 개인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물건이 원점과 연결된 물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재질과 표식을 비파괴 방식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내용이 들어 있는 부품은 본인 동의 없이 열 수 없고요.”
수현은 조금 안도했다.
“그럼 소지품 검사에 동의한다고 해서 안의 내용을 읽는 것까지 허락한 건 아니라는 뜻이군요.”
“당연하죠.”
칼든은 그 문장을 따로 적었다. 그는 지금껏 물건을 조사하면서 소유자의 의사를 이렇게 자세히 물어본 적이 드물다고 했다. 대개는 장치가 작동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그 순서가 중요한가요?”
“제 물건이고, 제 고향이 걸린 문제니까요.”
수현은 웃었다.
그들은 기기를 작동시키지 않고 외형만 관찰했다. 배터리가 없으니 화면을 켤 수도 없었다. 루세는 이 물체가 원점 확인에 적합하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당장 시험에 쓰면 안 될 이유를 몇 가지 적어 두었다. 원래 세계의 시간 기준을 모르고, 회신을 받을 안전한 상대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그 설명을 듣고 휴대전화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돌아갈 길을 찾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소중한 기록과 자신의 몸을 급한 실험에 내맡기지 않는 것도 그 마음의 일부였다. 그녀는 칼든에게 다음에는 가상 표식부터 검증하는 방법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사람이나 물건을 실제로 옮기지 않고 검증할 수 있는 만큼 해 봅시다.”
루세가 대답했다.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루세는 마지막으로 시험과 조사 사이의 경계를 종이에 그렸다. 이 세계 안에서만 작동하는 모형으로 경로 식별자가 어떻게 기록되는지 살펴보는 단계, 원래 물건을 손상 없이 검사하는 단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안전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 물건도 보내지 않는 단계였다. 인체 이동은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수현은 단계를 하나씩 읽었다. 마음은 당장 마지막 문을 열고 싶었지만,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던 방식만큼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묻지 않은 채 밀어 넣는 문은 돌아갈 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각 단계 옆에 서명할 수 있는 사람과 중단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을 따로 적어 달라고 요청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좋겠습니까?”
루세가 물었다.
“좋지는 않죠. 하지만 지금은 그래야 합니다.”
수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오히려 움직이지 말라고 말하는 광경이 조금 우스웠다. 그런데 그 말이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처럼 느껴졌다.
***
밤의 여관에서 메이와 카이렌이 보낸 편지가 나란히 놓였다. 메이는 응급 보급이 개인 청구와 분리되어 처리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남은 치료비와 금속 고리는 여전히 심사 중이었다. 카이렌은 자신이 없는 날에도 원정대가 움직였고, 의료자료는 다음 방문에서 이어서 보겠다고 했다. 라비엔의 짧은 안부도 오르카의 편지 끝에 있었다. 그는 북방에서 스스로 정한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
수현은 편지들을 펼쳐 놓고 한참 읽었다. 그녀가 떠나더라도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이어 갈 것이다. 그 사실이 기뻤다. 동시에 언젠가 정말 떠난다면, 이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아렸다.
그녀는 종이를 꺼내 지난 열흘간 이어진 조사 결과를 한 장에 적었다. E-17 후보 이관, 종점 응답 미수신, 정지 요청 수신, 비상 분기 전달. 마지막에는 새로 확인한 한 줄이 있었다.
‘실제 작동 여부와 인체 이동 원리는 미확정. 그러나 비상 분기 번호는 독립 운용판에서 확인.’
종이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썼다.
‘돌아갈 문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문을 찾기 위한 질문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주소를 갖기 시작했다.’
수현은 그 종이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내일은 아무 장치도 켜지 않을 것이다. 먼저 누가 원점 표식을 검사할 권한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고, 자신의 물품과 정보를 어디까지 공개할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창밖에 종소리가 울렸다. 왕도의 밤이 깊어 갔다. 서울에서는 지금 몇 시일까. 수현은 답을 몰랐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내가 결정하고 갈 거야.”
그리고 불을 껐다.
제13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