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렌에게는 기억이 없는 사흘이 있었다.
수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질문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열과 피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당장 떠올리라고 요구하는 건 조사라기보다 괴롭힘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은 카이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좀 나아졌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해 보죠.”
그는 아침 식사를 끝내고 수현을 천막 뒤편의 작은 벤치로 불렀다. 안쪽에서는 메이가 물약을 정리하고 있었다. 카이렌은 손등에 난 하얀 고리 모양 흉터를 만졌다.
“의식을 잃기 전 기억은 분명합니다. 서쪽 골짜기에서 싸웠고, 제가 앞에 섰어요. 젠이 화살로 길을 열고 라비엔이 뒤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편하게 하세요. 순서가 틀려도 괜찮아요.”
카이렌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리 들렸어요. 눈을 뜨니 병상에 있었고 메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가 사흘이라고 했죠.”
“장부에는요. 그런데 메이가 말하길 이틀 동안 고열로 의식이 없었다고 했어요.”
“그럼 셋째 날은?”
“모르겠습니다.”
수현은 무릎 위 기록지에 두 개의 숫자를 나란히 적었다. ‘메이 기억: 이틀’, ‘공식 기록: 사흘’. 사람의 기억은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는 상태로 급여와 치료 비용이 계산됐다면 문제가 된다.
“그 사흘 동안 출정했다고 적혀 있는 건 알고 계시죠?”
카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눕혀져 있는 사이에도 제 이름으로 임무가 진행된 거군요.”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실제로 대리 수행했거나, 보고가 늦었거나, 날짜 입력이 잘못됐을 수도 있고요.”
“전투에 나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야 합니까?”
“우선은 누가 기록을 작성했는지 확인해야죠.”
카이렌은 한참 손등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라비엔이 기록 담당이었어요. 그 시기까지는요.”
***
메이는 수현의 질문에 오래된 약초 수첩을 가져왔다. 약재를 얼마나 썼는지 적어 둔 개인 기록이었다. 서리달과 다른 달력을 쓰는 지역이라 날짜가 하루씩 밀릴 수 있다는 설명도 붙었다.
“그때 카이렌의 열이 너무 높아서 저는 잠도 못 잤어요. 정확한 날짜가….”
“괜찮아요. 확실한 것과 확실하지 않은 걸 나눠 봅시다.”
수현은 종이를 세 칸으로 나눴다.
[직접 본 일 /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일 / 추정하는 일]
메이는 자신이 직접 확인한 붕대 교체와 맥박, 사제 방문 시각부터 적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소문은 들은 일 칸에 놓았다. 수현은 그 소문을 지우지도, 사실로 옮기지도 않았다.
“사제가 왔다고요?”
“회색 베일을 쓴 두 분이요. 벽에 마법진을 그렸어요. 아주 큰 마석도 있었고요.”
“소생술을 썼나요?”
“모르겠어요. 저를 밖으로 나가라고 해서요. 그때는 카이렌의 숨이 붙어 있었어요.”
수현은 펜을 멈췄다. 소생술에 필요한 물품이 있었다는 사실과 실제 소생이 있었다는 주장은 같지 않았다.
“그 뒤에 새 치료비가 청구됐나요?”
“많이요. 어디에 썼는지도 모르는 금액이요.”
“확인할 서류가 하나 더 늘었네요.”
메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수현 씨는 정말 서류를 싫어할 것 같으면서 좋아하네요.”
“서류 자체가 좋은 건 아니에요. 사람을 대신해서 기억해 주면 좋죠.”
***
오후에 수현은 원정대의 출정 보고서를 대조했다. 공식 문서에는 카이렌이 의식 없던 사흘 동안 모두 ‘전방 지휘’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동행자 명단은 날마다 달랐다.
첫날엔 라비엔과 젠, 둘째 날엔 라비엔 혼자, 셋째 날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휘자 서명란에는 똑같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런 인장은 자동으로 찍히나요?”
수현이 세드나에게 물었다.
“상황실에서 일괄 승인하면 찍을 수 있다. 다만 개인 서명과는 구별해야 해.”
“문서에는 그런 설명이 없어요.”
“낡은 양식이라 그래.”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흘 내내 지휘했다고 읽힐 텐데요.”
세드나는 종이를 자세히 보더니 볼펜 대신 깃펜 끝으로 수정 표시를 그렸다.
“장부상 직책 유지와 실전 지휘를 구별해 재조회하겠다. 당장 정정이 승인될지는 몰라.”
“그 정도면 충분해요. 우선 실제 기록을 보존해야죠.”
그때 문서 아래쪽에 찍힌 작은 기호가 수현의 눈에 들어왔다. 동그라미 속에 숫자 셋, 그 옆에 가느다란 흰 선.
“이건 뭔가요?”
세드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부서 기호가 아니야.”
“회복 관리국 표시일까요?”
“확답할 수 없다.”
수현은 기호를 그대로 그려 넣었다. 엉뚱한 인상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결론을 낼 생각은 없었다. 카이렌 손등의 흰 고리와 비슷해 보인다는 생각이 든 정도였다.
***
오후 훈련 전, 수현은 메이에게 개인 수첩을 원정대 공식 기록으로 복사해도 되는지 물었다.
“환자 이름까지 써야 해요?”
“아뇨.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치료 일자와 장비 사용량 정도만 확인하면 될 것 같아요.”
메이가 안도했다.
“아픈 사람들 이야기가 다른 사람한테 돌아다니는 게 싫었거든요.”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함을 입증하려고 누군가의 사적인 정보를 무턱대고 공개하는 건 또 다른 피해가 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름 대신 환자별 관리 번호를 적고, 원래 수첩은 메이가 직접 보관하기로 했다.
“그럼 내 장부를 믿을 사람이 더 많아질까요?”
“이 기록을 검토할 사람에게는 필요한 범위에서 충분할 거예요.”
“정보를 전부 보여 주지 않아도요?”
“네. 정보를 많이 보여 주는 것과 정확하게 보여 주는 건 달라요.”
메이는 그 말을 따라 읽었다. 수현은 서류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이세계에서 배운 첫 번째 행정은 ‘공식 기록이니까 무엇이든 다 적어야 한다’는 생각과 싸우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원정대의 훈련이 있었다. 카이렌은 검을 들었지만 무리한 일대일 대련 대신 동작 확인만 했다. 오르카는 아직 팔이 불편해 나무 인형의 위치를 조정했다.
젠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대장님, 오늘은 훈련 중간에도 물을 드시네요.”
“마시면 안 되나?”
“아뇨. 너무 생소해서요.”
카이렌도 웃었다.
그때 수현은 전령 한 명이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두리번거리는 걸 발견했다. 전령이 가져온 것은 정식 출정 명령이 아니라 ‘개인 명예 실적 확인’이라는 작은 종이였다.
“지난달 병상에서도 계속 지휘하셨으니 포상 대상이랍니다.”
카이렌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보상은 은화 한 닢이었지만,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해당 기간의 출정 사실에 이의 없음을 확인함.]
수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명하기 전에 이야기해 볼까요?”
전령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포상 신청서는 오늘 마감입니다.”
카이렌이 종이를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왕실 포상’이라는 말에 먼저 감사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수현을 봤다.
“이걸 받으면 제가 실제로 지휘했다고 인정하는 겁니까?”
“문장만 보면 그렇게 읽힐 여지가 있어요.”
“그럼 보상은 보류하겠습니다.”
전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화 한 닢인데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서명할 수는 없어요.”
카이렌은 종이를 돌려주었다. 수현은 그의 손끝이 떨리는 걸 봤다. 포상금이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실수할까 봐 두려운 사람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수현은 그날 기록을 훑다가 먼저 사람들의 시간을 되돌려 주기로 했다. 카이렌의 치료 시점을 확인하느라 오전 내내 대원들이 곁에 붙어 있었다. 그들 역시 자기 일이 있었다.
“오늘 직접 본 것까지만 적고 나머지는 내일 해요.”
“이런 문제가 중요한데요.”
젠이 말했다.
“중요하니까 잘 확인해야죠. 피곤하면 잘못 기억할 수도 있어요.”
수현은 모두에게 물었다. 기억이 불명확한 경우 ‘모른다’고 대답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것을. 젠은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어깨를 폈다.
“그때 저는 성벽 바깥에 있었습니다. 카이렌을 직접 본 건 둘째 날 새벽이었어요.”
“누구와 함께 있었죠?”
“데런이요. 식량을 갖다 주러 갔거든요.”
데런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둘째 날 새벽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 마차는 그날 해가 질 때 돌아왔으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같은 일을 겪고도 다른 날짜로 기억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다투지 마세요.”
수현이 말했다.
“이래서 물시계 기록이 필요하군요.”
젠이 머리를 긁적였다.
“날짜를 붙여 기억하지 않으면 되게 헷갈리네요.”
“맞아요. 진술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상황이 복잡했다는 뜻일 수 있어요.”
수현은 마차 출입 기록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사람 기억만으로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때 메이가 가볍게 기침했다.
“사실 그때 새벽마다 누가 천막 밖에 서 있었어요.”
“누구요?”
“모르겠어요. 회색 망토였는데 길드 직원일 수도 있고 성역 사제일 수도 있어요.”
“그럼 신원 미확인 방문객이라고 적죠.”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렌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사흘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잊은 게 불안합니다. 혹시 제가 사람을 다치게 했을까 봐요.”
수현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먼저 자신의 책임을 걱정했다.
“그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기억이 없는 부분에 무턱대고 죄를 채워 넣지는 마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확인하고, 실제 책임이 있다면 그때 마주하면 돼요.”
“제가 용사인데 그런 것도 모르고 있다니.”
“용사가 모든 걸 기억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나요?”
그 말에 젠이 웃었다.
“그런 규정 생기면 우리 대장은 제일 먼저 서명할 거예요.”
카이렌도 마지못해 웃었다.
메이는 물병을 건네며 말했다.
“넌 그때 많이 아팠어. 그 사실은 내가 확실히 기억해.”
카이렌은 병을 받았다. 세 사람의 말을 듣는 동안 그의 굳은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수현은 마지막으로 조사 메모에 또박또박 적었다.
[기억 공백과 책임 판단은 분리. 치유 기록과 출입 기록 교차 확인.]
이 글씨를 누군가 읽게 될지는 몰랐다. 그러나 오늘 카이렌을 붙잡고 과거를 추궁하는 일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저녁 무렵 뜻밖의 방문객이 왔다. 북쪽 초소에서 파견된 늙은 마부였다. 그는 예전에 제7원정대의 부상자들을 성역으로 실어 나른 적이 있다고 했다.
“카이렌 님 이야기 때문에 왔소. 그분이 의식이 없던 날, 내가 마차를 몰았지.”
수현은 먼저 이름과 당시 맡은 업무를 물었다. 마부는 토르빈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어디로 갔죠?”
“성역 뒤편까지. 그런데 안쪽은 못 들어갔어. 큰 짐이 실렸는데 무슨 상자인지는 못 봤지.”
“카이렌 씨도 마차에 있었나요?”
“그건 확실히 못 말하겠소. 붕대로 감싼 사람이 있었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니.”
“다른 탑승자는요?”
“방패를 든 사람 하나. 내게 물값을 줬는데… 라비엔이라 불렀던 것 같소.”
수현은 수첩에 적었다. 증언은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선명하게 남기는 쪽이 더 중요했다.
“혹시 날짜를 기억하시나요?”
“다음 날 마차 바퀴가 부러졌거든. 수리 장부에 날짜가 있을 거요.”
토르빈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목패를 꺼냈다. 수리점에서 건넨 보증표였다. 그 뒷면에는 짧은 글씨가 있었다.
[서리달 스물하나째 날. 북문 통과.]
수현은 공식 출정 명부를 다시 펼쳤다.
그날 카이렌은 왕립길드 북부전선에서 전투 지휘 중이라고 기재돼 있었다.
하지만 마차가 떠난 목적지는 전선이 아니라 성역 뒤편이었다.
“카이렌 씨.”
“네.”
“그날 누구와 어디에 있었는지, 이제는 명부 말고 다른 기록도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수현은 손등을 잡아당기지 않았다. 상처를 살피는 일도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카이렌은 잠시 후 스스로 손을 펴 보였다. 흰 고리 안쪽은 피부색이 달랐지만 피가 나거나 부은 자국은 없었다. 메이는 다음 진료 때 상태를 따로 확인하겠다고 했다.
카이렌은 손등의 흰 고리를 움켜쥐었다.
“그날 내가 어떻게 됐든… 라비엔은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수현은 대답 대신 그의 앞에 물 한 잔을 놓았다. 흉터가 무언가의 증거인지, 단지 치료 흔적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북문을 통과한 마차는 분명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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