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차단 재검사표를 열람하는 날, 왕도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수현은 자신이 날씨를 고르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미얀마의 우기 같은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왕도의 중요한 기록은 꼭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 때 나타났다. 다만 이곳에서는 폭우가 쏟아지면 마차가 미끄러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래된 운하의 마력 관이 울리고, 종점 운용실의 잠든 유리관이 낮게 떨었다.
“기계는 작동을 중단한 게 맞죠?”
수현이 묻자 루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 동력은 차단돼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자연 마력이 예전 회선에 흔적을 남길 수 있어요. 그래서 폭풍 속에서는 계측도 제한합니다.”
“오늘 자료를 보다가 뭔가 빛나면 사진 찍듯 기록해도 되나요?”
“바로 나오는 게 먼저입니다.”
“알겠습니다. 증거보다 사람.”
그 말에 루세가 짧게 웃었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장갑을 끼고 봉인 기록실로 들어갔다. 가운데 탁자에는 재검사표 원본이 있었고, 양옆에는 세드나와 별도 보존 담당자가 앉았다. 원본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사본 대조가 허가됐다.
첫 항목은 노아의 봉인 기록과 일치했다. ‘종점 응답 미수신.’ 두 번째는 ‘자동 차단 확인’. 셋째는 수현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차단 이전 후보 접속 계수: 1.’
“접속이 한 번 있었다는 뜻인가요?”
루세는 고개를 저었다.
“후보 접속 계수가 하나 증가한 것은 시스템이 연결을 시도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실제 경로가 열렸다는 증거는 아니에요.”
“이전에는 후보 이관까지만 알았죠. 이제 접속 시도 흔적이 있다는 거군요.”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습니다.”
수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작아 보여도 큰 차이였다. 담당실 배정표 다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묻던 질문에, 이제 기술 장치의 시도 기록이 이어진 것이다.
***
정오가 가까워지자 건물 바깥에서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루세가 일어나 창문을 확인했다. 운하에서 불어난 물이 동쪽 벽 아래까지 올라왔다. 현장 관리 책임자는 보존 자료를 위층으로 옮길 준비를 지시했다.
“원본을 먼저 빼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젊은 직원이 말했다.
“출구를 먼저 확인하세요.”
루세가 대답했다.
수현은 사람들을 유도해 통로를 비웠다. 그때 높은 선반의 경첩이 바람에 흔들리며 풀렸다. 서류 보관함 하나가 쓰러질 듯 기울었다. 직원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세드나가 팔을 잡아당겼다. 보관함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종이와 나무 조각이 흩어졌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수현은 바닥에 퍼진 서류를 보다가 순간 몸을 숙일 뻔했다. 재검사표 옆에 있던 보조 목록이 바람에 밀리고 있었다. 루세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이수현 씨.”
“네.”
“지금은 나갑니다.”
수현은 바로 일어났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알았다. 예전에는 한 장이라도 더 챙기겠다며 버텼을지 몰랐다. 그러나 사람을 다치게 하면서 돌아갈 길을 찾는다면, 자신은 돌아간 뒤에도 그 일을 평생 후회할 것이다.
그들은 외벽의 돌계단으로 올라갔다. 밖에서는 비바람이 얼굴을 때렸고, 종점 운용실의 작은 종이 혼자 울리는 듯했다. 수현은 그 소리마저 기록하려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지금 적어야 할 것은 사람이 모두 나왔는지였다.
***
폭풍이 잦아든 뒤, 보존 담당자는 원본 손상 여부를 확인했다. 재검사표는 젖지 않았다. 다만 떨어진 보관함에 묶인 서류 가운데 ‘안전 정지 수령 결과’가 별도로 있었다. 수현은 파손으로 우연히 드러난 문서라고 해서 열람 권한까지 생긴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정식 신청을 하겠습니다.”
담당자는 수현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데요?”
“눈앞에 있다고 제 것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날 오후 정해진 절차로 발행된 사본에는 낯선 이름 대신 세 줄의 상태가 나왔다.
‘중단 요청 수신: 있음.’
‘장치 구동 차단: 다음 교정 시점 확인.’
‘대상 이동 여부: 판정 불가.’
수현은 마지막 줄을 세 번 읽었다. 멈추라는 요청을 받았는데도 자동 구동 차단은 즉시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사이 사람이 실제로 이동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교정 시점이라는 건 정확히 언제인가요?”
루세가 기록을 살폈다.
“당시의 시계가 서로 달라서 같은 분 안에서 일어난 순서를 아직 확정할 수 없습니다. 안전 정지 수신 뒤 차단됐을 수 있고, 차단이 먼저 되었는데 기록이 늦게 정리됐을 수도 있어요.”
수현은 눈을 감았다. 아주 긴 길을 돌아 또 시간 보정의 문제로 돌아온 셈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물시계와 진동 시계가 왜 문제가 되는지, 유렌의 수기가 무엇을 가리켰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교정 시각 원장과 비교하죠.”
“그 원장은 다른 곳에 있어요.”
“어디요?”
루세는 서류 끝의 보존 주석을 읽었다.
“남부 안전 관측소. 당일 비상 기록은 따로 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곳이었다. 수현은 화낼 힘도 남지 않아 웃었다.
“기록들이 서로 떨어져 사는 걸 좋아하나 봐요.”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하나가 망가져도 남습니다.”
세드나가 답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이전에는 성가신 행정이라고만 생각했던 분리 보존이 이제는 진실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단 하나의 서류가 어떤 방향으로 고쳐져도 다른 서류가 남아 있다면 바로잡을 기회가 생겼다.
***
폭풍 뒤 보존실 정리회의는 예상보다 조용했다. 직원들은 각자 어디에 있었는지 적고, 누구의 도움으로 밖에 나왔는지 확인했다. 수현은 자기 자리에 서류가 날아왔다는 사실도 남겼다. 그 서류를 잡으려고 몸을 숙일 뻔했다는 일도 빼지 않았다.
“그런 실수까지 왜 적습니까?”
젊은 담당자가 물었다.
“다음에 똑같은 일이 생기면 왜 위험한지 설명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비난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비난을 줄이는 게 안전 관리의 일이겠죠. 사람들이 실수를 숨기기 시작하면 같은 사고를 더 크게 겪을 수 있어요.”
보존 책임자는 나중에 조사표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누구를 벌할지 먼저 결정하지 않고, 위험한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와 출구가 막히지는 않았는지부터 살피는 방식이었다.
루세는 진열장을 복구하는 동안 낡은 자동 경고 장치를 찾아냈다. 커다란 소리를 내는 장치였지만 실제로는 고장이 나 있었다. 폭풍 때 직원들이 들었다고 생각한 종소리의 일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빈 관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면 제가 들은 소리도 경고가 아닐 수 있겠군요.”
수현이 말했다.
“네. 현장의 소리를 들었다는 진술과 경고 장치가 작동했다는 사실은 다른 문제입니다.”
루세가 답했다.
그들은 종소리를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관이 움직였을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비가동 상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기록했다. 작은 차이였지만 이번 조사에는 중요했다. 오래전 누군가 종을 들었다는 증언만으로 안전 요청이 실제 전달됐다고 단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보존 담당 페른에게서 별도의 편지가 도착했다. 제4독립보존고에서 손목을 다쳤던 그는 이번에는 위험한 상자를 옮기지 않고 목록 정리를 맡고 있었다. 일이 줄어든 것이 처음엔 죄송했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이 책을 옮길 때도 둘이 힘을 합쳐 나르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일이 느려진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속도를 알게 됐습니다.’
수현은 그 문장이 좋았다. 속도가 느려졌다고 해서 항상 비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사고 한 번이 몇 달의 공백을 만들 수 있다면, 안전한 속도를 찾는 것이 오히려 빠른 길이다.
그녀는 답장으로 부상 회복이 잘되고 있는지 물었다. 자신의 사건과 연결될 때만 연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록 담당자도 사람이고 그가 다친 손목은 조사 증거를 지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
다음 날 루세는 기술실의 젊은 직원들을 모아 시각 교정 자료를 교육했다. 오래된 물시계와 진동 시계가 왜 다른 숫자를 쓰는지 설명하자 직원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날의 순서를 못 맞출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럼 조사 실패입니까?”
수현이 옆에서 말했다.
“아니요. 순서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조사 결과예요. 그다음에는 순서 없이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찾으면 됩니다.”
직원들은 정지 요청 수신과 비상 분기 기록을 서로 다른 카드에 적었다. 두 카드 사이에 화살표를 그리려다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표시를 넣었다. 수현은 그 도표를 보며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누구도 편리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모르는 부분을 채우지 않고 있었다.
그날의 교육은 인체 시험이나 장치 재가동 없이 끝났다. 학생들 손에는 종이와 펜만 남았다. 수현은 그런 기술 교육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복구 작업을 마친 기술청 직원들은 처음으로 폭풍 대피 시간을 따로 계산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 있으면 그 시간을 결근처럼 적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수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메이의 치료비 고리를 떠올렸다. 기록상 그럴듯한 이름 하나 때문에 실제 사람의 선택이 다르게 평가되는 일이 이곳 곳곳에 있었다.
“대피 시간을 노동하지 않은 시간으로 계산하는 이유가 있나요?”
수현이 물었다.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젊은 기록원이 답했다.
“그렇다면 기계가 넘어지는 걸 피하려고 나온 것도 개인의 휴식이 되는 걸까요?”
기록원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안전 담당 파르마는 업무를 위해 대피했을 때와 개인적인 외출은 다르다고 정리했다. 최종 보수 처리 기준은 기술청이 검토해야 했지만, 적어도 무단이탈이라고 적지 않기로 했다.
수현은 누구에게도 왕국 법령의 정답을 가르친 척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실제 상황을 먼저 적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계를 두고 나옴’이 아니라 ‘위험 경보에 따라 지정된 장소로 대피함’. 두 문장은 전혀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읽혔다.
점심에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바닥의 물을 닦았다.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의 시간도 기록했다. 청소는 보이지 않는 일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 한 줄도 남기지 않고 지나친 흔적이 되기 쉬웠다. 수현은 청소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함께 손을 씻으러 갔다.
루세는 작업자 한 명이 손바닥을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진료소에 연락했다. 그 직원은 대피하다 벽에 긁힌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루세는 작은 상처가 이유 없이 커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직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수현은 자신의 판단을 강요하지 않았다. 동의를 확인하고 안전하게 진료를 받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작은 행동이지만 종점 운용실의 오래된 실험 기록보다 지금 눈앞의 사람에게는 더 중요할 수 있었다.
***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 수현은 젖은 망토를 벗고 천천히 걸었다. 오늘 발견한 문장은 세 개뿐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은 오래된 사건을 제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누군가가 정지를 요청했다는 건 공식적으로 확인된 거죠?”
“네. 다만 누가 왜 요청했는지와 실제 작동 순서는 더 확인해야 합니다.”
세드나는 대답했다.
“그 요청을 무시한 사람을 찾으려는 건 아니에요.”
수현은 말했다.
“우선 요청이 어디에서 멈췄는지 찾고 싶어요. 사람 잘못인지 기계 잘못인지, 아니면 둘이 겹친 건지요.”
“그걸 알아도 집으로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요.”
“알아요. 하지만 적어도 다음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데려와지는 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세드나는 한참 말이 없었다. 운하 위로 물안개가 떠오르고, 멀리 야간 근무자들이 작은 등불을 들었다.
수현은 처음 여기 왔을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아무 지도도, 지인도, 도와줄 제도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함께 기록을 읽는 사람이 생겼다. 그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는 메이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오늘도 돌아가지 못했어요. 대신 누군가가 멈추라고 말했다는 기록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쉽시다.’
편지 끝에 그림 하나를 덧붙였다. 기울어진 보관함 옆에서 모두가 바깥으로 나가는 장면이었다. 그림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메이라면 알아볼 것이었다. 누가 종이를 챙겼는지보다 누가 안전하게 나왔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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