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린 소렐의 이름이 다시 나타난 곳은 기술 장치가 아니라 우편함이었다.
남부 안전 관측소에서 온 답장은 예상보다 늦었다. 폭풍 때문에 길이 막혔고 운반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수현은 편지 뒷면에 찍힌 날짜를 보다가 또 웃었다. 서류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서류가 생기는 세상이라니.
동봉된 목록에는 과거 안전 정지 요청의 ‘담당자 회신 원본’이 적혀 있었다. 발신자는 에린 소렐. 하지만 서명 아래의 문구가 수현을 더 놀라게 했다.
‘대상자 의사 확인이 불가능하므로 인체 접속을 승인할 수 없음.’
수현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세드나는 글씨의 시기를 확인했고, 루세는 종이의 기술 용어가 당시와 맞는지 살폈다. 아무도 갑자기 에린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았다. 오래된 반대 의견이 있다는 것과 실제 작동을 막았다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이 사람은 적어도 그때 이런 말을 했네요.”
수현이 말했다.
“서명 진위부터 확인해야 해요.”
세드나가 답했다.
“그리고 이분이 R-0 응급 보호 기록에 나온 에린과 같은 분인지도요.”
“그것도 아직 모르죠. 같은 이름이 반복될 때 가장 위험한 건 우리가 한 사람의 이야기로 합쳐 버리는 거예요.”
수현은 인영 대조 신청서를 썼다. 상대가 살아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허락 없이 신원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공적 기록의 서명이 같은 직책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해 달라는 범위로 한정했다.
***
왕도 우편 기록원의 작은 회의실에서 수현은 그레아를 다시 만났다. 과거 통지서를 직접 받지 못한 탓에 일자리를 잃었던 은퇴 전달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퇴직 정산이 재검토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결정이 난 건 아닙니다. 그래도 제 이야기를 누군가 제대로 적어 주더군요.”
“다행이에요.”
“당신은 아직도 집에 못 돌아갔죠?”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아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작은 종이 조각을 꺼냈다. 에린 소렐이라는 이름이 적힌 옛 내부 교육 자료의 표지였다.
“제가 젊었을 때는 회신을 받지 못하면 ‘미수령’이라고 쓰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어느 해부터는 담당실에 도착하면 ‘완료’라고 쓰라는 지침이 생겼죠. 반대 의견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 일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제가 직접 본 건 아닙니다.”
수현은 기록했다. 직접 들은 이야기와 직접 본 사실을 구분했다.
“이 지침이 언제 바뀌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교육 원본을 찾으면 되지요. 내가 가진 것은 표지뿐이니까.”
그레아는 빙긋 웃었다.
“이제 당신도 어지간한 행정 직원보다 그 말을 잘하겠네요. 원본을 찾아야 한다고.”
“네. 취업할 생각은 없는데 업무가 자꾸 늘어나네요.”
“그럼 급여라도 받으세요.”
“지금은 제 개인 사건이라서요. 비용은 따로 신청하고 있습니다.”
그레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아주 먼 곳에서 이어진 작은 동료애를 느꼈다. 서로의 시대도 업무도 달랐지만, 받은 적 없는 통지를 받았다고 처리된 사람들 사이에는 비슷한 표정이 있었다.
***
오후에 문서 보존 담당 이베른이 조사 결과 일부를 보내 왔다. 에린 소렐이라는 이름은 당시 안전 심사 보조 기록에 실제로 있었고, 그가 작성한 것으로 기재된 이의서가 여러 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인장 자체는 부서 공용으로 사용된 시기도 있어 개별 문서의 작성자를 바로 단정할 수 없었다.
“반대 의견을 여러 번 썼다면 저와 생각이 비슷했겠네요.”
수현이 말했다.
“비슷한 생각과 같은 결론은 다르죠.”
세드나가 답했다.
“알아요. 오늘은 가끔 마음에 드는 사람을 상상해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창가에 기대 잠깐 눈을 감았다. 처음 이 세계로 날아왔을 때 진정서를 보낸 사람이 자신을 위한 함정을 판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시간이 흐르며 메이가 진정서 원문에 그런 요청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는 오래된 기록 속에도 누군가 ‘동의 없는 이동은 안 된다’고 적은 흔적이 나타났다.
수현은 그 사람이 끝내 성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실패한 반대 의견도 누군가에게는 실마리가 된다. 완전히 외로운 싸움은 아닐지도 몰랐다.
***
그날 저녁에는 북방 회복소에서 라비엔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의 문장은 짧고 담백했다. 전출 계약 중 일부 보수 정산이 이루어졌고, 남은 사항은 자신이 계속 확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분간 회복소에서 체류하며 기록 협력 일을 하겠다고 했다. 오르카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도 있었다.
수현은 일부러 답장을 서둘러 쓰지 않았다. 라비엔은 이미 자신의 일정을 알고 있었고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계획을 세워 주는 건 그를 또 다른 계약에 묶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었다.
“라비엔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죠?”
오르카가 저녁 식탁에서 물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곳에 가 볼 생각도 있어요. 다만 그 사람이 원할 때요.”
수현이 웃었다.
“이제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원래는 제가 배웠던 말이잖아요.”
오르카의 얼굴에 오래된 상처가 부드럽게 접혔다. 수현은 예전과 달리 그 상처를 보고 영웅의 희생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오랫동안 아팠을 사람을 보았다.
***
에린 소렐 명의의 문서를 조사하던 수현은 왕도 기록원에서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보존 사서 이베른이 수현의 기록을 나중에 다른 연구자가 읽어도 되는지 묻는 것이었다. 수현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내용을 공개한다는 건가요?”
“당사자 동의가 없는 행정 처리의 위험에 관한 사건 개요입니다. 개인 이름이나 출신 주소는 가리려고 합니다.”
수현은 그 정도라면 검토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녀의 사건을 신비한 차원 이동 이야기로 꾸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낯선 환상담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실제 삶이었다.
“절차의 문제는 공개해도 좋지만, 제 개인 정보를 누구나 볼 수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베른은 동의 범위를 문서로 따로 적었다. 사건이 미완결이므로 결과가 확정된 것처럼 요약하지 말라는 요구도 받아들였다.
수현은 그 문서를 보며 이상한 위로를 느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기록하더라도 적어도 동의를 먼저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 소환이 이루어진 날에는 그 한 가지가 없었다.
***
이베른은 이어 오래된 교육 자료의 분류표를 보여 줬다. 수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표였다. ‘수신’, ‘접수’, ‘전달’, ‘인계’, ‘개인 수령’이 각각 다른 기호로 적혀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 그중 일부가 하나의 ‘완료’로 합쳐졌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왜 합쳤을까요?”
수현이 물었다.
“서식을 간단히 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업무에 적절했는지는 별도 문제죠.”
“간단히 만들다 중요한 사실을 잃은 거군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그 변경이 이수현 씨 사건에 직접 어떻게 적용됐는지는 증거를 더 찾아야 합니다.”
수현은 기호가 적힌 종이를 바라봤다. 단순한 화면 한 칸에도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 쓰던 프로그램에서도 ‘완료’라는 글씨는 때로 사람을 속였다. 회사 안에서는 결재가 완료됐다는 의미였지만, 실제로 지급이 되었는지는 다른 일이었다.
이베른이 보존 문서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오래된 반대 의견 서식에는 에린 소렐의 이름이 두 번 나왔다. 하나는 작성자, 다른 하나는 검토자였다. 두 기록의 글씨가 달라 보였지만, 그 시대에는 대필 관행도 있었다.
“그럼 이 이름을 사용한 사람이 둘일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고 서식 종류에 따라 대필했을 수도 있습니다.”
수현은 동의했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모든 행동을 이어 붙여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이 이름은 회복 신고 기록에도 남아 있었다. 그 둘이 같은 사람인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가해자나 구조자로 결정하는 것은 위험했다.
***
그날 늦게 호른의 책 수리점에서 작은 모임이 열렸다. 그레아와 이베른, 세드나가 함께 낡은 인수증의 종류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호른은 책장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종이를 꺼내어 보여 줬다. 종이 가장자리에는 수리한 흔적이 있었고, 날짜는 군데군데 읽기 어려웠다.
“서류의 상태가 이렇게 달라지면 서명도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설명했다.
수현은 종이를 사진처럼 기억하려 하지 않고 각 기호를 하나씩 그렸다. 그레아는 어떤 날에는 담당자의 인장이 아니라 우편을 받은 사람의 확인 도장이 찍히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럼 담당실 완료와 개인 수령이 서로 바뀔 수도 있었겠네요.”
“예. 지금은 우편실에서 고친 규칙도 많지만, 옛 기록을 다시 읽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호른이 대답했다.
모임이 끝나기 직전 그레아가 수현의 손을 잡았다.
“당신 덕분에 내 퇴직 정산도 다시 보게 됐어요.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
“아직 결과는 모르는 걸요.”
“그래도 내가 말할 기회가 생겼잖아요.”
수현은 따뜻하게 웃었다. 그녀가 정말 바라는 것도 그랬다. 자신이 돌아갈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어도, 누군가의 말이 없었던 일로 처리되지는 않는 것.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현은 종이 가게에 들러 작은 봉투를 샀다. 앞으로 발견할 자료와 개인 편지를 분리해서 담을 생각이었다. 세드나가 그 봉투를 보고 말했다.
“짐이 더 늘어나겠군요.”
“돌아갈 때도 전부 가져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남길 것을 정해야겠네요.”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떠날 날이 온다면 물건뿐 아니라 이야기와 약속도 골라야 할 것이다. 아직 그날은 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벌써 떠날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수현은 에린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따로 봉투에 넣었다. 봉투 겉면에는 ‘현재 책임자 미확정’이라고 적었다. 그 아래에는 자신이 알게 된 사실만 썼다. 옛 회신 서식에 에린 소렐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는 것. 반대 의견이 존재했다는 것. 그 의견이 집행을 멈췄는지는 모른다는 것.
종이를 덮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누군가를 쉽게 악역으로 만들지 않아도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었다. 수현은 자기 사건의 원인도 반드시 한 사람의 악의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만든 나쁜 절차는 충분히 위험했고, 그 절차를 고치는 일에는 여러 사람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메이에게 짧은 안부를 보냈다. 메이는 다음 날 진료소에서 새 보급 절차를 시험한다고 답했다. 서로 다른 곳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같은 종류의 문장을 쓰고 있었다. ‘본인이 원한 일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 수현은 자신이 에린을 어떤 사람으로 상상하고 있었는지 돌아봤다. 이름 하나가 반복해서 나타나면 사람은 그 이름에 이야기를 붙이고 싶어진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름은 결론이 아니라 시작점이어야 했다. 그래서 수현은 봉투에 붙인 표제를 다시 확인했다. ‘동일인 여부 미확정.’ 마지막까지 그 문장을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오랜만에 서울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해 보았다.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
잠들기 직전, 세드나가 문을 두드렸다. 보존청에서 교육 원본의 색인이 발견됐다는 연락이었다. 에린 소렐 명의의 이의서와 ‘부서 도착=당사자 수령’ 변환 규칙 사이의 논쟁이 몇 해에 걸쳐 이어졌던 흔적이 있었다. 정확한 개정 시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반대 의견이 사라진 뒤 안내문 문장이 달라졌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이 없어지니까 규칙도 바뀌었나요?”
수현이 중얼거렸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릅니다.”
“그렇죠.”
그녀는 조용히 책상에 앉아 두 장의 메모를 펼쳤다. 에린이라는 이름이 과거에 여러 문서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그러나 수현의 강제 소환을 실행한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몰랐다.
수현은 서둘러 친구나 적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서명 진위를 확인할 공적인 절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메모 옆에 이렇게 썼다.
‘반대 의견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 의견이 실제로 작동을 멈췄는지는 별도로 확인한다.’
그 문장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로 적었다.
‘나중에 누군가 내 기록을 읽는다면, 나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확히 반대하고 정확히 확인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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